느림의 미학 452 백수 수레국화와 사랑에 빠지다.
2019. 5. 18.
미세먼지 지수가 좋아 창문을 여니 아카시 향이 들어온다.
녹색의 숲에 마치 흰 눈이 내린 듯 집 앞 낮은 산에 아카시 꽃이 활짝 피었고,
이팝나무에도 하얀 꽃이 수북하게 피어 한겨울 눈꽃처럼 백색 세상이 되었다.
08;30
아기들이 축구교실에 갈 시간이다.
시험과 사업, 출사 등으로 다 바쁜 휴일에 아기들 챙기는 건 백수인 내 몫이다.
한참을 뛰어놀아 땀으로 옷이 젖었어도 아기들 몸에서는 풋풋한 냄새가 난다.
반면에 나이 먹은 사람이 땀을 흘리면 아주 정갈하게 씻는다 해도 어느 정도는 냄새가
나는데 세월의 때가 낀 찌꺼기가 흘러 나왔기 때문이겠지.
나는 진심으로 아이가 잘되기를 바란다.
학교생할과 유치원생활에 대해 자주 대화를 하는데, 아직까지는 큰문제가 없이
건강하게 잘 자란다.
나는 칭찬을 잘하는 편이다.
고객만족과 직원만족은 은행영업점에서 떼어놓고 생각을 할 수가 없을 정도로
몸에 밴 일상이었지.
칭찬을 많이 하면 아이들이 더 잘할까?
학원이나 과외를 통하여 선행학습을 시키면 공부를 더 잘할까,
학교 폭력 피해자가 되느니 맞지 말고 차라리 때리고 오라고 교육을 시켜야 되는가.
학교와 유치원에서 친구가 많은가,
성격은 너무 소심하지 않은가,
아이의 모든 것을 교사에게만 그냥 맡겨도 되는 걸까,
축구교실에 가는 셔틀차량이 올 때까지 많은 생각이 오고간다.
물론 어느 게 좋은지 정답은 분명하지 않다.
아이 교육은 교사와 부모, 사회전체가 힘을 기울여야 제대로 행복해지겠지.
언젠가 내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든사람, 난사람, 된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고 '된사람'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할아버지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아기들을 보내고 나만의 little forest로 들어서니 '때죽나무'가 하얀 꽃을 피웠다.
하나의 암술을 10여 개의 노란 수술이 둘러싼 꽃은 태양을 바라보는 해바라기성(性)아
아니고 부끄럼을 타는 새색시의 모습처럼 고개를 다소곳하게 숙여 피었다.
어느 전문가들은 머리를 빡빡 민 중(僧)들의 머리를 연상한다 해서 때중~때죽나무가
되었다고 하는데 열매껍질에 든 사포닌(saponin)성분은 피를 맑게 하고 이뇨효과가
있다.
또한 때죽나무의 egosaponin에는 물고기를 일시적으로 마비시키는 어독(魚毒)이 있어
오래전 월악산 송계계곡에서 때죽나무를 이용해 꺽지와 중태미를 잡은 기억이 난다.
그 당시는 낚시를 즐길 때라 아무 죄의식 없이 살생(殺生)을 저질렀는데,
머리수술 후 피라미 한 마리, 중태미 한 마리의 생명도 소중하게 생각되니 내가
참 많이도 변했다.
요즘 숲의 만물은 눈과 귀와 코를 호강 시켜준다.
숲속의 한구석에 자리한 '의아리'는 눈을 즐겁게 해주고, 나무 위 온갖 새들은 노래를
불러 귀를 즐겁게 하고, 바람에 실려온 은은한 아카시 향이 코를 즐겁게 해주는 거다.
꾀꼬리가 비명을 지른다.
다른 새들과 영역다툼에서 밀려나 "웩"하며 고라니 비슷한 비명을 지른다.
나는 저 소리를 솔부엉이 소리로 알았는데 알고 보니 꾀꼬리가 평소엔 아름다운 소리를
내다가 위험이나 궁지에 몰리면 저렇게 비명을 지른다는 거다.
요즘 '수레국화'와 사랑에 빠졌다.
처음 만났던 꽃송이가 떨어진 후 별로 기대를 갖지 않았는데 며칠이 지나자 주변에
서너 송이가 더 피었다.
수레국화의 꽃 모양과 색깔이 참 신비하다.
초록의 바다에서 진청색에 분홍색과 보라색이 약간 가미된 신비한 색은 숲의 초록에
대해 색(色)의 반란을 일으켰다.
수레국화(팔랑개비 국화)는 지중해 연안, 유럽, 북미에서 많이 재배한다는데,
여기선 토착화 되어 토종이 되었다.
수레국화꽃이 오늘은 어느 놈이 떨어졌고, 내일은 어느 놈이 꽃을 피우려나,
궁금해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으니 이놈들 매력에 내가 푹 빠진 모양이다.
빗방울이 떨어진다.
잠시 대피한 정자의 지붕에 빗물이 마구 떨어진다.
나 혼자만이 산자락에서 듣는 빗소리,
아늑하고 고즈넉하게 들리는 빗소리는 마음을 잔잔히 보듬는다.
빗줄기가 약해진다.
새색시처럼 소리 없이 수줍은 듯 내리니 '색시비'로구나.
30도까지 올랐던 어제의 후덥지근함도, 오늘 새벽 어깨 통증도 '일비'의 예보였던
모양이다.
허리가 많이 구부러진 할머니가 지팡이 하나를 의지해 산모퉁이를 돌아 올라온다.
세월의 무게가 온통 쌓인 할머니의 허리에 연민의 눈길을 보내며 백수의 하루는
이렇게 지나간다.
2019. 5. 18.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