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의 미학 713 산길에서 만난 너구리
2022. 10. 22. 05;00
무서리가 내렸다.
서리를 맞은 '쇠별꽃 아재비'가 숲 길가에서 반짝반짝 빛난다.
어제 남산 둘레길 종주를 했다.
남산 한 바퀴와 종일 걸은 거리가 18.2km에 24,000 여 보가 나왔으니
최근 들어 제일 많이 걸은 모양이다.
전날 과도했던 운동량으로 종아리가 뻑적지근하기에 습관대로 4시쯤
기상했지만 새벽 운동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 숲 속을 향한다.
숲 속에서 어슬렁거리는 저놈이 고양이는 아닌데 무엇이지?
가까이 다가가니 뜻밖에도 검은 너구리다.
부모 너구리와 새끼 7마리 등 9마리를 지난봄에 처음 발견하고 가끔
마주쳤는데 그동안 새끼들이 제법 자랐다.
너구리는 나를 잔뜩 경계를 하면서도 도망을 가지 않는다.
내가 저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선 모양이다.
경복궁에서 만났던 너구리는 내 다리를 비비며 애교를 떨었는데
이 녀석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한다.
너구리는 큰소리만 들려도 죽은 척을 하는 동물이기에 능청맞다는
느낌이 드는 동물이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 도망가기보다는 죽은 척을 한다는 너구리를
바라보며 주머니를 뒤적거리지만 사탕 두 알밖에 없으니 줄 게 없다.
너구리는 개과 중 유일하게 겨울잠을 자는 동물이다.
체중을 많이 불려야 겨울잠을 제대로 잘 수 있는데 사람들이 도토리와
밤을 많이 주워 갔으니 걱정이 된다.
너구리는 식성이 잡식으로 도토리 등 나무 열매를 잘 먹으며,
들쥐나 파충류, 조류, 어류, 곤충류 등을 먹는데 요즘 이곳에 사는
8마리의 청설모가 보이지 않는다.
너구리는 다른 동물에 비해 행동이 조금 둔하다.
날랜 청설모가 설마 너구리에게 잡아 먹히지는 않았겠지.
< 칡꽃 >
사람들은 여러 동물에게 나름대로 이미지를 만들었다.
너구리는 내숭 떠는 능청스러운 동물로, 곰은 미련하고 우직한 동물로,
범은 용맹스럽고, 여우는 꾀를 내거나 거짓말을 하는 동물로 만들었다.
새에게는 '새대가리'라는 이미지를 덧씌워 멍청하게 표현을 하는데,
이런 왜곡된 이미지를 만든 사람이야말로 멍청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모가 죽을 때까지 같이 살아 반효조(伴孝鳥)라는 별칭을 얻은 까마귀,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이 있는 영리한 까치,
동료가 다치면 회복될 때까지, 또는 죽을 때까지 곁을 지키다가 떠나는
기러기,
일부일처를 고집하는 기러기,
부부금슬이 좋다지만 일 년마다 배우자를 바꾸는 바람둥이 원앙,
새끼를 등에 태우고 기르는 뿔논병아리,
휘파람새나 붉은머리오목눈이 등 작은 새둥지에 탁란(托卵)을 하는
뻐꾸기,
딱딱한 열매를 공중에서 떨어뜨려 깨 먹는 직박구리,
물고기를 패대기쳐 기절시켜 먹는 물총새,
집을 지을 때 지붕을 만들고 비닐을 물어다 깔개를 만드는 개개비 등
새들이 얼마나 영리한가.
이렇게 온갖 생존의 지혜를 구사하는 동물을 사람들은 자기네의
잣대로만 판단해 멍청하다는 표현을 한다.
숲 속 여기저기에 도토리 툭툭 떨어지며 정적(靜寂)을 깬다.
10월도 어느새 하순에 접어들고 가을은 깊어만 간다.
동쪽 하늘엔 그믐달과 샛별이 걸렸고, 아직 먼동이 트기 전인데
끼룩대며 기러기떼들 비행 연습을 한다.
된서리 내리기 전 머나먼 곳으로 떠날 모양이다.
2022. 10. 22.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