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느림의 미학 735 우연욕서(偶然欲書)가 생각나는 휴일

김흥만 2023. 2. 12. 18:03

2023.  2.  12.  10;00 

초미세먼지 지수가 '매우 나쁨'으로 나와 새벽운동을 걸렀다.

늘 해오던 새벽운동을 하지 않으면 몸과 마음이 괜히 무거우니

운동중독증인 모양이다.

 

Tv를 튼다.

좋은 소식은 없고 '튀르키예'의 지진 소식이 우울하게 만든다.

 

사람은 환경에 순응하기에 천재지변에 적응하고 나쁜 환경이

발생해도 주어지는 것에 대해 금세 받아들이는 순발력을

발휘한다.

 

때로는 받아들이기 싫어 거스르기도 하지만, 

인간의 힘으로 극복하지 못하거나 애를 써도 달라지지 않는다면

그냥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튀르키예(터키) 지진현장의 처참한 모습을 보며,

비록 내 나라가 아니어도 사망자가 2만명이 넘었다는 통계는 

그들의 아픔에 동조하는 나마저 점점 암울(暗鬱)하게 만든다.

 

사람이 견딜 수 있다는 한계시간인 72시간을 넘어 생존자를 구조

했다는 좋은 소식이 나오면 저절로 숙연해지고 가슴에 진한 감동을

느끼기도 한다.

 

추위에 떠는 그들에게 당장 텐트와 따뜻한 옷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커피 석잔값이면 튀르키예에선 담요 5장이 가능하다며

도움을 호소하는 기사를 봤다.

 

내가 줄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나와 가족이 입던 옷도 가능할까.

오늘의 할일을 찾았으니 주저하지 않고 옷 수납장을 연다.

 

수년째 오(伍)와 열(列)을 지어 옷장에 곱게 모셔두었던 내 옷들이

세상밖으로 나온다.

 

12;00

은퇴 후 가장 고민한 것은 갈 데가 없어 집에 박혀있는 것이었다.

어떤 칼럼에 의하면 은퇴 후 가장 사랑받는 남편은 '집에 없는 남편'이요,

미움받는 남편은 집에서 삼시 세끼를 챙겨 먹는 '삼식(三食)'이라 했다.

 

누구든지 삼식이라는 호칭이 붙는 순간 남자는 무능해지고 배신감을

느낀다.

집에서 눈치를 받으면 식욕이 없어지고, 불면증도 생기고 만사가

귀찮아지는데 바로 은퇴증후군과 함께 우울증이 생긴다는 거다.

 

백수 15년차,

나는 삼식(三食)이가 되지 않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을까.

친구 사무실에 잠시 의탁(依託)을 하기도 했고,

오피스텔의 방 하나를 빌려 바깥생활을 하며 우울증을 겪지 않으려

했다.

 

집안일을 찾아서 하려 했고,

친구들을 많이 만나 소통하려 했고,

뒤늦게나마 마비되어 어눌해진 팔로 당구를 배우기 시작했다.

 

틈만 나면 카메라를 둘러메고 전국의 산을 올랐고,

종심(從心)이 가까워지는 나이에 알바자리를 꿰찬 지 2년이 넘었고,

어설픈 글 솜씨로 졸필이나마 기록을 남기고 있는 중이다.

 

100살이 넘은 김형석 교수는 "성장하는 동안은 늙지 않는다."면서

"살아보니 제일 행복한 나이는 60세에서 75세였다."라고 하는데

나도 거기에 해당할까.

 

아픈 데가 한 곳도 없이 매우 좋은 컨디션을 항상 유지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내려진 진단은 마음을 위축시키고 몸을 움츠려 들게 한다.

이러다가 나도 우울증의 늪에 빠지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12;30

검단산(657m)에 올랐던 손주들이 땀으로 옷이 흠뻑 젖어서 집에

왔고, 약속대로 주문했던 스마트워치를 손주 두녀석에게 새학년

선물로 준다.

 

우연욕서(偶然欲書)란 우연히 쓰고 싶어 쓴 글씨를 말한다.

어눌한 팔이라 글씨를 쓸 수가 없어 글씨 대신 글을 쓰며 우연욕서

(偶然欲書)를 생각하는 휴일의 한낮,

 

신나서 활짝 웃는 손주들의 얼굴을 보며 오늘도 글 한편을 남기기

위해 컴퓨터 자판을 두드린다.

 

"세상일에 흥미를 잃지 않으면 나이가 들어 얼굴에 주름살이 생겨도

마음에는 주름살이 잡히지 않는 법"이라고 맥아더 장군이 말했던가.

 

챙겨놓은 옷을 '튀르키예'로 보내려 포장하다가 중고물품은 전염성과

위생문제로 사양한다는 기사를 보고 다시 옷장에 수납을 한다.

내일은 물품 대신 소액이라도 송금을 해야겠다.

 

                           2023.  2.  12.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