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느림의 미학 785 면돌아 안녕!

김흥만 2023. 12. 31. 16:59

2023.  12.  31.

입술과 턱 주변이 쓰리고 아파 전기면도기 작동을 멈추고

거울을 보니 피가 맺혔다.

 

뭔 일이지?

전기면도기 망이 다 닳은 걸 모르고 쓰다가 날카로운 철망이

얼굴을 긁으며 상처를 낸 거다.

 

나는 턱수염을 밀 때 전기면도기로 한번 밀고 칼면도로

마무리를 한다.

수염이 많기도 하지만 털이 억세어 바로 칼면도를 하면

살갗이 아프고, 칼면도기의 칼 수명이 짧아지기에 두 번

면도를 하는 습관이 수십 년째 이어진다.

 

면도기를 들고 몇 년째 사용한 건지 생각을 해보니 무려

25년이 넘었다.

아들에게 군 생활 때 쓰라고 사줬던 '브라운 전기면도기'를

들고 잠시 상념에 젖는다.

 

나는 사람과 사물에 대해 이름 붙이기를 좋아한다.

2011년 11월 17일 철원 복주산 산행 시 안내산행을 했던

암컷 진돗개에게 '진순'이라는 이름을 붙여줬고,

 

2009년 3월 4일 괴산 칠보산 정상에서 만나 하산을 동행한

검정개에게는 '뭉치'라는 이름을 붙였다.

 

면도기에는 면돌이,

항상 휴대하고 다니는 비상경보용 호루라기에게는 '비상'

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가까운 친구들의 애칭(愛稱)도 많이 지었다.

 

정종대왕 후손으로 종친회를 관장하는 친구에겐 왕손(汪巽),

술을 좋아하는 친구는 주봉(澍鳳),

당구 승률이 높은 친구에겐 개심(价深),

젊어서 사고를 많이 친 친구는 사고(士高),

호주가인 친구에겐 대주(大舟),

농사를 잘짓고 막걸리를 좋아하는 친구는 걸리(杰犁),

 

한때 수염을 길렀던 친구는 만화 주인공인 머털(도사),

당구를 칠 때 반성을 많이 하는 친구는 반생이(反省) 또는 불뚜기,

툭하면 깐족대는 친구는 깬주기,

머리가 큰 친구 마두(馬頭)는 그가 좋아하는 '헷세'로,

당구장에서 사부(師傅) 역할을 하는 친구는 구당(球撞),

 

당구실력이 일취월장하는 친구는 일취를 빼고 월장(月將),

걷는 모습이 말과 비슷한 말봉(靺峰),

일을 겁내지 않는 친구는 따거(大兄),

 

말을 별로 하지 않는 친구는 과묵(寡默) 선생,

바람끼 많은 친구는 담연(淡燕),

머릿털이 말총머리 친구는 만화주인공 설까치를 본 따 까치로,

 

당구모임 등 동창모임에서 묵묵히 봉사하는 친구는 종신(宗信),

낚시를 좋아하는 친구는 허공(虛空),

뒷모습이 청년 같은 친구는 후청(煦靑)으로 지었고,

나 스스로는 신동(神童)으로 애칭을 지었다.

 

이밖에도 많은 지인과 친구들에게 애칭을 지었으나 다 기억을

하지 못해 오늘은 생각나는 대로만 쓴다.

 

어제는 16년을 쓴 LED 스탠드 등이 수명이 다되어 분해를

해서 버렸는데, 때가 되었는지 '면돌'이라는 애칭을 지어준

전기면도기도 수명이 다되었다.

 

수십 년 우정을 나눈 친구를 함부로 버릴 수가 있겠는가,

비록 사물이지만 25년 넘게 사용한 면도기를 버리지 않으려

세면도구 수납장 안으로 밀어 넣는다.

 

종일 내리던 서설(瑞雪)이 그치고 햇볕이 들어온다.

몇 시간 후면 갑진년(甲辰年) 새해로 청룡의 해가 시작된다.

나도 같은 용띠이니 청천을 나를 수 있으려나.

 

                         2023.  12.  31.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