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 13.
해마다 12월이 되면 하릴없이 몸과 마음이 바쁘기에
사람들은 세월 참 빠르다는 표현을 잘 쓴다.
섣달 그믐밤 12시가 되면 어김없이 제야(除夜)의 종소리가
울린다.
또 한 해를 보내며 나에게 미흡한 점이 있었던가,
삶에서 소홀했던 것은 무엇일까,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을까,
버리고 또 버린다 했지만 마음속에 아직도 버리지 못해
앙금이 남아있는 건 무엇일까 종소리를 들으며 곰곰이
생각해 본다.
그렇게 또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1월 1일이 되자마자 마음의 여운은 슬그머니 사라졌고,
어느새 13일이나 흘러갔다.
알바생활 3년이 훌쩍 지나갔고,
다시 면접을 보고, 또다시 일 년짜리 근로계약서를 쓰고,
잠에서 깨 눈 뜨면 아침이고,
시간이 되면 터덜터덜 걸어서 사무실에 나간다.
당구장에 들려 게임하고, 점심 먹고, 돌아서면 저녁이고,
월요일인가 하면 어느새 토요일,
월초인가 하면 나도 모르는 새 월말이 되고,
월말이 쌓이고 그렇게 쌓이다가 일 년이 후딱 지나가는
거다.
내가 급한 건지 아님 세월이 빠른 건지,
세월엔 가속도가 붙어 정신없이 흘러가고, 모임에 나가려
거울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칼면도를 시작한다.
마음속의 나는 아직도 어린이처럼 장난기가 심한데,
거울 속의 내 얼굴엔 저승반점도 생기고, 미세한 주름이
점점 늘어난다.
사는 동안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살고자 죽을힘을 다해
산에도 오르고, 좋은 친구들을 만나 수다를 떨었건만,
예전만 못해진 체력을 실감할 때마다 가슴이 저며오고,
늘어나는 약병을 볼 때마다 남은 삶이 점점 짧아짐을
느낀다.
13;10
시간이 되자 학연(學緣)과 지연(地緣)이라는 좋은
인연을 이어가는 고향친구들을 오이도에서 만난다.
비록 머리털은 백발인 초로지만 허리 굽은 친구 하나
보이지 않고, 다들 당당하고 씩씩한 걸음걸이로 나타난다.
한 친구의 이 나이 되도록 "강해서 살아있는 건가"라는
질문에 "살아있다는 그 자체가 강한 게 아닌가"라는 선문답
(禪問答)을 주고 받는다.
모인 친구 23명의 얼굴을 한 명씩 바라보며 참 오래도 우정이
유지되다니 이게 바로 허여(許與)의 우정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허여(許與)란 아무 하구나 쉽게 맺는 관계가 아니다.
긴 세월 서로 상대방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가 깔린 깊은
사귐을 말하는 거다.
수십 년간 관찰과 검증을 거쳐 이루어진 허여(許與)의
우정을 음미하며 생수를 담은 소주잔을 입에 댄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점점 시간에 가속도가 붙는다.
속도가 시속 60km에서 70km로 더 빨라지는 만큼 과거는
길어지고 미래는 짧아진다.
속도를 늦출 수는 없다.
그렇다면 역발상으로 시간을 길게 만들고 느리게 쓰면 되지
않을까.
습관이라는 익숙한 길에서 벗어난다면,
낯선 길을 걷다 새로운 풍경, 뜻밖의 풍경을 만날 때는
발걸음을 멈추기도 하고,
멀리 떠나는 여행이 힘들다면 가까운 곳에라도 자주 가고,
평소 가지 않던 길도 가보고,
AI, Chat Bot, ChatGPT, MZ 등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늘 먹던 음식에서 벗어나 낯선 음식도 먹어보고,
새로운 사람과 대화를 해보면 빠르게 사라지는 시간을
붙잡으며 느림의 미학을 만끽할 수 있지 않을까.
2024. 1. 13. 오이도에서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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