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느림의 미학 874 인향만리(人香萬里)

김흥만 2025. 3. 1. 11:01

2025.  2.  28.  08;20

믹스커피를 담은 머그컵에다 뜨거운 물을

붓는다.

 

컵에서 아지랑이 피어오르며 커피 향이

콧구멍으로 스멀스멀 들어오고 숭늉같이

구수한 향은 텅 빈 사무실 여기저기로

퍼져 나간다.

 

나는 이 믹스커피 향이 좋다.

사무실 한쪽에서 겨우내 피고 지던 하얀

동백꽃 향도 이 커피 향에 비하면 어림도

없다. 

 

창가에 자리 잡은 동양란이 은은한 암향

(暗香)을 자랑한다면 믹스커피 향은 

적극적으로 자기를 과시하는 향이다.

 

자주 나가는 강동역 부근엔 추운 겨울에도

장갑을 끼지 않은 손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 커피를 들고 다니는 얼죽아

들이 많다.

 

나는 스타벅스에서 시간을 죽이며 노닥

거리는 커피 마니아가 아니다.

또한 '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얼죽아'도 아니다.

 

그냥 커피 향과 달달한 맛을 좋아하기에

봉지에 담긴 믹스커피를 즐겨 마시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

 

어쩌다 스타벅스에 들리면 '카페 라테'를

백다방에 들리면 '원조커피'를 즐겨 마신다.

 

꽤 오래되었지만 주택은행 인사부에 근무

할 때 직속 상사이자 고교 3년 선배에게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렸었다.

 

불면증이 커피에 포함된 카페인 성분의

영향일 수도 있어 한참 동안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다시 영업점으로 배치를 받고 고객과 대화를

할 때가 많아 다시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고,

 

지점장실로 들어오는 고객에 대한 커피는

직원에게 부탁하지 않고 내가 직접 타서

접대를 했는데 고객들의 반응이 의외로

좋았다.

                       <    미선나무   >

11;30 강동역

새벽 기온이 영하 4도였는데 어느새 영상

8도로 올랐다.

 

지나는 여인들의 복장도 조금 가벼워졌다.

겨울의 차디찬 바람이 싫어질 때가 되자

계절의 순환이 반가운 듯 봄은 어느새 살포시

곁에 와 있다.

 

시간이 되자 한 명 두 명~당구장안으로

친구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오늘은 몇 명이 올 건가,

아무리 적어도 10명은 넘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엊저녁 친구들과의 통화를 떠올린다.

 

수억만 리 떨어진 외국에 사는 친구,

수백리 외진 곳에서 몸을 추스르는 친구랑

이야기를 나누며 커피 향 같은 풋풋한 정을

나눴다.

 

그래서 친구와의 우정은 꽃보다도 멀리서

찾아오는 인향만리(人香萬里)라고 했던가.

 

누구나 나이가 들면서 점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진다.

 

암(癌) 투병생활이라든지, 몸이 아프면

점점 외로워지고 고독을 느끼는 빈도가

많이 늘어난다.

 

다수의 군중 속에서도 외롭다는 생각이

들고 비참하다는 생각이 든다면 우울증

이나 조울증의 시작일 수도 있기에 친구를

많이 만나고 대화를 하는 게 좋다.

 

아주 예전에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의

<존재론. 인식론>을 읽은 기억이 난다.

 

그는 관념적 형이상학에 생생한 삶을 불어

넣으며 <존재와 시간 sein und zeit>에서

인간을 '세계 내 존재'라고 규정을 하고,

 

"인간은 구체적 시간과 공간의 생활세계

속에서 온갖 염려(sorge)를 안고 살아가는

역사적 존재"라고 했다.

 

늙어가며 염려를 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산다면 겉모습은 점점 낡아가도 속마음은 

새로워진다.

 

정명(正名)으로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새로움을 발견하고, 온고지신(溫故知新)

으로 새로운 것을 깨닫는다면 비록 육신은

늙어가도 정신만은 아름다운 젊은이가

되는 길이 아니겠는가.

 

13;30

단골식당에 내려가 주전자에 막걸리

두 통을 쏟아붓는다.

 

좁은 식당 안에 막걸리 향이 금세 퍼지고

나는 소주잔에 따라진 막걸리로 입술을

축이며 술향을 음미한다.

 

주향(酒香)은 천리(千里)라 했다.

술향이 이렇게도 좋았던가.

60년 화류계 생활에서 결코 맛보지 못했던

주향을 마음껏 맡는다.

 

금주령이 내려 좋아하는 막걸리를 마음껏

마시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막걸리 향을 마시는 게 너무 좋다.

 

좋은 게 많을수록, 

곁에 좋은 사람이 많을수록 세월의 흐름

속에 삶은 발효와 숙성이 이뤄진다.

 

인격과 품성,

늙음과 낡음이 다르다는 것,

고3 때 국어 담당 은사였던 '덜미 선생님'

께선 '젊다'는 형용사요, '늙다'는 동사라고

했다.

 

또 어느 여가수는 '늙음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라고 노래를 불렀다.

 

사람들은 화양백리(花香百里)요, 주향천리

(酒香千里)요, 인향만리(人香萬里)라는 말을

잘쓴다.

 

1973년 11월 동중부 전선 양구 최전방을

경계하는 제21사단 66연대에 배속이

되었다.

 

연대 교육장교가 담배연기는 4km 정도의

거리에서도 느낄 수 있고, 담뱃불은 8km

밖에서도 관측이 되니 병사들은 DMZ

근처에서는 절대로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했다.

 

담배냄새도 4km 즉 십리를 간다고 했던

말을 떠올리며 나는 커피 향에 다향십리

(茶香十里)라는 별칭을 붙인다.

 

               2025.  2.  28.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