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느림의 미학 132 장흥 천관산(723m)에서 시간을 거꾸로 돌리다.

김흥만 2017. 3. 25. 08:32


2010. 11.18

인생은 다 바람 같은 거라는데, 오늘은 안개 속이다.

지독한 안개가 서울에서 천리 길인 전라도 장흥까지 이어질까.

오늘도 지난주의 '예봉산'같이 안개와 구름을 타고 '천관산'에 올라야 할 모양이다.



이름만 들었던 천관산!!

높아진 하늘 아래 설렘이 가득한 산이다.

 

매일 매일 반복되는 바보 같은 일상에서 탈출을 하자.

산다는 것은 비슷한 일이 되풀이 되는 것이라,

또 다시 속세를 떠나 남으로 내려간다.

 

09;40

영암으로 들어서며 산안개에 살짝 가려진 '월출산'의 실루엣이 연출된다. 

하늘엔 엷은 구름이 흐르고 내 마음속엔 목가적인 음악이 흐른다.

제비 물러가고 군무를 추며 스쳐 지나가는 기러기 울음소리 들린다.



여행은 떠남이다.

시계를 거꾸로 돌려 옛이야기들이 숨어 있는 곳으로 시간여행을 한다.

천관녀는 기생이었을까, 무녀였을까.

기생이든 무녀이든 중요하지 않다.

 

'김유신 장군'이 잠시 사랑했던 '천관녀'의 전설이 깃 들인 이곳.

역사와 전설은 항상 승자의 편이다.

우리나라 곳곳이 태조, 세조와 궁예, 마의태자, 원효대사의 전설이 지배하는데,

이렇게 아녀자의 전설이 서린 곳은 무척 드물어, 난 '김유신장군'으로 환생하여

시간여행을 한다.

 

10;30

천관산 휴양림 입구에 도착하지만,

목적지는 여기에서 5km 이상 더 들어가야 한다.

 

산안개는 쉽게 걷히질 않는다.


뿌연 안개 속에 천관산의 신비스런 위용이 드러나며 몽환의 눈으로 쳐다본다.

이 시간이면 구름에 실려 사라졌을 텐데, 또 다시 바람에 실려 태어났나보다.

 

천관산이 자랑하는 동백나무숲 15만 평이 광활하게 펼쳐지며 처음보는 나에게 생소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잘 만들어진 정자에서 요기를 하는 중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난다.

먹이를 주려 하니 어느새 사라졌다.

야생에 길들여져 사람을 극도로 경계한다.

 

지난겨울 가끔 먹이를 주던 검단산 고양이가 사라진 후 매우 궁금하던 차에

10월초 한강에서 새벽 운동을 하던 중 검은 물체가 내 정강이를 툭툭 치며 건드린다.

어둠 속에 깜짝 놀라 자세히 보니 검은 길고양이다.

 

얼마 전에 주인을 잃고 집을 떠난 모양이다.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보니 상당히 깨끗하다.

꼬리로 툭툭 치며 먹이를 달라고 조르면서 무려 1km를 따라온다.

 

새벽 운동시간이라 주머니에 먹이는 없고 난감하다.

배가 불룩한 것으로 보아 임신하였는데, 먹이가 없다고 다른 사람 따라 가라고 하니

때마침 지나치던 사람을 따라가며 또 먹이를 달라고 조른다.

 

요즘에는 새벽에도 애견용 닭고기 말린 것을 주머니에 담아 한강에 나가지만 그 이후엔

보지 못하니 내내 서운하고 미안함을 감출 수가 없다.

 

사람들은 야생동물에 먹이를 주지 말라고 한다.

스스로 자생력을 길러야 한다며 먹이를 주면 번식력이 강한 놈들이라 생태계가

파괴된다나?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끼 먹이를 해결해주면 야생의 꿩이나 새들이 그만큼 보호 받을 수 있다.

 

11;45

천관산 오르는 호젓한 길의 우거진 삼나무 숲은 시심(詩心)을 끌어낸다.



고즈넉한 숲길로 빠져들며 대나무들의 열병식을 받는다.


산의 기운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오는데,

아직도 초록이 남아 있으니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겨울이 싫은가 보다.



예로 부터 지제산(支堤山), 천풍산(天風山), 풍천산(楓天山), 신산(神山)으로 불리었던

천관산(天冠山)은 지리산, 내장산, 월출산, 능가산과 더불어 호남의 5대 명산의 반열에

들었다.


단풍사이로 정상의 모습이 살짝 보인다.

 


시간은 잠시도 쉬지 않는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가을이건만 벌써 겨울 맛이 난다.

빨갛게 물들었던 산이 어느새 낙엽이 떨어지며 스산하다.

 

쏟아지는 아침 햇살을 받아 단풍잎에 서렸던 이슬이 영롱하고 곱게 반짝인다.

곱디 고왔던 단풍도 낙엽으로 떨어지며 조용히 내 곁을 떠날 채비를 하니,

왠지 쓸쓸해지며 외로움을 더한다.

 

남자는 마음으로 늙어가고,

여자는 얼굴로 늙어간다고 얘기들 하지만,  

굳이 흘러간 긴 세월은 잃어버린 시간이 아니다.

사랑하는 친구들과 삶의 방향은 다를지라도 천관산의 깊은 가을 숲에서 오늘의 삶을 같이 한다.



나무들이 이어지는 산길 속에 또 하나의 즐거움을 찾는다.

 

급경사를 깎아 만든 나무계단을 오르며 숨이 금방 차오른다.

헉헉대며 오르면 어떤 풍광이 날 기다릴까?

 

중부지방에서는 보기 힘든 '노각나무'가 눈에 띈다.

노각나무는 우리나라 고유의 식물로 주로 남부지방에서 자라는 낙엽교목이다.

높이는 10~15m 정도 자란다.


피의 얼룩무늬가  비단같이 아름다워 비단나무 또는 금수목(錦繡木) 이라고도 하며,

나무가 단단해 관상용, 장식재, 고급가구재로 많이 쓰인다.

 

깊은 가을은 겨울과 같이 왔다.

자연이 주는 놀라운 광경을 잠시 바라본다.

 

참나무, 서어나무, 조릿대가 적당히 어우러진 길은 뚜렷하고 잘 정비되었지만 예상대로

가파른 길도 많다. 

 

대개 암산은 악산이다.

흙 대신 돌 위를 걸어야 하는 길이 험하고 가파른데 천관산은 예외로 겉과 속이 다른 산이다.


천관산의 품은 넉넉하여 봉우리와 봉우리의 사이가 넓어 시야가 막히지 않으며

계곡 길은 완만한 경사이다.

 

세월의 흔적 속에 역사의 흔적도 남았다.

역사는 늘 승자의 몫이라지만 패자인 '천관녀'가 더 주목을 받는 주인공이 된 천관산 

산속의 이 바위는 '김유신 장군'의 투구 쓴 모습일까?

 

화랑이 되고 나서 젊은 혈기가 왕성한 김유신은 '천관녀'라는 여인과 사랑을 한다.

학문을 게을리 한다 하여 어머니로 부터 꾸중을 들은 유신은 그녀를 찾지 않기로 맹세하지만,

어느 날 사냥에서 지친 몸으로 자신의 애마(愛馬) 위에서 조는데 애마는 평소의 습관대로

천관녀의 집으로 찾아간다.

 

잠에서 깬 유신은 애마의 목을 단칼에 베어 버리고, 마음이 떠난 유신을 그리던 '천관녀'는

그 후 이곳 천관산에 숨어서 살았다는데 흔적이 없다.

 

저 아래 계곡에 통일신라 때 통영화상이 창건하였다는 천관사도 보인다.

험한 산세는 아닌데 기암괴석과 해무가 절경이다. 

 

13;20

당간지주같이 생긴 당번(幢幡) 천주봉 (天柱峯)에서 잠시 풍광을 즐긴다.

 

가운데 기둥은 '천주'를 구름 속으로 꽂아 세운 것 같아,

불가에서는 깃발을 달아 놓은 보찰(寶刹)이라고 안내도에서 설명하며,

'산동(山東)지방'에서는 금관봉(金冠峯)이라고도 불린다는데 여기서 산동지방이라 함은

어디를 지칭하는지 모르겠다.


막판의 된비알을 치고 오르니 시야가 트이며 천관산 정상인 '연대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광활한 억새밭이 펼쳐지는데 처음 오른 이방인은 넉넉한 품을 가진 천관녀의 부드러운

젓가슴 모습으로 보인다.


암봉 아홉 개가 하나의 암봉군을 이루고 있는 구정봉(九頂峰)의 모습이 기묘하다.

구정봉은 대장봉, 천주봉, 문수보현봉, 대세봉, 선재봉, 관음봉, 신상봉, 홀봉, 삼신봉 등

각기 기묘한 모습으로 솟구친 9개 암봉을 말한다.

 

이 기암들이 천자의 면류관 같다 해서 천관산(天冠山)이라는데 오를수록 조망의 즐거움은

더한다.



바위가 많으면서도 산세가 부드럽고 편안한 낙엽 쌓인 길이다.

이리저리 바위를 끼고 돌면서도 마음껏 산을 탐승할 수 있고 곳곳의 조망이 뛰어나다.

 

13;30

'환희대'에 도착한다.

책 바위가 깎아져 서로 겹쳐 만권이 책이 쌓아진 것 같다는 대장봉(大藏峯) 정상에 있는

석대이다.

 

'이산에 오르는 자는 누구나 이곳에서 성취감과 큰 기쁨을 맞보게 된다.'는 환희대(歡喜臺)에서

호연지기를 기른다.

 

애써 기다리지 않는 가을이 숨가쁘게 다가왔고,

혹독한 겨울을 기다리며 산은 붉게 물든 단풍을 떨군다.

 

가을바람에 몸을 맡기며 흔들거리는 은빛 억새의 향연을 본다.



기암이 많으면서도 산세가 부드러워 위험한 구간이 없다.

며칠만 일찍 왔더라면 억새의 부드러운 능선이 꿈결 같았을 텐데,

그래도 미끈하게 뻗은 억새 능선은 은빛물결이 일렁인다.

 

             <           억새의 울음


                억새는 가을 바람에

                사각거리며 마구 울어댄다.


                억새의 울음은 슬픔의 울음인가.

                늦가을을 보내며 

                이별의 울음소리인줄 알았는데,


               천관녀의 그리움에 지친

               울음소리가 바람에 실려 오고 

               나그네는 무거운 발걸음이 되어 떠난다.                        석천  >

 

13;50

천관산의 정상인 연대봉(723m)에 오른다.


옛날 이름은 옥정봉(玉井峯)이며, 천관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인 연대봉(烟臺峯)은 고려

의종왕(서기 1160년대) 때 봉화대를 설치, 통신수단으로 이용하여 봉수봉(烽燧峯)으로도

불리었다.

 

3면이 다도해로 동쪽은 고흥의 팔영산, 남쪽으론 완도, 신지도, 고금도등이 보이고,

맑은 날엔 제주의 한라산, 해남의 대둔산, 영암의 월출산, 담양의 추월산등이 보인다는데,

완전히 걷히지 않은 산안개와 해무 속에 숨어 어딘지 분간할 수가 없다.

 

억새 평원으로 이어지는 능선 끝자락에 아홉마리 용의 발자국이 전해지는 웅덩이가 있다는

'구룡봉'이 아스라이 보인다.

 

천관산은 이 지역 주민들이 신령스럽게 받들어 온 산이라 망종(芒種)날이면 4개의 읍주민들이

산에 오르는 풍습이 있고, 가뭄이 들면 능선의 억새밭에 불을 지른 후 '구룡봉'에서 개(犬)를

제물로 바쳤다고 전해온다.

 

억새풍광에 취한 몸으로 '연대봉' 정상에 오르니 '땅끝 조망대'가 보인다.

수많은 섬들이 돛단배들처럼 바다에 떠다니는 다도해 풍광이 내륙지방에서 살아온 나의 눈에 

들어와 즐거움이 더한다.

 

휴~! 

올라온 반대쪽 능선에도 금빛물결, 은빛물결이 출렁인다.



'땅끝 조망대'앞

시원한 바람 속에 남해바다가 펼쳐진다.

엷은 해무 속에 소록도와 거금도가 보이고  완도, 청산도, 보길도가 커다랗게 유영을 한다. 

 

기묘한 암봉들의 실루엣이 예사롭지 않게 감동적인 풍광을 보여주며 가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이 산의 인문지리서인 지제지(支堤誌)에서는

"우리나라에 산이 많으나 이 산은 예로부터 영묘하고 기이한 것으로서 이름이 높아

지리산이나 무등산같이 높고 큰 산으로도 당할 수 없다."라고 했다.

 

높히 올라오니 밑에서는 상상도 못하는 풍광이 나를 기다렸구나.

섬세하게 움직이는 구름바다는 자연이 나한테 주는 선물이다.


자연이 그려 낸 한 폭의 산수화 속에,

기러기 울음소리는 세월의 흐름에 무심함을 탓하는가.

 

막걸리 한잔으로 갈증을 달랜다.

바람에 흔들리며 하얗게 물결치는 억새가 능선마루에 솟은 암봉과 절묘한 조화를 빚어낸다.

 

정원암 '할미바위'인데 내눈엔 부처님이 인간세상을 그윽한 눈으로 내려다 보는 모습으로

보이는 까닭은 비슬산 부처바위를 본 영향인지도 모르겠다.  

 

15;15

지나온 갈 뒤돌아보니 푸른 하늘아래 '지장봉'이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어느새 엷은 산안개는 걷혔다.

 

하산길은 점차 급경사를 이루며 숲을 파고 든다.

장흥의 가을 벌판이 펼쳐지며 조화롭고 평화로운 풍경이 계속된다.

 

17;10

유난히 짧은 가을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며 '마량'의 저녁 하늘을 물들인다.

 

2010. 11. 19 새벽 

해가 뜨며 하늘은 붉은 색을 얻고 출렁이는 천관산의 흐름은 여전히 검다.

 

옛사람들은 저 거대한 기암괴석군을 황제의 면류관으로 보고 천관산(天冠山)으로

지었던지, 천관보살이 머물러서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애써 멀리서 찾아온 시간이

아깝지 않다.

 

                                     2010.  11.  18.  천관산에서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