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느림의 미학 188 동네 뒷산 인능산<326m>

김흥만 2017. 3. 25. 20:18


2012.  6.  2.  05;00

뻐꾸기는 잠도 없나 보다.  

새벽부터 집 앞에서 노래를 하길래 창문을 여니 가로등 전선에 '제비' 두 마리도

같이 앉아 있다.

농약 덕분에 참새도 보기 힘든데, 참 오랜만에 보는 제비이다.

 

봄 꽃의 여왕은 벚꽃일까, 진달래일까, 철쭉일까?

여름꽃의 여왕인 장미의 사열을 받으며 집을 나선다.

 

어제 하루는 5만 원 덕분에 참 행복했지.

초, 중, 고교생 경제교육강사 양성과정에 하루 참석했더니 통장에 오만 원이나 입금이

되었네.


은퇴 후 이런저런 사유로 배당금, 주식, 원고료, 강사료 등의 작은 수입은 있었지만,

통장에 돈이 직접 들어 오기는 참 오랫만이다.

 

새삼 이 나이에 망설여지지만,

뒷짐만 지고 있을 수도 없고, 혹시 스트레스나 받지 않을까,

지금까지 즐기고 있는 내 산행스케줄에 방해나 되지 않을까?

 

좋은 일 보다는 나쁜 일이 더 많이 생기는 상실의 나이지만,

보다 단순하게 아이들 같이 아이들과 함께 웃고 살아 볼까?

나머지 인생의 내 삶과 능력을 즐길 수 있을지.


암튼 혼란스럽다.

교재는 용돈, 구매, 무역, 게임, 모의투자 등이라 차라리 시니어를 상대로 하는

전문강의는 자신있는데, 학생들 상대로는 처음이라 당황스럽다.

 

知之者不如好之者 지지자불여호지자~아는 자는 좋아 하는 자만 못하고,

好之者不如樂之者 호지자불여낙지자~좋아 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

라는 공자의 말을 새겨들어야 할 모양이다.


09;00

시끄럽고 혼탁한 만남의 장소.

담배연기, 여인들의 깔깔대는 소리, 코끼리마스크를 쓴 여인, 등산복이 몸에 달라붙어

삼겹살의 주름이 그대로 보이고, 사타구니에 도끼자국이 선명한 여인의 짙은 선 그라스는

또 하나의 풍경이다. 

 

버스 종점인 '옛골 만남의 장소'에서 잠시나마 담배연기와 소음에 시달린다.


시끄러운 무리들에서 불과 30여m를 벗어나니 홀가분한 세상이 나타난다.

청계산은 사람들로 북적이는데 길 건너 '인능산'은 우리뿐이다.


사람과 소음에서 벗어난 고요의 공간으로 들어선다.

 

숲은 도시보다 산소량이 2% 가량 많아 숲에서 공기를 들이마시면 온몸이 쾌적해진다.

산소가 신체 구석구석의 세포에 충분히 공급되며 신진대사가 활발해지는 덕분일까?

 

산림욕을 하면서 걸을 때 몸에 쌓이는 젖산도 풍부한 산소량 때문에 빠르게 분해돼

배출된다고 한다.

 

땅채송화도 만나고 여름 숲의 요정인 꽃마리를 만난다.

꽃따지라고도 하며 옛사람들은 대장염, 이질, 종기 등에 썼다고 한다.

 

양귀비과의 여러해살이풀로 며느리주머니꽃, 며느리눈물꽃으로도 불리는 금낭화가

해맑게 웃으며 나의 마음을 유혹한다.

독성이 있다고 알려졌으나 우리 선조들은 어린잎과 새순을 나물로 먹었다고 한다.

 

09;30

임도를 걷다가 곧장 숲으로 스며든다.

 

숲 속 나무와 식물이 발산하는 피톤치드가 점점 증가하는가 보다.

피톤치드는 혈압과 스트레스 호르몬 지수를 낮춰주며, 몸의 긴장을 이완시켜 준다.

숲에는 음이온도 풍부하다.

숲 속 공기 중 음이온은 1000~2200개/㎤로 도시의 30~150개 보다 10배 이상 많다.

 

소음을 벗어나 숲의 공간으로 들어서며, 시간과 공간이 공존하는 숲의 풍광에 갇힌다.


고요하고 평화스런 숲 속에 딱따구리가 정적을 깨며 숲의 소리를 전하니,

잠시나마 외로움을 내면 깊숙이 잠들게 한다.

 

아! 숲의 냄새여~

봄은 저만치 물러나고 여름 산이다.


매력이 없는 것이 매력인 인능산의 한적한 숲은 아까시나무, 현사시나무, 상수리나무가

지천이고 물박달나무도 보이는 건강한 숲이다.

 

나무껍질을 한약재로 쓰는 '일본목련나무'를 돌아 오르니 숲은 점점 깊어진다.

 

자유롭다.

화려하지도 않고 소박한 풍경 속에 나는 녹아내린다.

부드러운 흙, 작년에 떨어져 아직도 부셔지지 않은 낙엽, 생을 다하고 쓰러진 나무들이

앞을 가린다.

 

숲의 무게가 비탈을 오르는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초록의 아름다움 속에 모기, 송충이 등이 떨어지니 살아있는 생명의 숲이다.

 

아무리 낮은 산이라도 제몫의 험한 길과 힘든 고개는 있는 법.

제법 가파르다.

 

세상에는 몸이 가는 길이 있고, 마음이 가는 길이 있다.

여기는 몸보다 마음이 먼저 나가는 숲길이다.

 

숲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침묵이 쉬워진다.

굳이 '묵언(默言')이라 쓴 글이 붙어있지 않아도 말이 필요없을 정도로 점점 깊은 숲으로

빠져든다.

그래 숲에서 받는 선물은 값진 시간을 얻는 것이지.

 

일상에서 벗어나 낙엽이 쌓인 길.

탄생하고 소멸하고 존재하고, 숲의 존재는 이렇게 이어진다.


수많은 생명을 품은 숲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풍경을 더 아름답게 한다.

'땅비싸리꽃'이 아름답다.

 

오를수록 몸이 개운해지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식욕을 느끼니, 어느새 내 몸안엔 음이온이 듬뿍 들어왔나 보다.

 

정상가는 길이 철조망으로 막혀 고도를 125m까지 낮췄다가 다시 오른다.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된비알이다.

바람은 나뭇잎 위에서 고이 잠들었는지 나뭇잎들이 미동도 하지 않는다.

땀은 순식간에 온몸을 적신다.

숨소리도 거칠어지고 그냥 아무 생각없이 발걸음을 옮긴다.

 

가던 길 잠시 멈추고 숨을 고르니 가쁜 숨결은 차츰 진정이 되고, 이런저런 생각도

땀방울에 녹아내린다.

 

11;30

한참이나 낑낑거리며 비탈길을 오르니 하늘이 열리며 인능산 정상(326m)이 나온다.

정상은 햇빛이 질펀하다.

시야를 가리는 나무들 사이로 비행장이 겨우 보이고 잠시 숨을 고른다.

 

정상을 밟으며 묘한 생각이 든다.


언젠가는 바람과 함께 가야 하는 인생인데,

무엇을 향해 가던지 꼭 정해진 삶을 가야 하는가?

 

변수가 없는 산행은 재미가 없지.

힘은 들더라도 비가 쏟아지길 바라며 하늘을 본다.

북한산엔 지금 소나기가 온다는데, 여기 하늘은 오락가락하는 구름이 침묵을 지킨다.


비가 올 때를 알아 때맞춰 바람을 따라 밤중에 살금살금 대지를 적시는 윤물(潤物)도 좋고,

비가 하도 가늘어 소리조차 없는 무성(無聲)이라도 좋은데,

너무 가물다.

모를 심을 때가 다 지나가는데도 비가 오질 않아 논과 밭이 갈라지고 타들어간다.

 

오늘 소나기 소식도 별 볼일 없이 지나가는가 보다.

차라리 뇌성을 동반한 폭우도 좋으련만, 애타는 농심을 하늘이 알아주질 않는다.



             [   친구들의 풍경

 

                 가슴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시간을 같이 하는 친구.

 

                 산처럼 변함없이 편안한 친구.

                 땅처럼 생명의 끈을 이어주는 친구.

                 혼자만이 아닌

                 서로가 행복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친구.


                 세월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네.

                 세월은 영원할 수 없기에

                 서로에게 최선을 다함이

                 우리들의 풍경이라네.                                                석천]


사실 내가 그대들과 만나 이 산에 있다는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이 세상 수많은 사람들 중에 어떻게 만난 인연인가?

 

숱하게 지나가고 지나가는 세월 속에 만나 산행을 같이 하는 인연은 대단한 인연이다.

그냥 아무 소리 없이 내 옆자리에 있어주는 그대들이 있어 행복하다.

           

                

구룡산과 대모산자락에 음지에서 일한다는 국정원이 자리하고,

조선 3대 왕인 태종과 태종의 비인 원경왕후를 모신 헌릉과, 순조와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를 모신 인릉, 즉 '헌인능'이 아스라이 보인다.

아래의 내곡동 예비군훈련장은 훈련이 없는지 정적을 지킨다.

 

내 젊음의 '에피소드'가 있는 곳.

1984년이던가?

성내, 풍납동지역이 물난리가 나던 해였지.

 

내 나이 33세~동원예비군으로 내곡동 예비군훈련장에 입소한다.

당시 기본교육이 3일인데 '정관수술'을 하면 교육을 면제헤준다고 병원에서 온 관계자가

교관과 함께 유혹을 한다.

 

당시는 나라의 경제형편이 안 좋은데도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나니 '산아제한'으로

인구의 증가를 억제할 때였다.

 

구호도 '아들 딸 구별 말고 하나 만 낳아 잘 기르자!'였지.

의료비나 학자금은 두 명 이내로 제한이 되고, 셋째부터는 소득공제도 되지 않았으니

인구를 늘리려고 보조금까지 주는 요즘과는 격세지감이 있다.

 

주춤거리다 병원으로 따라가 정관수술을 한다.

아내는 서운해 하고, 장모는 '남의 딸 데려다 말년에 외롭게 만들려고 한다'라며

심하게 질책을 한다.

어차피 엎질러진 물 주워 담을 수 없으니 꾹 참고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릴 수밖에 없다.

 

3일을 휴가 아닌 휴가를 보내고 근무지인 성내동지점에 출근하니,

내가 예비군훈련 중 정관수술을 하고 3일 농땡이 친 것을 이미 지점장과 전직원은

알고 있는 게 아닌가?

 

등에서 식은땀이 난다.

같이 훈련을 받고 농땡이를 친 강동구청 직원이 내 사무실에서 전부 까발렸으니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하나?

 

28년 전 추억의 한 자락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길은 지나치게 단조롭지만 떨어져 누렇게 변한 '아까시꽃잎'을 밟으며 걷는다.

우리나라 1,000산에서 명단을 찾아도 '인능산'은 없다.

국립지리원의 4,440개 산명단에는 있는지 모르겠다.

 

이 시간에 청계산엔 수만 명이 시장통을 만들었을 텐데

그냥 청계산의 뒷쪽에 그저그러한 산으로만 아는지,

아님 청계산의 뒷산 정도로만 아는지 '인능산' 산 속엔 우리 밖에 없다.

 

청계산의 뒷산이고 대모-구룡산의 앞산으로 오래전부터 이곳에 있었는데,

보통 뒷산은 이름이 있어도 잘 불러주지 않지.

그저 그러한 산이라서?

사람들은 모르고 산다.

동네의 뒷산 같은 '인능산'이야말로 사람을 품어주는 산이라는 거를~

 

오늘 인능산에 오르며 비록 1000산의 명단에도 없는 산이지만,

이 산은 선뜻 내게 다가와 내 마음의 영원한 산이 될 거라는 신선한 충격을 준다.


13;00

오직 자연만이 주인인 땅.

숲의 고요에 갇힌 지 네 시간 여 만에 탈출을 한다.

산행거리 약 6km 정도를 걸었지?

 

 

나는 작은 소망이 있다.

지금보다 나이가 더 든 황혼이 되어도 일시적이 아니라 오래도록 서로의 마음을

나누고 싶다.

바람 불고 비오는 날이라도 함께 비를 맞고 껄껄대며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어제 넘기지 못한 5월의 달력을 넘긴다.

                                   

                                 2012.  6,  2.  인능산을 종주하고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