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7. 2.
내가 지금 이런 놈의 세상에 산다.
황반변성으로 시력이 많이 떨어지는 눈 치료를 위해 강동성심병원엘 간다.
일주일 전부터 자기네 병원은 국민안심병원이니 겁먹지 말고 오라고 두 번씩이나
문자 메시지를 보냈기에 조금은 황당했지만 그런 병이 무섭지도 않아 예정대로 진료를
받는다.
6.18일 진료를 받은 지 5일 후가 되는 날인 6월 23일 메르스 대책본부에서 느닷없이 보낸
한통의 문자메시지를 읽으며 당황(唐慌)을 한다.
6.17~19일까지 강동 성심병원을 이용한 사람들은 6.22~23일 관리대상자로 분류되었다는
통지가 온 후,
다시 역학조사 결과 일상접촉자(능동감시자)로 분류되어 외출, 출근 등 일상생활이
가능하다며 발열, 기침, 호흡기에 이상이 있으면 보건소로 연락을 줄 것과 수시로 모니터링을
하겠다는 통지가 재차 날아온다.
한 해의 절반이 후딱 날아갔다.
세월호 사건으로 일 년 넘게 세상이 시끄럽더니, 메르스라는 병의 어이없는 초기 방역의
실책으로 멍하게 상반기를 지냈으니 이젠 희망의 후반기인가?
대한민국은 몸이 아파도 편히 병원을 갈 수 없는 나라로 변하고 있어 이 나라의 미래가
걱정이 된다.
메르스는 언제 끝날지 오리무중이고, 메르스를 스포츠게임같이 생중계하던 매스컴들은
끝없이 추락하는수출과 경제를 걱정하며 국민들을 깊은 나락으로 빠지게 하는데,
정치권은 여전히 싸움질이고, 노령화, 빈부격차 어느 하나 만만한 게 없다.
대법원에서는 황우석 교수의 1번 줄기세포주 등록을 하라고 확정판결을 내렸다.
우리의 미래를 먹여 살릴 황우석 교수에게 전국민이 얼마나 열광을 했던가.
대통령보다 인기가 좋았던 그가 어느 날 나락으로 떨어져 국민들이 많은 실망을 했지만,
외환위기의 암담한 현실에서 골프의 박세리 선수가 전국민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었고,
축구에서는 박지성, 박주영 선수가, 수영에선 박태환 선수가, 야구에서는 박찬호 선수가
전국민을 행복하게 해주었지.
우리는 살기 위해 각자도생(各自圖生)을 하여야 하나?
스스로 선택하여야 할 미래가 보이질 않는다.
치료를 받으러 갔다가 엉뚱하게 주변의 시선을 받아야 하는 암담한 현실의 세계에서
도피를 하고 싶다.
10;00
강물이 흐른다.
계곡물이 내려와 내(川)를 이루더니 강을 이뤘다.
땅위에 물길이 생기고 긴 세월을 묵묵히 강을 지키는 다리를 건넌다.
구절리엔 레일바이크 영업을 하는 가게들이 성시를 이루고, 구석에는 키 낮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인기척이 없는 집 뜰에 금계국이 노랗게 피었고, 시내를 벗어나자 건물은 푹 주저앉고
돌담만 덩그러니 남은 집이 석탄의 영욕(榮辱)을 침묵으로 말한다.
광부들이 깃들어 아이를 낳고 꿈을 이루며 살았을 집에 세월의 더께만 쌓이고, 특별할 것도
없는 풍경은 삶이 고단했던 사람들의 아픔을 말한다.
지금 맨 뒷자리에 앉아 카메라로 찍을 수는 없지만,
침목과 침목 사이에 잡초가 무성한 단선(單線)철길이 외롭다.
늘 복선(複線)철길만 봐왔던 나,
평행선을 그리며 외로이 나 있는 단선철길에 마음이 먹먹해진다.
누군가는 희망을, 누군가는 절망을 안고 다녔을 철길에 다니는 기차가 없어 더 외로운지도
모르겠다.
10;30
양반 꽃으로 불리는 '능소화'가 담벼락을 타고 올라 치렁치렁 꽃을 피우고,
낮은 담을 따라 접시꽃도 고개를 바짝 세우더니,
터질 것 같은 사연을 갈무리 하지 못한 얼굴의 아주까리가 담을 훌쩍 넘어 나를 바라본다.
한때 탄광으로 번성했던 구절리,
사람들의 발길로 번잡스러웠던 곳이 석탄 산업이 시들어지며, 다시 먼 옛날의 첩첩산중으로
변한 곳을 구비 구비 돈다.
구절리(九切里)의 송천 냇물이 아홉 굽이를 이루며 흐른다.
송천은 겹겹이 쌓인 세월 동안 구절양장(九折羊腸)으로 굽이지며 노추산 기슭을 다듬는다.
가장 여름다운 여름은 7월일까, 8월일까.
여름의 대표는 무더위일까, 장맛비일까.
여름의 진정한 주인은 초록이 묻어나는 숲이 아닌가?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지려나,
만수산 먹구름이 몰려오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 고개로 날 넘겨주소.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너 주게.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노추산 기슭에서 정선 아리랑을 흥얼거리며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조린다.
10;40
귀농과 귀촌, 전원생활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귀농(歸農)은 기존의 직업을 버리고 농사를 직업으로 삼는 것을 말하며,
귀촌(歸村)이란 도시에서 살다가 농촌으로 내려가 사는 것을 말한다.
전원생활의 의미란 무엇일까.
반농반도(半農半都)로 도시에 집을 두고 가끔씩 농촌으로 내려가 텃밭을 가꾸는 정도겠지.
군에서 제대하고 하릴없이 빈둥거릴 때 특용작물에 관심을 갖는다.
겨우 보릿고개를 면할 때였지만, 논에는 벼를 심고 밭에는 보리와 배추 등 일반농작물을
심는 농사가 대부분이라, 농부들은 특용작물에 대해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갖지 않았다.
부산에서 올라온 후 아버지가 계시던 과수원의 빈 땅에 천궁, 당귀, 작약 등 특용작물을
심는 계획을 세우다가 '주택은행' 합격 통보를 받아 은행원이 천직(天職)이 되는 바람에
그 꿈은 사라진다.
농촌생활은 도시생활보다 훨씬 어렵다.
지인(知人)들과 운길산 아랫자락에 20여 평 텃밭을 얻어 농사를 짓지만 한 해로
끝나고, 그 이후에는 농사를 지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경사진 산자락을 깎아 거대한 고냉지를 만드는 산길을 구비 구비 돌며 몸은 좌우로
심하게 흔들린다.
무엇을 심었는지는 모르지만 거대한 밭을 일구었다.
여기까지 1.8km를 걸어 올랐다면 한 시간은 넘게 걸렸겠지.
11;00
초로(初老)의 농부가 먼 곳에 시선을 두다 떠들석한 우리에게 얼굴을 돌린다.
세상을 살아가며 문득 그리워지는 산은 어느 산일까?
시끄러운 속세에서, 대폿집에서, 사무실에서 답답하고 마음이 울컥할 때 배낭을
둘러메고 달려가고 싶은 산은 나에게 어느 산일까?
나는 늘 검단산을 꼽지만 구불구불 산길을 올라오며 거대한 산줄기에 반해 이제는
노추산도 마음에 두어야겠다.
1.8km나 되는 너덜길을 승합차로 올라왔으니 발품은 덜 팔았지만 차량이 파손되었을까
은근히 신경이 쓰인다.
차라리 왼쪽 법도선원 쪽으로 오를걸,
비포장 길인 사자목으로 곧장 왔으니 그냥 마음을 비우자.
고도계는 750m를 가리킨다.
약 600m만 고도를 올리면 정상에 이를 모양이다.
여기는 속세에서 한참 떨어진 별천지의 세상이다.
세상의 잡다한 소리가 없는 곳, 오로지 자연과 내가 있는 곳이다.
노나라의 공자와 추나라의 맹자가 관련된 노추산(魯鄒山)이라면,
공자와 노자의 지혜를 빌려 삶의 속박을 풀 수 있는 곳일까.
삶의 속박을 어차피 풀어야 한다면 결국 나 자신이 스스로 풀어야 하는데,
풀기 위해서라도 노추산의 산속으로 스며들어야겠지.
무슨 꽃이지?
단풍취 같은데 활짝 피지 않아 도저히 모르겠다.
삶과 죽음이 매일 반복되는 산속에서 대자연의 비밀을 살짝 엿보려 하지만
처음부터 비밀을 풀지 못하겠다.
거대한 산속에서 자연과 인간, 죽음과 삶을 온몸으로 느끼며 고독(孤獨)을 느껴볼까.
그래, 사는 게 별거더냐,
이렇게 고독도 즐겨가며 모르면 모르는 대로 털어내며 터덜터덜 조금씩 걸어가는 게
인생이지.
숲 속에 한 걸음을 딛는 순간 나는 자연의 일부가 된다.
바람과 이름 모를 새소리가 내 귀를 가득 채워주니 다른 모든 소리는 차단한 채 말없이
숲을 걷는다.
숲에는 단풍나무가 곳곳에 터널을 만들었다.
기막힌 가을 단풍 빛을 보러 다시 오라고 유혹을 하는 모양이다.
숲은 자연의 생생함을 몸으로 말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끝까지 오르고 싶은 순한 산길이 펼쳐지고, 소나무 참나무 단풍나무가
서로 하늘을 다툰다.
신갈나무 높은 가지에 새둥지가 보인다.
꾀꼬리 둥지일까, 직박구리 둥지인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침묵을 지키니 알 수가 없다.
사람의 인기척을 느끼면 어미새는 새끼를 보호하려는 본능으로 사람의 접근을 경계할 텐데,
그런 기색이 없으니 이미 이소(移巢)를 한 모양이다.
사과(謝過)는 사과다워야 한다며 잠시 사과에 대해 화제가 된다.
메르스로 인한 혼돈(混沌)의 세상에서 웃기는 사과가 연일 쏟아진다.
자기가 쓴 소설의 표절논란에 끝없이 추락하는 어느 스타 작가는 "나도 내 기억을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잘못은 했지만 원인은 네가 제공했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가벼움과 조롱을 하는듯한 사과는 사과를 받는 사람을 더 참을 수 없게 하고 화나게 한다.
국회법 개정과 국회에 대한 불만으로 "배신의 정치, 자기 정치를 앞세우는 사람"이라고
대통령이 비판을 하자, 대통령에 대한 여당 원대대표의 사과가 매스컴의 화면과 지면을
뜨겁게 달군다.
사과를 위한 사과인지 진정성이 보이지 않는다며 사퇴를 하라며 연일 맹공격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우습기만 하다.
반면에 메르스 유포지로 지탄을 받는 삼성병원의 최고 경영자인 이재용 부회장은 "조건
달지 않고 끝까지 책임지겠다."라며 진솔한 자세를 보였고,
미국의 명문대인 하버드, 스탠퍼드 대학교를 동시에 합격했다며 거짓말을 하다 들통이 난
한 여학생의 아버지는 "아픈 딸을 치료하며 조용히 살겠다."라고 사과를 하니 많은 사람들이
동감을 하며 매스컴의 집요한 화살을 피한다.
예전 어르신들은 주변에서 어린이들이 장난치고 싸우면 "싸우면서 큰다."라고 했지.
아들 내외, 두 손자와 같이 사는 내 집은 잠시라도 조용할 때가 없다.
종일 싸우고, 장난치고, 던지고, 부수고, 웃고, 울고, 싸고, 먹고, 씻고 나서야 잠이 들면
비로소 평화가 찾아온다.
비록 4살, 2살에 불과하지만 싸워도 원칙이 있는데,
장난치고 싸우다가도 아프다고 하면 서로 쓰다듬어 주고 안아주면서 위로를 한다.
아기들만도 못한 정치권의 치졸한 싸움을 보며 한심한 생각이 든다.
오로지 나라와 국민만을 생각한다면 저런 싸움이 가능할까?
정치권 사람들을 Tv화면이나 신문지상(新聞紙上)에서 볼 때마다 구역질이 난다.
사과할 때는 구차한 변명을 대지 말고 진솔한 자세로 성실하게 사과를 하여야만
상대방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11;16
산행을 시작한지 20여 분 만에 만난 이정표가 반갑다.
노추산 정상까지 2.3km가 남았고, 손목에 찬 고도계는 900m를 표시한다.
높이 1,300m 가 넘는 고산에 산객은 오직 우리뿐이니 이 산은 은둔(隱遁)의 산인가.
솔바람소리에 섞여 자연의 시간은 흘러가고 오늘은 우리가 이 산의 주인이다.
'꿀풀'의 꽃잎을 따 입 에 넣어 꿀맛을 볼까 하다가 그냥 지나간다.
꿀풀이 있는 오솔길은 동물들이 물을 마시러 다니는 길이기도 하지만 내가 숨쉴 길이다.
오늘 이 산길을 오르며 추억이 얼마나 쌓일까,
숲 속을 바라보며 잠시 사색을 즐긴다.
지금부터는 한 걸음씩 걸어 오르며 지나간 날들을 내려놓아야겠지.
걸으면 걸을수록, 오르면 오를수록 심신이 조금씩 가벼워지니 메르스에 지쳤던 심신이
이제야 힐링(Healng)이 되는가 보다.
쭉쭉 뻗어 하늘로 오른 금강소나무 사이로 철쭉과 단풍나무가 제법 많다.
작은 소나무는 새순을 내어 허공에 집을 짓고, 작은 곤줄박이가 나뭇가지에 앉았다가
허공으로 나른다.
새소리와 소나무가 내는 자연의 소리를 귀에 담는다.
지금의 생각을 얼마나 오랫동안 기억을 할지 모르지만 오랫동안 기억하려 애쓰겠지.
아! 행복하다.
지금 이순간이 너무 행복하다.
눈이 즐겁고 귀에 자연의 소리가 들어오는데 더 이상 무엇을 바랄까.
11;40
구불구불 산길이 이어진다.
분명히 거의 일직선으로 올라온 거 같은데 뒤돌아보니 생각보다 많이 구부러진 산길이다.
산길은 내 인생길과 같은 걸까?
은행생활을 하면서 반듯하게 걸어온 것 같은데, 어쩌면 제대로 걷는다고 걸었어도
잠시 구불거릴 때도 있었고 모함을 받아 조금 비틀거린 적도 있었지.
산길과 마찬가지로 인생길도 가끔은 되돌아봐야 삶의 깊이를 알 수가 있다.
바람 한줄기가 인생길에 지친 나를 위로라도 하려는지 대자연의 음악이 되어 머리를
시원하게 해준다.
진 초록색 관목들이 빽빽한 숲에 핀 '숙은노루오줌'에 코를 대고 노루 오줌냄새를 맡는다.
저 허공에선 여름의 태양이 지글거리며 작열하지만 따가운 햇살은 울창한 숲 속으로
들이치지 못한다.
11;50
길게 이어지는 비탈길을 오르니 약한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해발고도 1,030m에 있는 옹달샘에 도착한다.
덜 익은 도토리가 툭 하며 샘터로 떨어지고, 샘터에 고인 물은 탁해 마실 수 없으니
가뭄의 영향인지 멧돼지가 쑤셔 놓았는지 모르겠다.
내 고도계는 1,130m를 표시하니 약 100m의 오차가 생겼다.
GPS를 이용한 고도계가 아니고 기압으로 측정을 하는 고도계라 오늘같이 먹구름이
요동을 치면 기압(氣壓)의 불안정으로 오차가 생긴다.
이곳을 지나면 이성대가 나온다는 안내판이 반갑고, 고개 숙여 '숙은노루오줌꽃'의
냄새를 맡다가 청초하게 핀 '꿩의다리'를 바라본다.
깊은 산 산길에서 시간을 내려놓고 산 냄새 숲 냄새를 맡다가, 교묘하게 쓰러진 고사목이
몸으로 말하는 숱한 사연을 듣는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 귀를 기울이니 고사목은 쓰러져 흙으로 돌아가겠노라고 나에게 전한다.
장자(莊子)는 '죽음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두려울 것도 싫어할 것도 없다'라고 했다.
나무도 감정이 있다는데,
사람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거부하는 부정(否定), 분노, 타협, 절망의 단계를 거쳐
죽음을 받아들이는 수용(受容)을 할까?
쓰러진 고사목의 뿌리 근처에서 새싹이 나온다.
아마도 쓰러진 고사목의 자손이라 고목은 쓰러지면서도 행복했겠지.
12;25
바위가 강이 되어 흐르는 암괴류(岩塊流)가 앞을 막는다.
바위길이지만 즐거이 몸을 맡기고 너덜을 건너며 기왕에 만났던 암괴류를 생각한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비슬산의 암괴류, 금정산의 암괴류, 만어산의 암괴류가 대표적이던가,
비록 비슬산의 암괴류 보다는 작은 규모지만 내 머릿속에 거대하게 자리를 잡는다.
덩달아 해남 두륜산의 천년수 위에 자리한 암괴류, 검단산 약수터 위의 암괴류가 생각난다.
< 나목 裸木
바위덩어리가
거대한 파도 되어 밀려온다.
눈물이 되어 밀려온다.
답답한 가슴을 열어주는 곳,
거대한 돌의 파도 속에 서있는
나목(裸木)이 외롭다.
쓰러진 고사목(枯死木)을 대변하느라
저 나목은 쓰러지지 않는가.
나목을 비집고 초록빛 생명들이 자라니
죽은 나무와 초록빛 생명은
죽음과 삶을 대변하는 모양이다. 석천 >
엷게 산허리를 둘렀던 박무(薄霧)가 사라지고 하늘엔 먹구름이 몰려온다.
마구 뒤엉키며 모습을 바꾸는 먹구름이 괜히 심란(心亂)하게 만든다.
소나기가 쏟아지려나,
비록 내가 비를 맞더라도 긴 가뭄 속에 소나기는 귀한 비이니 환영을 하자.
저 하늘은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에 이름인가?
불교에서 말하는 삼계제천(三界諸天)인 모양이다.
구름이 휘 돌아치며 구불거리는 능선의 근사한 풍경을 서서히 지운다.
주역(周易)에서는 '운종룡 풍종호(雲從龍 風從虎)라, 구름은 바람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따른다.'라고 한다.
하늘이여 제발 비를 내리게 해서 가뭄을 해소하게 하소서!,
하늘이여 바람을 일으켜 낡고 더러운 세상의 부조리를 몽땅 태워 주소서!
라고 삼계제천의 하늘에 간절히 빌어본다.
두 번째 만나는 암괴류에 토르(Tor)와 애추(崖錐)가 있을까 애써 두리번거리지만 크고
작은 돌만 흐른다.
내 눈에 보이는 풍경만을 이대로 붙잡아 둘까?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 속에 빛과 바람 그리고 구름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산속에는 나와
거대한 암괴류만 남았다.
돌이 흐르는 강은 황홀한 순간을 연출한다.
삽시간의 황홀은 내 눈을 홀리는 색깔도 없지만 귀를 멀게 하는 큰소리도 치지 않고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도 없다.
돌무더기에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냥 슬쩍 지나가며 영원한 것을 이곳에서 깨달으려 하는 우매(愚昧)함을 자연은 비웃겠지.
등산로에서 처음 만나는 작은 기암봉(奇岩峰) 사이를 오르면, 삐쭉 솟은 이 길을 오르면
부모님의 너른 품과 같은 곳이 나올까?
한 여름의 산,
이 계절에는 세상의 모든 길이 암청(暗靑)의 터널을 만들지.
나무들은 땅속 깊이 뿌리를 내려 생명수를 끌어 올려야 하는데,
기상청에서는 요즘과 같은 장마철에 비가 오질 않으면 가뭄이지 마른장마라는 이상한
궤변으로 세상사람을 현혹시킨다.
차라리 마른장마가 아니고 극심한 가뭄이라고 표현을 하면 진실성이라도 보일 텐데,
소나기조차 인색한 하늘을 바라보며,
곰이나 산 도적이 고갯마루를 지킬 것만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는 산마루를 넘는다.
하늘로 오르는 통천문(通天門)을 넘어 옛 성현(聖賢)들의 자취가 남은 길을 걷는다.
이 길을 오르면 설총과 율곡 이이가 공부를 하였다는 이성대(二聖臺)가 나오겠지.
먼저 걸어갔던 이들의 발자취를 따라 천천히 걸으며 그들이 도(道)를 닦으며 얻은
지혜를 나눠달라고 마음속으로 빈다.
짙은 녹음을 뚫고 들어온 햇살에 '큰물레나물'이 꿈틀거린다.
노란 꽃잎이 물레의 날개가 되어 돌아가서 현기증이 났는지 벌과 나비가 없다.
삼거리에서 이성대를 지나치면 손해를 볼 거 같아 발걸음을 돌려 이성대(해발 1,200m)에
오른다.
역사의 순간들이 켜켜이 아로새겨진 곳.
이성대의 마당에서 놀던 새들이 황급히 자리를 비켜준다.
낯선 발소리에 놀라 안온한 터에서 자리 잡았던 새들이 허공을 향해 나르고,
나는 이방인이 되어 부드럽게 품을 펼친 산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산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담장이 없고 누군가 떨어질까 난간을 만든 조망대에서 이성대를 바라본다.
무언가 지야 만 비로소 시간이 오고 가는 걸까.
천 년을 두고 빛나는 삶이 이어지는 설총과 율곡 그리고 공자와 맹자를 생각해본다.
이성대는 약 50년 전 강릉사람 박남현씨가 설총과 율곡 선생이 수학했던 곳임을 기리기 위해
지었다는데 이곳에서 바라보는 이성석총과 너덜지대의 경치가 대단하다.
잠시 후 백두대간의 준봉들과 옥계 앞바다는 엷은 박무 속으로 사라진다.
고요한 뜰 앞 추녀 위에 앉았던 새소리가 우수수 떨어지고, 너른 마당에 선 친구들의
표정 한없이 후덕하고 온화하다.
노추산의 정상이 가까워졌다는 안도감에 표정을 감췄어도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가 흐른다.
산행을 하면서 웬만한 데서는 시간을 지체하지 않는 게 내 산행 버릇이다.
그런데 시간을 지체한다.
누구의 글씨인지는 모르지만 노추산 이성대(魯鄒山 二聖臺)라는 현판의 현란한 서체(書體)를
눈에 담는다.
글씨 쓰는 법을 나는 잘 모르지만 옛사람은 서세여고송일지(書勢如孤松一枝)라고 했다.
일찍이 서예에 관심이 있었으나 느닷없이 찾아온 오른팔 마비로 뜻을 접은 지 오래지만,
'글씨 쓰는 법은 소나무 한가지와 같다'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는다.
아래층은 방이 세 개로 수도하는 사람들이 쓰고, 이층에는 설총과 율곡의 위패를 모셨는데,
매년 음력 8월 9일 이성대에서 제례를 지낸다고 한다.
지도상으로는 내가 올라온 길의 오른쪽이던데, 오장산과 사달산이 저기인가?
이성대에서 펼쳐지는 다락산과 대관령의 풍경을 바라본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산명은 불교와 매우 밀접한데 이곳은 유교(儒敎)에서 유래된 지명이 많다.
노추산도 그렇거니와 오장산(五藏)도 오상(五常) 즉, 삼강오륜의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이르는 말이며, 사달산(四達山) 역시 사단(四端) 즉, 사람의 본성인 측은(惻隱), 수오(羞惡),
사양(辭讓), 시비(是非)지심을 이르는 말이다.
신라와 조선시대 당대의 최고의 유학자인 설총과 이이를 배향한 산,
신라 때 설총과 조선조 때 율곡 이이가 모두 이곳에서 학문을 닦아 중국 노나라와 추나라의
기풍이 있다는 뜻으로 노추산(魯鄒山 1,322m)이라는 산명(山名)이 붙었다고 한다.
이성대 옆 바위틈으로 물이 졸졸 흘러나오는 석간수(石間水) 한 잔으로 갈증을 해결한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며 뱃속이 짜릿할 정도로 시원하고 물맛이 뛰어나다.
정상까지 거리가 350m 남았는데 고도를 122m나 올려야 하니 코가 땅에 닿을 듯 된비알이겠지.
산길이 바짝 날을 세우는데 산새들은 먹이를 찾아 하산을 했는지 초록으로 도배된 숲에는
정적만 흐른다.
13;00
숨이 깔딱깔딱할 정도로 넘어가기 힘든 길은 어느 산이건 있기 마련이라,
이성대를 지나 지금 오르는 길은 노추산의 대표적인 깔딱 고개인 모양이다.
더위와 된비알에 숨은 가쁘고 안내판 하나가 눈길을 잡고 조금만 위로 가면 샘터가 나올까
다시 걸음을 멈춘다.
이제부터는 부드러운 주능선이다.
새소리를 앞세워 오르다 보니 삼거리가 나오고, 여기서 150m만 오르면 정상이다.
해발 1,300m에 가까우니 나도 새들도 구름도 쉬었다가 넘어야겠지.
세상의 모든 것들은 때가 되면 가고, 또 때가 되면 오는 게 자연의 법칙이라 상당한 높이에
올라왔어도 나보다 먼저 온 초록이 난무한다.
무너진 길도 없는, 거친 산길도 아닌 노추산의 끝나지 않은 산길에서 마음이 오락가락한다.
어쩌면 나는 지금 나 자신을 찾기 위해 심한 방황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현실 그 자체를 인식해야 하는데, 현실을 그냥 바라보며 해석을 하려 하는 어리석음에
빠져 허우적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나란 존재는 하나뿐이고 존재는 그냥 존재일 뿐인데 말이다.
머리를 비운다.
가슴을 비운다.
또 무엇을 비워야 할까?
숲으로 한 발짝 들어가 소변을 본다.
여기까지 힘들게 오르며 무엇을 버렸을까?
잡념, 미움, 그리고 집착이 버려졌을까?
소변에 묻어 나오는 노폐물의 냄새가 숲의 향기에 밀려 저만치 사라진다.
초록바람이 불고 초록의 파도가 밀려온다.
스스로 걸어야 오를 수 있는 곳에 핀 초롱꽃이 나를 환영한다.
짙푸른 녹음 속에 초롱꽃이 속살을 드러냈다.
긴 오름길이 시원하게 마침표를 찍었기에 눈과 가슴을 확 열어젖힌다.
찌든 땀을 식혀주는 고마운 바람이 목덜미를 스치고, 배낭을 멘 채 초롱꽃이 뿜어주는
꽃향기를 맡는다.
13;08
정상에 오른다.
이 순간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정상을 향해 올랐지.
키 큰 나무들이 정상을 에워싸 조망은 시원치 않지만 숨이 탁 트인다.
오래 닫혔던 낡은 문을 열어젖히듯 가슴을 활짝 열고 긴 호흡을 하니 추잡한 세태에 찌들었던
근심과 잡념이 하늘가로 훌훌 날아간다.
더 이상 무엇을 바랄까.
신선(神仙)이 부러울까, 권력이 부러울까, 돈과 명예가 부러울까?
강원도 심심산골의 노추산,
민둥산, 가리왕산과 더불어 정선을 대표하는 3대 명산으로 손꼽히는 노추산,
노추산은 신라의 설총이 노나라의 공자와 추나라의 맹자를 기려 지은 이름이라 전해진다.
정상에 오른 희열로 삼계팔고(三界八苦)를 잠시 잊는다.
삼계의 중생이 겪는 생로병사(生老病死), 애별리(愛別離), 원증회(怨憎會),구부득(求不得),
오음성(五陰盛)을 노추산에서는 느낄 수가 없다.
바람 불고 황혼의 삶이 마구 흔들리는 날 다시 찾아올까.
먼 훗날 다시 이곳에 서면 잃어버린 나를 찾을 수 있을까?
시간은 저 혼자 제멋대로 흘러가고, 나는 몰려오는 구름과 쫓겨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바람과 새소리 속으로 이미 풍덩 빠졌다.
정상에 서면 오래 머물 수가 없다.
산의 정상과 삶의 정상은 비슷한 데가 많지.
찬바람이 땀에 찌든 티셔츠 속으로 파고든다.
정상석을 슬그머니 어루만지며 돌아가겠노라고 침묵으로 말하고 발길을 돌린다.
정상에 핀 '여로'를 찍으며 문득 삼계유일심(三界喩一心)을 생각한다.
속세에서 심란했던 마음과 혼란과 번뇌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으니 비우는 수밖에,
내 마음만이 유일한 실재(實在)가 아닌가?
천계(天界), 지계(地界), 인계(人界), 즉 하늘과 땅과 사람의 경계에 핀 '여로'에
무릎을 꿇어 경배를 한다.
풀들은 마구잡이로 웃자라 나풀거리고 '자리공'은 흰 꽃을 피워 정상을 환하게 한다.
초롱꽃과 여로 등 온갖 야생화들이 몸을 열어 향을 풍기고, 초록이 묻은 크고 작은
식물들이 곱고 포실하다.
< 흰 초롱꽃
새초롬하게 핀 흰 초롱꽃잎에
먹구름이 흘린 눈물방울이 맺혔구나.
조롱조롱 매달린 눈물방울이
또르르 굴러 떨어질까
가슴 졸인다.
나에게도 너처럼 탐스럽던 시절이 있었지.
물방울처럼 매달리며 오졌던 시절이 있었지.
아름다웠던 청춘의 삶이
눈물겹게 세월에 묻어가는 걸
노추산에서 한탄하노라. 석천 >
어느덧 등판을 적셨던 땀은 다 식고 한여름 더위가 무색하게도 한기가 스며들기에
서둘러 방풍 옷을 걸쳐 보온을 한다.
지금은 하늘의 시간 즉, 천시(天時)다.
번잡하고 혼탁한 세속의 시간에서 벗어나 1,300m의 고지에서 술 한 잔을 마시는
시간은 하늘의 시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한동안 세속의 시간에서 벗어나 초록이 난무하는 산속으로 도피하고 싶었지.
메르스라는 병도 싫고, 배신을 주제로 해 매일 시끄럽게 구는 사람들이 싫기도 하지만
비겁한 사람이 되어도, 무책임한 사람이 되어도 산속에서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마시는 술 한 잔이 그리웠지.
노추산에서 호연지기를 기르며 정상을 밟았으니 조급해야 할 이유도 없다.
그냥 자연의 시간이 흐르는 대로, 하늘의 시간이 허용하는 대로 퍼질러 앉아 술 한 잔을
마시고 싶다.
하늘의 시간이 미몽(迷蒙)의 시간이라도, 호접지몽(胡蝶之夢)이라 해도 이순간만은
행복하기에 무릎을 꿇고 노추산 정상에 경배를 드리고 싶다.
14;20
하늘을 건넌 구름이 장쾌하게 뻗은 능선을 감돈다.
초행길이라 앞에 보이는 고산준봉이 오대산인지, 가리왕산인지 분간을 하지 못하지만,
내 넋은 이미 저쪽 능선으로 흐르며 내 발걸음을 기다리라 전한다.
< 허공 虛空
나그네 마음에 흐르는 아련함이
한조각 구름이 되어 허공을 떠돈다.
소리 없이 쌓인 돌들은 내색을 않는데
나 혼자 스스로 가엾어 하는가.
꿈틀거리는 능선을 바라보며
더 작아진 나를 한탄하노라. 석천 >
불어오는 바람이 내가 사는 세상으로 빨리 돌아가라고 재촉을 한다.
멋진 풍경 한 자락 싸들고 인간세상으로 내려가면 메르스로 인한 거친 시간을 건너가는
힘이 될까?
백수로 산지 얼마나 되었을까.
문득 손가락으로 몇 년이나 되었나 헤아려본다.
요즘같이 안전 불감증으로 세월호 같은 대형참사가 생기고, 메르스라는 병의 초기대응
미숙으로 전 국민이 불안해하고, 중국으로 여행간 공무원들이 탄 버스가 다리 아래로 떨어져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지.
삶의 회한을 씻어주는 노란 꽃 한 송이가 너덜겅을 지나 숲 속에서 고개를 내민다.
와! '하늘말나리'를 오랜만에 만나는구나 하며 숲 속으로 한걸음 들어가 가까이 다가서니
'삿갓나물꽃'이 아닌가.
꽃만 봐서는 하늘말나리와 분간이 잘 안 되는 '삿갓나물꽃',
말나리는 피침형의 잎 5~15개가 단층으로 잎이 중첩되어 7~8월경 피며,
삿갓나물은 6~8개 피침형의 잎이 대개 2층 구조로 돌려나며 4~6월에 핀다.
어쩌면 이 세상에, 이런 놈의 나라에서 야인(野人)으로 산다는 것은 행복한 건지, 불행한 건지
판단이 가질 않지만, 세상 살기가 험난할 때 백수의 신분이라 아무런 부담없이 툴툴 털고
산중에서 대자연을 누리며 걸을 수 있다는 건 분명 행복이다.
이 나라의 국민으로 산다는 게 참으로 견디기 힘들기에 나는 추악한 현실에서 스스로를
도피한 거겠지.
최근 여론조사에서 우리나라에 전쟁이 터졌을 때 20~30대는 일단 도피를 선택했지만
50~60대는 대부분 참전하겠다는 결과가 나왔다.
가정교육이 문제인지, 전교조 선생들의 학교교육이 문제인지 애국심이 땅에 떨어진 나라에
내가 살고 있구나.
15;20
4시간여의 산행을 마친 몸은 가볍고 가슴은 새로 채운 자연의 에너지로 충만하다.
22;00
내 삶을 산다는 것,
나만의 히스토리(History), 나만의 허스토리((Herstory)를 갖는다는 것은 하루하루를 온전히
나만의 것으로 만들어야 완성되는 것이지.
노추산 산행을 머릿속으로 복기를 하며 나만의 히스토리를 만들어 메모를 한다.
네 시간 여의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 속에 온전한 나를 찾았다.
휘영청 밝은 달빛이 창문으로 스며들고, 메모를 하다 지쳤는지 슬그머니 잠이 든다.
2015. 7. 2. 정선 노추산에서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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