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느림의 미학 586 오늘은 무엇을 버릴까.

김흥만 2020. 11. 19. 11:10

2020. 11. 19. 06;00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밤새도록 내리고도 무엇이 부족했는지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로 변한다.

앞산에 올라가려다가 폭우에 질려 포기하고 들어와 몸을 부르르 떤다.

 

불인(不仁), 무지(無知), 비겁(卑怯)을 감춘 간신들과 뻔뻔한 모리배

(謨利輩)들이 세상을 시끄럽게 흔들어대자 하늘도 노했는지 이번 가을엔

비를 내려주지 않았다.

 

유난히도 가물었던 10월이 지나고 11월도 중순이다.

11월은 버리고 비우는 달이다.

서가(書架)와 서랍은 이미 정리했으니 오늘은 무엇을 버릴까.

 

멀티 룸(multi room)이라 불리는 방에 내려간다.

혹시 그동안 잊고 있었던 보물이 어디선가 튀어나오려나.

 

나중에라도 혹시 쓸 일이 있을까 멀티 룸 박스에 보관했던 물건들을

하나씩 풀어헤친다.

아기들이 썼던 장난감, 골프백과 골프채, 가방, 등산용 배낭, 볼링공과

볼링화, 크리스마스트리, 빈 플라스틱통 등 버릴 물건을 끄집어낸다.

 

100리터, 50리터 봉지가 채워지는 만큼 빈 박스가 생기고, 텅 비어가는

수납장에서 '삼파장 형광램프'와 귀리봉지를 발견한다.

 

08;00

어느새 입동이 지났고 며칠 후면 소설(小雪)이다.

앞산 만산홍엽(滿山紅葉)이 사라진 빈자리에 빗방울이 스며든다.


산수유나무에선 빨간 열매가 요염을 떨고,

부지런한 목련나무에는 내년 봄을 준비하는 겨울눈(winter bud, 冬芽)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어느 시인은 "꽃잎이 떨어져 바람인가 했더니 세월이 가더라"라고 했다.

정원의 감나무 꼭대기에 매달려있던 홍시가 사라졌다.

엊그제까지 까치밥 세 개가 있었는데 새들이 먹어치웠을까 아님 비바람에

떨어졌을까,

그래 홍시가 떨어지면 겨울이 온 거다.

 

생명의 탄생과 성장, 쇠락(衰落)과 소멸로 끊임없이 변하는 제행무상의 자연,

소멸(消滅)과 비움은 채움을 위한 또 다른 시작이다.

또 다른 생명의 잉태를 위해 가을을 쉽게 떠나보내고 겨울은 폭우와 함께

찾아왔다.

 

살짝 열어놓은 창문이 덜컹거린다.

문득 고향집 문풍지 떠는 소리가 그리워지는 아침,

서늘한 소슬바람이 아니어도 좋다.

지금 내리는 겨울비가 조금 부드러워지면 한없이 걸어야겠다.

 

나에겐 쓸모없고 가치없는 것일지라도 누군가에겐 요긴한 물건일수도

있겠기에 멀티 룸에서 찾은 삼파장램프를 친구에게 주기 위해 신문지로

포장을 하는 나를 발견한다.

 

                        2020. 11. 19.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