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0. 10.
지금보다 더 어지러운 세상을 만났어도 두려움이 별로 없었는데 요즘엔
집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점점 많아져가고 말수도 줄어든다.
창문을 여니 찬바람이 밀려들어오고, 구름 한 점 없는 파란하늘이 눈앞으로
다가온다.
선탈(蟬脫)의 아픔을 노래하던 매미소리 사라지고 그 자리를 메꾼 긴꼬리,
방울벌레, 귀뚜라미가 마구 울어댄다.
며칠 전 막내 동생으로부터 뜻밖의 전화가 왔다.
둘째 형 집에서 내 고등학교 졸업앨범을 찾았고, 불분명하여 야릇하다는
일본식 표현인 '야리꾸리'한 사진도 많다며 나를 놀린다.
앨범을 한 장씩 넘겨가며 50년 전 내 학창시절의 모습을 찾아본다.
앨범 중간에서 색 바랜 한 묶음의 흑백사진이 나온다.
학교정문에서, 반송(盤松)아래에서 찍은 사진,
인천 월미도 백사장에서 '개다리춤'을 추던 사진,
훈련장에서 카빈소총을 메고 경계근무를 서던 일등병 시절,
일석점호를 앞두고 준비를 하던 내무반장 시절,
전투복을 입은 육군 병장의 모습이 담긴 사진은 나를 미소 짓게 한다.
수십 여장을 넘기다가 여친과 진천 백곡저수지에서 데이트를 하던 사진을
발견한다.
인연이 닿지 않아 결혼을 하지 못했던 그 여친,
임종직전까지 청주병원의 내 어머니를 자주 찾았다는 소식을 들으면서도
마주치지 못했다가 1999년 영등포역 지점장 시절 청주 출장길에
잠시 만났던 그 여인의 웃는 모습을 사진으로 보며 가슴이 찡해진다.
미스코리아 충북일 정도로 미모가 뛰어났으나 전신관절염으로
고생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가슴이 먹먹해 한참 말을 잇지 못했는데,
뜻밖에도 한동안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진 그 여인의 사진을 보다니,
동생은 내게 '타임머신'을 선물해 50여 년 전의 꿈 많고 풋풋했던 청년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눈을 감고 지난날을 회상한다.
내가 어떠했는지,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뇌종양 선고를 받으며 느꼈던 절망이 어떠했던지,
나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수술 후 내가 깨어날 수 있을지,
한줌의 재가 되어 검단산에 흩뿌려질까, 수술실에 들어가며 회한(悔恨)과
두려움에 떨었던 순간 순간들이 떠오른다.
은퇴 후 백수 된지 12년,
창밖에 빨갛게 물든 벚나무 잎사귀가 바람에 떨어진다.
낙엽은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 자연의 전갈이다.
몇 달 후면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종심(從心)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 세계는 어떨까.
자연의 세계는 끊임없이 순환하기에 이 가을이 가면 엄동설한이 찾아
올 거고, 그 겨울이 가면 봄이 오건만,
사람이 종심의 세계로 들어가면 신중년이라는 말장난도 필요 없이
사후(死後)의 세계로 더 가까이 다가가는 거다.
희대의 역수(逆豎)와 요비(妖婢)가 판치는 세상,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나라에 살며 무언가 표현하지 못할 두려움이
살짝 생긴다.
한동안 잊었던 50년의 추억이 문득 살아났고,
다가올 종심의 세계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할까를 생각하다 어머니를
만났다.
잠시 낮잠이 들었나보다.
2020. 10. 20.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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