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느림의 미학 677 처녀치마를 찾아서

김흥만 2022. 4. 3. 13:53

2022.  4.  2.  08;30

옛날 벼슬아치들이 지방으로 부임할 때,

임금이 계신 한양의 도성을 향해 절을 올리고 떠났다는 전설을 품은

배알미리에서 계곡을 따라 검단산을 오른다.

 

계곡으로 접어들자 작은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소리,

바위와 돌멩이를 피해 흐르는 물소리가 귀청을 때린다.

 

60년 만의 겨울가뭄이라 했는데,

이렇게 많은 물이 흐르다니, 걸음을 멈추고 작은 소(沼)에 고인

명경지수(明鏡之水)를 바라본다.

 

맑은 물을 바라보니 저절로 세안(洗眼)이 되고 물소리에 세이(洗耳)가

되며 마음이 고요해진다.

물에서 음이온과 알파파(alpha wave's 波)가 분명 나오는가 보다.

 

산에서 물이 흐르는 계곡길을 걸으며 동적명상(動的冥想)을 할 때가

나에겐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아무 생각 없이 단순하게 걷는다는 것 바로 무념무상(無念無想)이 아닌가.

 

구름 몇 점이 멋대로 떠다니는 파란 하늘,

꿩들이 울어대고, 까마귀 까악거리며 허공을 편히 오간다.

 

09;00

거대한 바위 아래에서 '앉은부채(앉은 부처)'를 만났다.

사약(死藥)의 원료로 쓰이던 천남성과라 약간 거리를 두고 카메라를

댄다.

 

유독성 식물이지만 마치 도깨비방망이처럼 생긴 꽃차례(화서)를

부처님 후광처럼 불염포(佛焰苞)가 둘러쌌다.

그래서 사람들은 '앉은부채'를 '앉은 부처'라고도 부른다.

 

검단산 곱돌 약수터를 지나 깔딱 고개에 2~3월이면 수백 송이가

지천으로 피었었는데 등산로가 정비되면서 슬그머니 사라지고

희귀종이 되었다.

 

꽃 안에 부처가 들었다.

앉은부채를 바라보며 식기심한(息機心閑)을 생각한다.

 

세상을 살아가며 득실을 따지는 기심(機心)을 내려놓기는 참 힘들다.

욕심을 걷어내면 몸과 마음이 개운하고,

근육의 긴장을 풀면 표정이 부드럽고 맑아지는 법인데 말이다.

 

갑자기 힘들었던 일, 서운했던 일, 속상했던 일들이 떠오른다.

지난 일이 새록새록 떠오르면 문해피사의 노인지반에서 말하는

늙음의 증거다.

이럴 때는 치매가 아닌 건망증 정도가 좋을 수도 있다.

 

건망증은 사람을 편안하게 해 준다.

잊을 건 잊고 버릴 것을 버려야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는데 아직도

이해득실로 분노가 생기니 마음에 지옥을 짓는구나.

 

09;30

노루귀를 찾다가 벼랑에서 '처녀치마'를 만났다.

몇 년 전 만난 처녀치마는 꽃이 시들고 치마가 축 늘어졌었는데,

오늘 만난 처녀치마는 매우 싱싱한 처녀로다.

 

수년 전 칠보산에서 발견된 '칠보치마'가 기사화되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칠보치마 꽃은 주황색으로 조금 화려하지만 지금 내가 만난 처녀치마는

엷은 분홍색으로 수수한 처녀이다.

 

잠시 물아일체(物我一體)가 되었는지 처녀치마에 정신이 홀딱 빠졌다가

제정신이 돌아왔다.

물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하기에 물소리에 귀를 기울지 않고 물소리에

기대 본다.

 

지금 내가 딛고 있는 곳이야말로 청정무위(淸淨無爲)로다.

인간의 어떤 간섭이나 누가 명령을 하지 않아도 물은 위에서 아래로 

거침없이 흘러내리니 말이다.

 

겨울이 가고 어김없이 봄이 왔다.

누가 손대지 않아도 세상은 알아서 스스로 돌아간다.

노자가 주창하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음미하며 하산을 재촉한다.

 

                           2022.  4.  2.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