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느림의 미학 679 암묵지(暗默知)

김흥만 2022. 5. 2. 21:11

2022.  5.  2.  05;00

바람이 분다.

꼭두새벽에 찾아온 북서풍은 새벽 기온을 5도까지 떨어지게 만들어

온몸을 움츠리게 한다.

 

먼동이 트자 바랭이, 쇠뜨기풀, 애기똥풀, 지칭개 등 초록이 꿈틀거린다.

황량한 속살을 보인 게 불과 며칠 전인데 어느새 초록이 거침없이 숲을

채워나가는 거다.

 

나는 다른 계절에 비해 색과 빛이 추레하고 쓸쓸한 겨울산의 속살을

한동안 사랑했다.

아무런 꾸밈없이 얼어붙은 검은 흙, 누런 빛이 초라했지만 결코 감추려

하지 않고, 강렬함을 땅속에 품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겨울땅이 좋았다.

 

검고 마른 땅에 몇 번 빗방울이 떨어지고 햇볕이 스며들자 듬성듬성

연둣빛 새순의 무늬가 생기는 요즘의 매 순간순간이 신비롭고 아름답다.

 

고개를 들어 나무를 올려다본다.

지금의 숲 풍경은 화엄(華嚴)의 세계이다.

 

땅바닥의 풀이 어느 정도 자라고 키 작은 나무의 잎사귀가 먼저 나자

키 큰 나무의 잎사귀도 서서히 나기 시작한다.

 

누가 시키지 않았어도 숲의 키 큰 나무는 키 작은 나무와 풀에게 햇볕을

충분히 양보하였다가 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자 자기의 잎사귀를

내보내는 거다.

 

나는 도반(道伴)의 길을 걷는 수행자가 아니다.

또한 자연의 깊이를 제대로 아는 학자도 아니다.

 

숲 속의 나무들이야말로 비록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에 불과하지만

스스로 여러 가지 수행을 하고 만덕을 쌓아 덕과를 장엄하게 하는 화엄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고작 100년도 못 사는 나 같은 인간이 숲과 나무의

깊은 뜻을 어찌 알겠는가.

 

숲에서 일어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자연의 현상을 보며 문득 나무의

화엄세계를 떠올린다.

 

05;30

인생 3막 3장에선 어떻게 사는 게 가장 아름다울까.

이렇게 산속의 풀밭과 나무들 사이에서 노는 인생이 가장 좋은 인생이

아닌가.

 

하얀 고양이가 작은 둔덕 위에 엎드려 움직이지 않고,

그 옆에 검은 고양이가 우두커니 앉아 동료의 죽음을 지키고 있다.

 

봄은 새 생명의 탄생을 축하하는 계절이건만 한구석에선 사람의 사랑을

받지 못한 길고양이가 쓸쓸하게 생명을 마감하는구나.

 

이 숲에는 아직도 내가 모르는 사연이 많이 숨어있을 테니 하나하나

보물 찾기를 하듯 천천히 찾아야겠다.

 

천천히 연둣빛으로 꽉 차가는 숲이 던져주는 암묵지(暗默知)의 지혜를

생각하며 설렘을 남겨야겠지.

 

                                  2022.  5.  2.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