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8. 8. 04;40
먼동이 트려면 아직도 한 시간이나 남았다.
오늘은 숲 속에서 무엇을 만나려나 두리번거리며
산길을 오른다.
고양이 한 마리가 숲 속으로 뛰어 들어가고,
희미한 불빛 아래 활짝 핀 연분홍색 '무릇'꽃을 만났다.
어느 시인은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을 내려갈 때
보았네"라고 했다.
그러나 때로는 어둠 속에서도 보이는 법,
산길가 여기저기에 무리지어 핀 '무릇'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마침 카메라에 플래시를 끼우고 나왔기에 '무릇'에
앵글을 맞춘다.
렌즈는 상처가 났고,
배터리 끼우는 부분이 고장 났어도 부품이 단종되어
고칠 수 없는 카메라,
15년 가까이 내손에서 떠나지 않은 삼성 카메라가
이젠 낡을 대로 낡았다.
응급조치가 필요해 스카치 테이프로 여기저기 붙이며
이 카메라와 작별의 인사를 할 때가 머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2,030만 화소로 당시에는 최고의 화소를 자랑했건만
지금은 웬만한 휴대폰에도 10,800만 화소 카메라가
장착되었고, 심지어는 2억 화소를 자랑하는 스마트폰도
출시되었다.
이젠 작별을 해야 할까,
'무릇'을 찍다 말고 작별을 하기엔 너무 정든 카메라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사람도 사물도 자연도 모든 것이 때가 되면 변하고
사라지고 떠나간다.
그래서 제행무상(諸行無常)이 아니던가.
< 무릇 >
"효과가 없어 항암을 포기하고 양로원행~~",
항암 투병 중인 동창이 카톡으로 보낸 몇 줄의
이별 인사가 떠오르며 다시 가슴이 먹먹해진다.
어휴!
지난달에 이어 이번엔 한 달도 지나지 않았는데,
만나면 헤어지는 애별리고(愛別離苦)가 또 시작
되는구나.
이별이 점점 많아지는 고적(孤寂)한 인생길,
세월이 갈수록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불귀(不歸)의 객이 되어 떠나가고, 남은 사람들은
점점 외로워진다.
그래서 사랑과 이별의 고통을 불교에서는 애별리고
(愛別離苦)라 했다.
이 세상에 태어나면 누구나 생로병사(生老病死),
원증회고(怨憎會苦), 애별리고(愛別離故), 구부득고
(求不得苦), 오음성고(五陰盛苦)라는 인생 팔고(八苦)
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사람과 사람의 이별, 사람과 정든 사물의 이별이라,
어떤 형태의 이별이든 아프지 않고 슬프지 않은
이별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만나고 헤어진다는 것,
이별은 숙명(宿命)이고 그게 바로 존재의 법칙인데
이별에 익숙해지는 방법이 있을까,
이별은 아무리 많이 해도 익숙해지지 않고 하면 할수록
지쳐가고 더 힘들어지는 게 우리네의 인생이 아닌가.
나는 친구나 지인들에게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한다.
가장이라고, 남자라고 못 울 이유가 없다고 말이다.
따라서 아프면 아프다 하고, 울고 싶으면 엉엉 울고,
화가 나면 화도 내보고 그러다 넘어지면 또다시
일어나면 되는 게 아닌가.
05;40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진다.
서둘러 그늘막으로 피하지만 우산이 없어 난감하다.
4시 반 기상예보에는 8시부터 비가 오는 거로 되어
있어 우산을 챙기지 않았기에 비 쏟아지는 하늘을
망연(茫然)하게 쳐다본다.
불과 한 시간 후도 제대로 예보를 하지 못하는 기상청을
원망할 시간도 없어 모자를 푹 눌러쓰고 빗속을 걷는다.
5분도 되지 않아 운동화는 물론 속옷까지 젖어들고
뭔가 모르게 상쾌하고 후련해진다.
비에 젖어드는 발 촉감, 온몸에 달라붙는 옷의 촉감에
묘한 쾌감을 느끼니 나만이 느끼는 카타르시스
(Catharsis)인 모양이다.
빗물이 세상의 더러운 온갖 것을 깨끗하게 씻어가고
몸과 마음은 점점 개운해져 간다.
모자를 뚫고 흘러 내리는 빗물을 훔치며 조금 전
내 카메라에 잡혔던 '무릇'은 이 비에 견딜 수 있으려나,
마음 한구석에 노파심(老婆心)이 생기니 이 또한 병인
모양이다.
2024. 8. 8.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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