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9. 05;00
불빛 희미한 황산숲길을 걷는다.
내 뒤에서 작은 인기척이 들린다.
두 명의 아주머니가 아침인사를 하며 나를 스쳐
지나가고 잠시 후 산 모퉁이를 돌아 내 시야에서
벗어난다.
경사가 완만하고 짧더라도 산길은 산길인데 저렇게
빨리 오르다니 저 사람들의 무릎은 멀쩡할까,
황산숲길에서 다람쥐라고 불리는 아주머니들로
빠른 속도가 경이롭다.
나는 원래 빠르지도 못하지만 호흡을 조절하며
나름대로 천천히 오르는 게 평생 습관이 되었다.
세상을 살아가며 빠른 것만이 능사(能事)일까.
문득 머릿속에 저장했던 옛 기억을 끄집어낸다.
십수 년 전 검단산(657m)에서 영하 10도 이하로
떨어지는 혹독한 겨울 날씨에도 불구하고 반바지를
입고 뛰어서 오르내리던 준족(駿足)의 중년 사내가
있었다.
양반댁에서 좋아할 만한 머슴 종아리 소유자로
하퇴근(下腿筋)과 비장근(誹腸筋)이 잘 발달되었고,
산을 오르내리는 빠른 속도에 매우 흥미를 느끼게
만든 그 사람이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았다.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서거(逝去)한
날이자 내가 검단산에 200번째 올랐던 날,
정상에서 막걸리 장사를 하는 젊은이에게 물어보니
심장마비로 급사(急死)를 했다고 하는데 과유불급
(過猶不急)이었던 모양이다.
< 유홍초(留紅草) >
그 후도 나는 '느림의 미학'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어느 산이든 동행하는 친구들이 답답하게 느낄 정도로
천천히 올랐다가 더 천천히 내려갔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새로운 산에 오를 때는 휴대한
카메라로 특별한 나무나 귀한 야생화를 촬영하면서
산행을 하다보면 늦을 수밖에 없다.
1984년부터 매주 주말마다 동반 산행을 하던 친구들이
십여 명이 넘었는데 지금까지 꾸준히 산행을 하는
친구는 1~2명에 불과하다.
천천히 오르는 게 답답해 산악 마라톤을 즐기던 친구는
무릎이 망가져 최근엔 보행이 불편해졌고,
마라톤 풀코스를 수십 번 완주했고, 100km 울트라
마라톤은 물론 아마추어로 3시간 이내 완주를 해
서브 3까지 기록한 친구는 무릎 연골주사까지 맞고
있지만 정상으로 회복되기가 힘들다고 한다.
사람들은 운동이든 삶이든 각각 저마다의 속도가 있다.
또한 생각의 속도도 서로 다르다.
세상을 살며 빠른 거도 좋겠지만 때로는 느린 거도
좋다.
병역의 의무를 마치고 은행에 들어갔으니 다른 친구들
보다 6년이나 늦게 제대로 된 직장생활을 시작한
셈인가.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2주일 전인 76년 8월 3일 육군
병장으로 만기제대를 했다.
바로 입사시험과 면접을 보았는데 그때 합격한 곳이
대전피혁, 조광피혁과 주택은행 등 3곳이었고 그중
주택은행을 선택하였다.
은행생활 중 1997년 11월 22일부터 IMF 구제금융의
혹독한 시절이 시작되었고,
나보다 먼저 은행에 들어간 친구들 중 상당수가
구조조정이라는 명분으로 명예퇴직을 당해 고생을
했다.
나는 그 와중에 오히려 지점장으로 승진하였고,
십 년 넘게 지점장 생활을 하며 천수를 누리고 정년
퇴직을 하였으니 때로는 늦는 거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06;10
불볕더위는 저만치 사라졌고 공기는 사뭇 신선하다.
시끄럽던 매미 소리가 숲 속에서 사라지자 곳곳에서
귀뚜라미가 울어댄다.
풀숲에서 발을 쿵쿵 굴러 소리를 내자 갈색 귀뚜라미
한 마리가 폴짝폴짝 뛰어 달아난다.
야행성, 잡식성으로 번데기 과정을 거치지 않고
애벌레 단계에서 바로 어른벌레로 탈바꿈을 하는
귀뚜라미는 '불완전변태'를 거친다.
귀뚜라미 암컷은 소리를 내지 못하고,
수컷은 목소리가 아닌 앞날개 한 쌍을 마주 비벼서
'귀뚤귀뚤' 소리를 내는 특이한 곤충이다.
풀숲으로 사라진 귀뚜라미가 암컷을 찾아 부르는
사랑의 노래를 들으며 오늘도 나는 나만의 온전
(穩全)한 속도로 천천히 올랐다가 느리게 내려간다.
2024. 10. 9.
석천 흥만 졸필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느림의 미학 842 소리가 사라지다. (0) | 2024.10.25 |
---|---|
느림의 미학 841 막새바람, 책바람 부는 골목길 (6) | 2024.10.18 |
느림의 미학 838 용담(龍膽)을 꿈꾸다. (2) | 2024.09.29 |
느림의 미학 837 바람, 하늬바람 그리고 휘파람 (2) | 2024.09.21 |
느림의 미학 836 날마다 좋은 날 (0) | 2024.09.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