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24. 04;30
바람이 분다.
목덜미를 파고드는 막새바람이 제법 차다.
산길을 걷는다.
바람길을 걷는다.
산모퉁이를 돌자 바람이 사라졌다.
바람소리 사라지자 서걱서걱 낙엽 밟는 내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이틀간 거세게 내린 비에 '떨켜층'을 겨우 만든
나무들이 제 몸통 혼자 살겠다고 나뭇잎을 마구
뱉어낸다.
채 물들지 않은 단풍잎,
누렇게 마르기 시작하는 산벚나무, 참나무, 산목련,
물오리, 층층나무, 은행나무, 개암나무, 뜰보리수 등
활엽수 떨켜층이 소리 없이 낙엽을 뿌려댄다.
조금 더 오르니 떨켜층이 없는 상록수인 소나무와
사철나무잎도 제법 떨어졌다.
바람과 함께 몰아쳤던 빗줄기에 제대로 내상을 입기도
했겠지만, 해마다 새로 나오는 잎을 위해 1/3씩 묵은
잎을 떨어뜨리라는 자연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
영상 7도까지 떨어진 새벽,
희미하게 따라오던 한 줌의 달그림자는 가로등불
아래에서 사라졌고, 풀벌레 소리도 사라졌다.
매미는 진즉에 사라졌지만 귀뚜라미, 여치는 오래
남아서 11월까지는 가을노래를 할 줄 알았다.
급하게 생긴 개골창에 자리 잡은 개구리도 개골개골
대지 않고 침묵을 지킨다.
청설모, 너구리, 길고양이도 어디론가 사라진 숲 속,
가을이 제대로 자리를 잡기도 전에 소리소문 없이
사라진 풀벌레를 탓할 수야 없겠지만, 너무 이른
시기에 산속의 침묵을 대하려니 기분이 묘하다.
풀벌레들과 벌써 작별할 때가 되었는가,
제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헤어짐은 이별이요,
제 힘으로 갈라서는 헤어짐은 작별이라 했다.
그렇다면 나무와 낙엽, 풀벌레들은 내년을 기약
하는 이별이라 해야겠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산속 어디선가 늙은 까마귀의
능청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오고,
이에 질세라 까치가 다소 경망스러운 목소리로
수다를 떨기 시작한다.
풀벌레들이 일제히 사라진 숲 속의 주인은 새들로
바뀌고 왜가리도 날아가며 '왝~왝♬' 산의 침묵을
깬다.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리고 조금 긴장이 되었다.
새인지 짐승의 신음소리가 들려 호루라기를 꺼내
작게 불었더니 신음소리가 더 커졌다가 이내 잠잠
해졌다.
전에 청설모가 죽은 자리 근처인데, 그 짐승도 수명을
다하고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모양이다.
05;00
새들은 한번 지저귀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다.
이렇게 나 홀로 산길을 호젓하게 걸을 땐 숲의 침묵도
좋은데 오늘은 이 녀석들이 재잘거리며 내 사유(思惟)의
시간을 깨는 게 더좋다.
침묵은 의미 없는 무언(無言), 기만하는 말이 아니고
깊고 단단한 말이라지만 자연에선 소용이 없다.
메마른 기운이 대지를 덮어가고 숲 속의 식생이 점점
말라가며 작은 생명들을 땅속으로 품어간다.
참 스산하다.
만산홍엽을 볼 새도 없이 가을 기운이 사라져 가니
말이다.
맑은대쑥과 거문고 소리를 뜻하는 소슬(蕭瑟) 바람도
막새바람으로 변했다.
가을은 만산홍엽(滿山紅葉)이라는 멋진 말로도 표현
하지만 때로는 가을 찬바람을 오행에서 쇠(金)로
인식해 숙살(肅殺), 소조(蕭條), 소랭(蕭冷)으로 조금
스산하게 표현하기도 하는데 오늘 바람은 숙살이다.
요즘 돌발성 난청에서 해방이 되었고 틈만 나면
인터넷에서 종류별로 이 새 저 새를 찾아 울음소리를
특정한다.
새의 실물은 워낙 빨리 나르고, 특히 어두운 밤에는
모습을 볼 수 없어 목소리로 구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생육성쇠멸(生育盛衰滅)이라는 피할 수 없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 사라진 풀벌레 대신 새소리에 익숙
해지려면 오늘도 한 시간 이상은 새소리를 듣는
연습을 해야겠다.
2024. 10. 24.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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