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느림의 미학 841 막새바람, 책바람 부는 골목길

김흥만 2024. 10. 18. 20:16

2024.  10.  18.  08;00

바람이 차다.

소슬바람인가, 막새바람일까,

북쪽방향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니 막새바람이

맞겠다.

 

천둥소리 들리진 않지만 금세라도 거센비가 쏟아질 듯 

하늘엔 먹구름이 뒤엉켜 드잡이질을 한다.

 

용하게 어디서 책을 구했는지 중3 정도로 보이는 한

여학생이 한강 작가의 소설책을 들고 덕풍중학교 옆

작은 골목길을 지나간다.

 

여기 중학교 골목길에도 책바람이 불었구나.

노벨 문학상의 높은 파도(波濤)는 평범한 중학생까지

휩쓸리게 만들었다.

 

저 여학생은 '채식주의자'라는 책을 끝까지 읽을 것인가.

역대 노벨 문학상을 탄 작가들의 대표작품을 나는

완독을 하였는지 스스로를 뒤돌아본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지금 원로배우

이순재 선생이 주연배우로 연극 공연 중인데 건강

악화로 출연이 전면 취소 되었고,

 

페터 한트케의 '관객모독',

야스나리의 '설국' 외 또 뭐가 있더라,

 

그 밖에도 백 년의 고독, 태고의 시간들, 남아있는 나날,

소리와 분노, 개인적 체험 등 숱한 작품이 있었는데

조금씩 기억을 더듬어본다.

 

데미안, 전쟁과 평화, 고도를 기다리며 등이 조금씩

기억나며 특히 설국의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라는 첫 문장은 지금도 생각나고 여타

(餘他) 작품은 읽을 생각도 안 했다.

 

사실 책을 좋아했어도 노벨상을 탄 작품들은 흥미가

없었고, 주로 밀리터리 소설과 무협지, 탐정소설과 

만화책을 좋아했는데,

 

특히 만화책은 시간표에도 있을 정도로 좋아했고,

아버지와 형들은 통제하지 않고 편히 보게 했다.

 

나는 한강 작가가 누군지 몰랐다.

그의 부친인 한승원 작가도 몰랐다.

책께나 좋아하고 많이 읽었다고 나름대로 생각을

해왔는데 나는 그들을 전혀 몰랐다.

 

당구를 치다가 잠시 검색한 인터넷 뉴스에서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소식을 알고 한참 가슴이 먹먹

했었다.

 

우리나라 작가가 노벨상을 탈 줄이야,

노벨상을 발표할 때만 되면 고은 시인과 황석영,

조정래 작가의 집 앞에서 혹시나 하고 특종을 기대하

기자들의 허탈했을 모습이 상상되며 웃음이 나온다.

 

한강 작가가 노벨상을 타자마자 우리 사회에는 거대한

쓰나미가 몰려왔고 두 갈래로 갈라졌다. 

 

제주 4.3 사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왜곡하여 쓴

소설에 문제가 있다며 소위 '보수꼴통'이라는 사람들의

거친 항의가 이어지는 거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엽전근성인가.

여기저기에서 왜곡되었다는 글을 퍼와 난리를 친다.

 

난 한강 작가가 종북좌파로 역사를 왜곡하였다고 글을

썼다는 '송학'이라는 사람도, 전 아세아신학대학 총장

'고세진'이라는 사람도 모르고 그 사람들의 정체를 알

이유도 없고 관심도 없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새는 법,

심지어는 스웨덴 대사관 앞에서 항의 시위를 하는

사람들의 기사와 사진을 보면서 누워서 제 얼굴에

침 뱉기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   왕고들빼기   >

 

우리동창 단톡방에서도 양분화되어 난리를 치는데

꼭 반대를 해야만 개념 있는 사람이 되는 걸까. 

                          

그런데 우습게도 한강 작가를 응원해 줄 만한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때만 되면 우르르 튀어나오던 종북좌파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경부고속도로 공사를 반대했던 사람들,

인천 국제공항이 지반침하로 가라앉는다며 반대했던

교수와 동조했던 사람들,

전쟁이 난다며 제주 해군기지를 반대한 사람들,

 

미국산 소고기를 먹으면 광우병 걸려서 "뇌 송송

구멍 탁"으로 개념인 코스프레(cospre)를 하며 폼

잡고 선동하던 연예인들,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한다고 일본까지 가서

난리 치던 사람들,

원자력발전소를 없애지 못해 안달을 떨던 사람들,

 

경북 성주에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인 사드(THAAD)

배치되었을 때 전자파에 몸이 튀겨진다고 개난리

치던 사람들,

 

천성산 도롱뇽 사라진다고 단식까지 하던 지율이라는

여승려와 그에게 동조하던 사람들이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이상하리만큼 조용하다.

 

아니면 말고식의 전형적인 엽전근성이 아닌가,

좌와 우를 가르는 그들의 탐욕에서 우리는 언제가

되어야 벗어날 수 있을까.

 

소설은 역사 교과서가 아닌 소설일 뿐이다.

물론 fact에 가깝게 쓰면 좋겠지만 어느 정도 fiction은

인정해 주고, 윤색(潤色) 또한 허용돼야 하지 않을까.

 

진영의 논리, 이해관계, 이상적, 도덕적, 명분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우리 작가가 노벨상을 탔다면 다 같이

축하하고 행복하여야 할 텐데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보며

아쉽기만 하다.

 

책을 어떻게 읽든 읽는 자들의 자유지만,

소설은 다큐도 역사도 아니고 윤색을 한 픽션(fiction)일

뿐이다.

 

허구(虛構)와 편견(偏見)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

아집(我執)으로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역사의식과 제대로 결론이 나지 않은 역사

사실을 강요한다.

 

점점 험악해지는 현실 속에 낯 뜨겁고 점점 가슴이

답답해지며 이럴 때일수록 중용(中庸)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노벨상 수상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 책에서 역사가

왜곡되었고 그 책을 읽은 학생들의 의식이 잘못될까

걱정을 하는데 나는 이 땅의 젊은이와 국민들의

민도를 믿는다.

 

사람들의 편 가르기는 문화의 무지와 야만에 가깝다.

소설의 창작과 역사의 왜곡을 감당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가 점점 그로테스크(grotesque) 해지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이제 K팝, K무비, K드라마, K푸드, K방역은 물론

K방산무기까지 한국의 K 문화(culture)가 되어 

세계가 우리를 동경하고 있다. 

 

심지어는 아이스크림도 K아이스크림이요,

냉동김밥에 이어 떡볶이, 수제비도 K푸드로 이름을

날리고, 초코파이와 라면, 과자는 물론 문학도 K문학

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나는 역사의 왜곡 등 시비사항은 역사에 맡기고,

좌와 우, 지역과 진영의 논리에서 벗어나 진심으로

그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을 축하한다.

 

그러고 보니 노벨 문학상의 대표작품을 제대로 완독

하지 못한 수치심이 슬그머니 생긴다.

황반변성으로 제대로 독서를 하지 못하는 내 눈의

상태로 한강 작가의 책을 완독 할 수 있을지 자신도

없고 책도 사지 않으련다.

 

소설은 작가의 관점에서 쓴 소설일 뿐이다.

나이를 먹었어도 성숙하지 않은 틀딱충 어른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학생들도 편 가르기 할까 우려가 된다.

 

중용(中庸)은 비겁한 게 아니다.

현실도피도 아니다.

이렇게 온 세상이 시끄러울수록 한 발짝 물러나 거리를

두고 관조(觀照)를 하면 세상이 널리 보이는 법.

 

이 골목에도 책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책을 든 여학생이 골목의 소실점(消失點)을 지나

사라졌다.

 

막새바람, 소슬(蕭瑟)바람에 흔들리는 왕고들빼기가

나를 보고 미소 짓는 아침,

상념에서 깨어나 빠른 걸음으로 목적지를 향해 걷기

시작한다.

 

                    2024.  10.  18.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