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20 06;00
여명 속에 난 떠난다.
세상을 뒤돌아보고, 내려다보고 싶어 훌쩍 떠난다.
가장 좋은 여행은 무엇일까?
가장 좋은 여행지는 어디일까?
나는 언제 떠나고,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여행이 좋다.
어디 있는지 어떤 곳인지 모르고 가는 여행이 좋은 거 아닌가?
지갑과 휴대폰은 버리지 못하니, 배낭 깊숙이 넣어 금방 찾을 수 없게 하고 떠나자.
배낭끈에 매달았던 선글라스가 없다.
당황하여 중부고속도로 만남의 광장까지 이용한 콜택시에 연락하니 없다고 한다.
영재의 차를 돌려 사무실에 있는 예비 선글라스를 챙기지만,
어디에 떨어졌지?
벌써 흘리고 다닐 나이가 되었는가?
마음이 방황하는가 보다.
방황의 고통을 예전에 알았지.
먼 훗날 그게 '청춘의 고통'이라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세월이 흐르고 흘러 초로의 나이가 되고 '인생의 아픔'이 되었지.
한 때는 돈 없이 유리걸식하며, 무전여행을 하는 게 나의 로망이었지.
1971년 부산에서 돌아와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학업? 취업? 병역?
3대 문제가 내 정신을 흔들어 놓는다.
내 나이 19세, 경험이라고는 고작 1년 남직한 직장생활인데,
세상에 대해 내가 무엇을 알까?
그래 병역부터 해결하자.
후암동인가? 해병대를 자원했으나 시력이 안 좋아 보기 좋게 낙방한다.
이대로 물러서기엔 너무 약 올라 청주로 내려가 또 해병대에 자원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군대가 마음먹은 대로 안 되니 밀린 공부나 할까?
몇 개월 책을 파니 예비고사를 통과하고, 속칭 명문대의 합격통지서를 받는다.
그러나 시골 7형제 중 셋째인데 과연 축복 받은 합격통지서일까?
내 밑으로 동생들이 줄줄이 네 명이나 되는데 방황을 하다 조용히 꾸겨버린다.
"나 혼자만의 아픔으로 남자, 대신 열심히 돈을 벌자"라고 중얼거리며 방향을 설정한다.
근데 그 아픔이 평생 갈 줄이야.
군대에서도 복무기간이 차별되더니, 주택은행에 들어가도,
처음부터 대졸자보다 5호봉이 아래이다.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이 격차는 줄일 수가 없다.
중간에 야간대학교를 나와도 인정해주지 않는다.
진급이라든지, 보직이라든지 학벌은 평생 족쇄가 되어 가슴에 멍이 든다.
따라서 학벌의 멍에에 갈등과 방황을 하며, 2년간은 '사직서'를 주머니에 넣어
다니다 결혼을 하며 안정을 찾는다.
학벌의 멍에는 지금도 계속된다.
지금 사는 아파트의 주민회장과 동 대표 선출 시에 모든 신상이 또 까발린다.
봉사정신과 관계없이 명문대 출신을 뽑는다.
웃을 수도, 울을 수도 없다.
재미난 나라이다.
능력에 관계없이 S대 출신은 큰 하자만 없으면 기본은 임원이고, 그 이상까지 올라가지만
기타 학교나 학력자는 어림도 없는 세상이다.
이젠 모든 걸 내려놓고 방황하는 거도 후반기 인생에 좋은 여행길이 되겠지.
11;00
지금 남쪽으로 내려가면 올망졸망 키 작은 봄꽃들이 나를 반길까?
꼬물꼬물 새싹이 나오고 있을까?
엊그제 객산의 중턱에는 냉이가 많이 나왔던데,
우리나라 '산수유나무의 시조목(始祖木)'을 만난다.
천 년 전 중국 산동성(山東省)에서 가져와,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심은 산수유나무 시조로
'산수유시목(山茱萸始木)'이라고 한다.
달천마을의 할아버지 나무와 더불어 이 나무는 '할머니 나무'로 불리며 여기에서 전국으로
산수유가 보급되었는데 지명도 산동(山洞)이라 중국과 같다.
열매는 신장 계통에 특효가 있다고 한다.
난 자유다!
이번 여행길에서 난 진정한 열반을 할 수 있을까?
해탈을 할 수 있을까?
지금 어디선가 복수초, 노루귀, 현호색 등이 연하디 연한 새순으로 올라오겠지.
어제부터 꽃샘추위가 왔다.
서울이 영하 2도, 대관령은 영하 16도라나?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이기고 피어 난 꽃들이 갑작스럽게 영하로 떨어지는 기온에
피해를 입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그래도 오롯이 봄 숲을 차지하고파 천천히 봄 햇살을 누리고자 노력하겠지.
피해를 보면 옆에 있던 줄기들이 새순을 새롭게 터뜨리려 하겠지.
뜰 앞의 목련도 꽃봉오리가 터질듯 마냥 부풀더니 숨을 죽였다.
지난겨울의 흔적을 다 버리고 새봄을 맞이하다 추위가 닥치니 당황했나 보다.
이제는 조심스럽게 겨울과 작별을 해야겠지.
또 작별해야 봄이 은밀하게 천천히 다가오겠지.
산동마을의 산수유는 아직 겨울잠에 취했다.
나는 꽃이 필 때도 좋지만,
꽃이 지며 떨어져 땅바닥에 구르면 더 아름답고 향기를 느끼는 묘한 취미를 가졌다.
떨어지지 않으면 꽃이 아니지.
피어 적당히 일생을 보내고, 바람이 불면 노란 꽃잎을 떨어뜨리며,
하늘과 나무와 땅의 경계를 적당히 허물어뜨리는 산수유가 보고 싶고,
길바닥에 떨어진 꽃잎들이 스쳐 지나는 바람에 솟구치며 꽃 회오리를 치는 풍경이 보고 싶다.
지리산 만복대(1438m), 고리봉1248m), 노고단(1507m)이 이어져 있다.
마을로 내려오니 아지랑이가 하늘로 올라가며 애교를 떤다.
오늘 아침까지 맹위를 떨치던 겨울은 슬그머니 온 듯이 가고, 봄은 간 듯이 오고 있으니,
계절의 순환은 자연의 일상이 되었다.
봄비가 이틀간 길게 내렸다.
얼음아래 숨죽이며 겨우 흐르던 도랑물과 합쳐진 골짜기의 물소리가 제법 크게 졸졸거린다.
허리를 숙여 잠시 계곡물에 손을 담근다.
겨우내 추위를 견딘 산 아래 '산수유'가 노란 꽃을 활짝 터트린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마음의 빗장을 열고, 산으로 마음은 달려만간다.
동구 밖 트인 들판으로 눈길을 던지고 몸으로 걸으니,
저만치 봄의 들녘과 계곡에 걸친 소나무는 푸른빛이 나돈다.
[ 봄나들이
봄 냄새에 취하여
봄 소리를 들으며
봄빛에 눈이 부셔 슬쩍 눈을 감는다.
봄의 기운으로 온몸을 흔들어 볼까?
화사함으로 만난 봄에
아이의 순수한 마음으로
봄나들이를 가보자. 석천 흥만 ]
동네 한가운데에 중부지방에서 별로 보지 못하는 '참죽나무'가 하늘을 찌르고 서 있다.
'가죽나무'와는 다르고, 둘다 대나무같이 순을 먹는다 해서 대나무 죽(竹)자가 붙었는데,
가죽나무는 소태나무과로서 맛과 냄새가 지독해 뿌리와 껍질은 한약재로 쓰지만 순은
먹기가 고약스럽다.
그러나 여기 참죽은 4월에 빨간 순을 따서 무침, 짱아치, 부각 등을 만들어 먹으며,
수피는 소나무와 비슷하고 가구재로 많이 쓰인다.
12;00
소란스런 '화개장터'로 들어선다.
고즈넉한 시골장터로만 생각했는데, 온갖 음악소리와 호객하는 소리가 불협화음을 만들며
시끄러운 분위기에 기분이 역겨워진다.
막걸리 한잔에 전통음식을 즐기고 토산품을 사려한 내가 우매한 걸까?
국적불명의 공예품, 출처를 모르는 온갖 한약재가 범벅이 되어 시장을 뒤흔든다.
경상남도와 전라남도를 이어주는 오일장으로 옛날 해방 전에는 우리나라 5대 시장 중
하나였다고 한다.
장이 서면 지리산 화전민들은 더덕, 감자, 고사리, 대봉, 약초 등을 가져와 팔고,
전라도 구례, 경상도 함양 등 내륙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쌀과 보리를 팔았다.
전국을 떠도는 보부상들은 생활용품을 가져오고,
여수, 광양, 남해. 삼천포, 충무, 거제 등에서는 해산물을 가져와 이곳 화개장터에서
팔았다는데 지금은 매일장이다.
가수 '조영남'이 부른 노래 '화개장터'가 히트하면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2012. 3. 20 13;00
섬진강 매화마을로 들어선다.
평일인데도 몰려드는 인파에 이리저리 치인다.
매화꽃잎 날리는 섬진강 자락의 봄날 모습을 기대하였지만,
겨우 피기 시작하는 '홍매'에 카메라를 대면서도 시끄러운 유원지 분위기로 변한
매화마을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
술 취한 세 마귀할멈이 지나는 여행객은 아랑곳하지 않고, 악을 쓰고 노래를 하며 주접을 떠는
모습을 내려다보며,
이곳을 백 년 넘게 지켜 온 고매 '율산매'는 무슨 생각을 할까?
소란과 소음에 얼이 빠져 매화꽃을 피울 시기를 놓쳤는가보다.
뒤따라 오는 사람의 라디오 소리가 요란해 잠시 비켜서서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휴!
산에서도 헤비메탈의 강렬한 악기 소리라니,
저 혼자나 듣지 순간 짜증이 난다.
살다보면 온갖 소리공해에 찌들려 산다.
'전철연'의 고성능 장송곡에 일 년 가까이 시달렸는데, 시위가 끝나자마자
1층에 휴대폰가게가 들어오며, 풍선으로 만든 아치 아래에서 팬티가 보일 듯 말듯
짧은 치마를 엉덩이에 걸친 여자가 대형앰프의 음악에 맞춰 온종일 춤을 추며 시끄럽게 하니
사무실이 8층이래도 폭력적인 소음공해에 종일 시달린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어서면 불법 노점상들이 트럭에서 음악을 틀어놓고 시끄럽게 하더니,
고속도로와 타협이 되었는지, 언제부터인가 화장실 입구나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를
꿰차고 요란한 음악을 내 보낸다.
트럭이든 점포이건 시끄러움은 달라진 게 없다.
옆에 지나가는 관광버스가 흔들려 자세히 보니 버스 가운데에서 아줌마들이 흔들며
요란스럽게 춤을 춘다.
저러고도 사고가 나지 않으면 기적일 수밖에,
삼천포에서 남해섬을 도는 유람선을 타니 역시나 시끄러운 음악과 춤을 추는 난장판이요,
단양에서 충주호 유람선을 타니 호수에 빠진 아름다운 풍광에 취하는 것이 아니라,
노래자랑 등 악을 쓰는 노랫소리에 질려 아예 귀를 막는다.
전철, 버스에서의 휴대폰 통화소음에 시달리다 이곳 산길에서 또 라디오 소리에 귀가
시달리니 몹시 괴롭다.
흡사 싫어하는 담배연기를 마시듯 짜증이 난다.
야생조수 보호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어 산에서 "야호" 소리나 음악 등을 규제한지
꽤나 오래되었는데 아직도 이를 모르는 무지한 사람들이 많다.
우리 모두는 조용한 숲 속에서 대자연을 감상하고 즐길 권리기 있다.
또한 나는 산속에서 음악을 듣지 않을 권리가 있다.
무지한 사람들이여 제발 나좀 살려다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취화선'의 배경이 되었던 왕대나무숲이 나온다.
몇 년이나 컸을까 빼곡히 들어선 대나무 숲엔 내가 끼어들 틈이 없다.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의 200여km를 넘나드는 섬진강엔 매화꽃을 찾아 사람은 붐비지만
정작 매화꽃은 산 속으로 숨었나, 강 속으로 숨었나?
은빛 모래 반짝이는 섬진강 물결만 동화 속으로 흐른다.
3월이면 매화 떼가 구름처럼 피어나고, 길 양편으로 벚꽃이 끝 간 데 없이 이어지며,
꽃보다 많은 인파와 차들로 인해 소란스럽기 그지없었는데,
오늘은 꽃이 온다는 소식과 첨병만 보내고, 사람과 차들 만 요란스럽다.
2012. 3. 20. 15;00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 조선시대의 낙안읍성으로 들어간다.
1983년 사적으로 지정된 낙안읍성은 총길이 1,420m, 높이 4m, 너비 3~4m의 네모형
석성으로 1~2m크기의 정사각형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았다.
1397년 태조 6년 낙안출신 의병장 김빈길이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토성으로 쌓았다가
그 후 인조 4년(1626~1628) 임경업 장군이 낙안군수로 재직 시 하룻밤에 석성을 쌓았다는
전설의 성이다.
대표적 읍성으로는 낙안읍성, 고창읍성, 해미읍성이 있는데, 산이나 절벽을 끼지 않고
평야지대에 돌출되게 쌓은 낙안읍성이 이채롭다.
세 마리의 삽살개가 꼬리를 치켜세우고 익살스런 표정으로 동문 '평석교 '앞에 수호신이 되어
서 있다.
서울도 해태이고 개를 수호신으로 삼은 곳은 드물다.
동편제의 거장 국창 송만갑 선생, 가야금 병창 중시조 오태석 명인이 자란 곳이기도 하다.
동헌(東軒)의 뒤로 '금전산'이 위엄 있게 서 있다.
여기도 하늘~산~건물~권력의 구도가 되는 셈인가?
서울의 경복궁이나 청와대 뒤로는 북악산, 삼각산이 있지.
사무당(使無堂)은 조선왕조 때 지방관청으로 감사, 병사, 수사, 수령 등이 지방행정과 송사를
다루던 곳으로 동쪽은 수령이, 서쪽은 관리들이 사용하였다고 한다.
120세대 중 옛 모습 그대로 108세대 200여 명이 실제로 생활하고 있어 들어가 본다.
허준, 대장금, 상도, 용의 눈물, 태조 왕건 등 드라마, 영화촬영지의 명소이기도 하다.
오늘 일정은 미련했나?
굳이 매화축제를 보러온 게 아닌데,
산동의 산수유, 화개의 벚꽃, 광양의 매화꽃은 붐비는 사람들을 피해, 나를 피해 더 깊은
산속으로, 강물 속으로 피신했다.
이제 축제가 끝나면 사람들의 소란과 요란 속에 귀와 눈을 막았던 꽃들이 온몸을 던지며
아름다움을 보여주겠지.
취사도구도 없고, 거실에 난방도 되지 않는 '백운산 자연휴양림' 숙소에서
죄 없는 직원을 혼냈지만 심사가 뒤틀린다.
어차피 인생길은 건망증이 수반된 방황인데,
여행길에서 열반과 해탈은커녕 사소한 일로 작은 번뇌만 쌓인다.
2012. 3. 20. 백운산 휴양림에서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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