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4. 18 06;00
새벽 어스름 속
뜰 앞에 활짝 핀 백목련의 하얀 꽃잎이 한줄기 바람에 꽃비가 되어 떨어진다.
동녘 하늘가에 그믐달이 실금을 그린다.
밤의 세상을 환하게 비춰주던 보름달이 어느새 그믐달로 변하였구나.
지긋지긋하던 국회의원 선거도 지나갔다.
연년세세화상사(年年歲歲花相似)~꽃은 해마다 그 꽃이 피어야 자연의 섭리인데,
세세년년인부동(歲歲年年人不同)~해가 지나도 사람들은 왜 그 모양인지,
시끄러운 건 변하지 않고 사람다운 사람 만나기는 점점 힘들어진다.
선거 이틀 전 길이 많이 막힌다.
길거리에서 국회의원 출마자가 저 혼자 애국자인 양 정권심판을 하겠다고 열변을 토한다.
돈 처먹고 구속되었다가 얼마 전 겨우 사면된 자인데 재주가 좋아 공천을 받았나 보다.
당선자 면면을 보니 위장전입, 병역기피, 전과자, 세금도 못 내는 무능력자가 다수이고,
돈 받아 처먹고 구속되었던 사람들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또한 사리사욕과 당리당략에 의해 국가와 민족을 배신하던 사람들이 부지기수이니
할 말이 없다.
구밀복검(口蜜腹劍)하는 자들이라,
속으로는 국민과 상대방을 몰아 칠 흉측한 생각을 품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국가와
국민들을 위하여 충성을 다 하겠다고 부드럽고 달콤한 거짓말을 한다.
하긴 삼인성호(三人成虎)라 거짓말도 여럿이 여러 번 하게 되면 믿게 되니 국민들은
그 거짓말에 또 넘어간다.
08;20
전날 평창 두타산휴양림으로 확인전화를 하니 산불방지 입산금지기간이라고 하여
당초 3월 산행지로 계획하였던 홍성 '오서산'으로 변경을 한다.
스치는 이정표가 재미있다.
'염치읍'도 보이고 '청소면'도 보이니 이곳 사람들은 청소를 염치없이 안 하는가?
아님 청소를 잘하니 염치가 있는 걸까.
지난 달 추위 속에 매화를 찾아 나서는 탐매(探梅)를 하였으나 제대로 보지 못하였으니
이번 산행 길에서 고고한 매화는 못 보더라도 다른 꽃을 보는 탐화(探花)는 가능할까,
산 벚꽃이 흩날리며 꽃비를 보여줄까?
큰길에서 15km 진입로의 거무튀튀한 벚꽃나무 가지엔 꽃망울만 잔뜩 부풀려 있다.
마른 가지에 연분홍 꽃이 만개한 꽃구름을 기대한 나의 꿈은 기대로만 끝날 모양이다.
아직도 겨울 꿈을 꾸는 고목의 굵은 가지가 약간은 원망스럽다.
09;20
졸음이 가시지 않은 숲 속이 천천히 기지개를 켠다.
키 큰 참나무, 서어나무 등 활엽수림이 숲을 이룬다.
서울근교보다 봄은 훨씬 늦게 오는지 연둣빛이 보이질 않는다.
명대계곡을 20여 분 오르니 조그만 폭포의 물소리가 제법 요란하다.
폭포에서 쏟아져 내린 계류의 맑은 물은 옥류이다.
물을 내려다 보니 물에 비친 내 모습이 흔들린다.
흐르고 흘러 낮은 곳으로 흐르고 이 물은 어디로 흘러갈까.
누가 슬피 울어 명대(鳴臺)계곡인지,
오늘 따라 종달새 울음소리가 구슬프게 들린다.
무엇이 슬플까, 구슬픈 피리소리가 들리는 듯 하니 말이다.
엷은 산안개가 흐른다.
계곡의 거대한 노송들은 그대로인데 국수나무, 층층나무는 연둣빛을 띠기 시작한다.
태양이 능선 위로 떠오르니 산그늘이 없어진다.
구름이 능선 위를 일렁이고 산봉우리는 더 뚜렷해진다.
엊그제 가까운 친구가 "허구한 날 산에만 가면 밥이 나오냐 쌀이 나오냐" 하며 애정 어린
잔소리를 하길래 난 '술'이 나온다고 대꾸를 한다.
산엘 왜 갈까?
세속에서 일상이란 소음의 연속이다.
온갖 매스컴에서 나오는 소리 중 좋은 것은 별로 없고, 나쁘고 문제되는 것을 걸르지 않고
내 보내니 눈과 귀가 피곤하고 머리가 아프다.
국민의 알 권리라나?
따라서 난 소음과 거짓말 공해를 피해 산으로 간다.
산에 미친 거는 아니다.
몸 건강을 다지기 위해서의 뜻도 있지만 기실 산 아니면 마땅히 갈 곳도 없어 산으로 간다.
별반 갈 곳이 없어 산을 찾지만 산에 들어서면 나무들의 부동자세, 산의 향기, 바위들의
의연한 모습,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스쳐 지나는 바람의 숨결이 좋아서이다.
산에 이르러 숲 속에 들어서면 뒤틀린 심사가 평온해지며, 마음이 고요한 상태를 회복하니
오늘도 배낭을 짊어지고 또 오른다.
늘어져 있던 겨울의 긴 그림자가 아직도 남아있는 오서산.
처음부터 제법 된비알이다.
제법 큰 대나무가 무리지어 군락을 이루고 한줄기 스치는 바람에 '쏴아' 하는 소리를 낸다.
이 큰 산에 우리 6명뿐,
너무도 조용하고 평화스런 풍경에 말소리마저 조심스러워진다
산길가 작은 암자인 월정사(月精寺)에 인적이 없다.
강아지 한 마리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일하다가 중지한 텃밭만 어지럽다.
산속의 게으름을 즐기는 걸까?
계곡 길을 벗어나 월정사를 지나니 산길은 제법 넓어진다.
지나는 길가에 씀바귀와 냉이가 파랗게 올라온다.
땅은 얼음이 풀리면서 서서히 젖어드는데 지나는 바람에 뒷머리는 서늘하다.
숲속에 한줄기 바람이 몰아치더니 안개구름을 몰고 산등성이로 달려간다.
봉우리가 구름 속에 잠시 감춰졌다가 다시 나타난다.
진달래 꽃망울이 잔뜩 부풀어지고 '쭈우비~'하며 동박새가 부푼 봄 꿈을 노래한다.
충청도 산답지 않게 능선은 유장하고 계곡은 깊다.
언제나 봄이 오려는지 계곡의 나무와 숲은 아직도 겨울 속에 침묵 중이다.
내면에선 혼신의 힘을 다하여 물을 빨아들이고 봄을 맞을 채비를 할까?
1km를 올라와 임도 사거리에 도착한다.
안내판에서 정상까지 1km에 50여 분 걸린다고 하니 제법 가파른 모양이다.
계곡을 지나 능선 위로 올라서니 지난 가을의 낙엽이 그대로이다.
겨울이 지나 봄이 오는 길목에서 낙엽을 밟는 감촉이 부드럽다.
사각 사각대는 소리에 겨울잠에서 깬 풀벌레가 놀랄까 조심스러워진다.
아직도 얼굴을 스치는 산바람은 차다.
유난히도 춥고 길었던 겨울과의 긴 이별이 아쉬운 모양이다.
구름이 옅어지더니 하늘이 열리며 정상이 살짝 보인다.
바위와 낙엽사이를 뚫고 노랑제비꽃이 환한 미소를 보내고,
잿빛의 거친 속살을 연한 풀과 꽃들이 채워간다.
흘러가는 구름 사이로 우중충한 하늘이 벗겨지며 파랗게 높아진다.
하늘에선 새들이 지저귀고, 넓어진 공간만큼 마음도 허전해진다.
꽃샘추위도 지나갔는데 산 중턱은 아직도 겨울의 꿈을 꾸고 있다.
된비알을 올라서 세상을 내려다 보며 내 안의 행복을 느낀다.
봄바람이 능선을 넘나들고,
나는 오서산 맑은 숲 속의 깨끗한 공기를 마음껏 마신다.
저 햇살은 겨울을 태울까?
겨울잠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잠꾸러기 나무들을 깨울까?
거대한 빛의 언덕에 서 있는 나무도 숲도 꽃도~겨울을 태워라.
내가 어디쯤 왔을까?
정상이 나를 굽어본다.
정상은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봄바람이 얼굴에 와 닿는다.
40여 분 오르니 계단 옆에 거대한 병풍절벽이 서 있다.
하늘은 푸르고 숲속의 소리가 나를 깊은 사색으로 이끈다.
진달래의 꽃봉우리가 터질듯 부풀었다.
오래된 덩굴이 바위와 한 몸이 되어 뒹군다.
지상의 세계를 내려다보니 시간의 무게가 나를 누른다.
저 아래 산촌에서 만나는 소박한 시간들과 산 위에 선 여행자의 마음이 같을까?
행복의 정의는 무엇일까.
자연에서 아름다운 풍광에 취하면 그게 행복이고 만족이 아닐까?
'청천저수지'인지 '성연저수지'인지 너머 천수만의 해무가 수평선과 하늘금의 경계를
없애버리고 아기자기한 풍경이 펼쳐진다.
지난 가을 황금빛으로 물들었던 억새풀 사이로 정상이 가물거린다.
이 억새풀은 가을바람에 휘날리며 얼마나 멋진 춤사위를 연출했을까.
해뜰 무렵의 무애(霧崖) 속에 떠오르는 태양빛을 받아 신비로움을 연출했을까.
해질녘 붉은 바다를 향해 군무를 췄을까.
석양에 물든 억새의 아름다움을 상상해본다.
[ 구름 같은 인생길
그리움을 다하여 붙잡고 싶은 이순간도
인생길은 흐르고
구름 같은 인생길 가던 길에
잠시 멈춰 뒤돌아보니 꽤나 많이 걸어왔네.
산허리에는 안개 띠가 걸리고
갈 길을 알 수 없는 인생길에
어디까지 가야 할까.
이대로 가야 할까.
아!
숨이 막힌다.
이것이 인생일까.
결코 초라한 모습을 보이기 싫은데.
어디로 가야 하나.
어떻게 가야 하나.
어디까지 가야 하나.
산이 불러서 왔건만
구름낀 인생길이 되려나
그저 그리움만으로 채우기엔
너무 서러운 인생길인가 보다 . 석천 ]
정상이 저 앞에 보인다.
'오서산'은 금강의 분수령인 금북정맥의 최고봉이라는데,
높이는 790여m 정도이지만 주변에 큰 산들이 없어 유난히 덩치가 커 보인다.
까마귀 세 마리가 어디선가 날아 오르더니 "까악~까악"하며 울어댄다.
까마귀와 까치가 많이 사는 산이라 오서산(烏捿山)인가.
서해바다의 길잡이가 되어 서해의 등대라 불리었다는데, 누군가는 서해바다의 '외연도'쪽에서
바라보면 검게 보여서 '오서산'이라고도 한다.
암튼 기암괴석과 적당히 어우러진 산세와 꿈틀거리며 굽이치는 능선은 푸근하고 친근하게
다가오는 명산이다.
10;40
지상보다 천상이 더 가까운 오서산(790.7m) 정상이다.
겸손해지자.
[ 오서산 정상에서
어느새 이리 높이 올랐던가.
숨 가쁘게 오르던 산행 길도 오르다 보면
내리막길도 나오고,
금방이라도 죽을 듯이 통증을 느끼던 몸도
조금 지나니 살만해진다.
어제도 오늘도
그냥 이렇게 흘러가듯이 사는 게 인생일까.
비릿한 바닷바람에 시든 억새는
스치는 바람에 너울져 춤춘다. 석천 ]
봄의 햇살이 숲 속을 파고들고, 나는 능선으로 그냥 조용히 걷는다.
때를 맞추진 못하였지만,
까마귀의 보금자리인 오서산 능선 길 2km에 33,000㎡의 억새평원이 펼쳐진다.
분명 석양의 황금빛을 받은 이곳 억새들이 벌리는 춤의 향연은 한 폭의 수채화를
그려낼 것이다.
산과 들에 진달래가 피어야 하는 계절.
숲속은 침묵 속에 있고, 오서산은 아직 봄의 초대장을 보내지 않은 모양이다.
보령, 대천, 서산의 해안풍경이 해무 속에 감춰지고,
성주산(680.3m)과 만수산(432.2m)으로 산줄기가 희미하게 이어져 있다.
칠갑산과 안면도도 해무 속에 모습을 감췄으니 아무리 서해안 최고의 조망대라 하여도
날을 잘못 잡았나 보다.
마치 솜씨가 있는 장인이 다듬은 듯이 묘하게 파진 돌은 변기와 같은 모습이다.
태양이 내 눈 높이로 솟아오르니 산봉우리가 환하게 빛이 난다.
산릉은 기지개를 켜고 꿈틀거린다.
이곳에도 봄은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는지 생강나무 한 그루가 활짝 피었다.
12;30
노랑제비꽃이 몰아치던 북풍한설에 부대껴 닫혔던 가슴을 열고 산속 이곳저곳 흐드러지게
피었다.
수억 겁 년의 세월의 시간이 내려앉은 바위아래 흰제비꽃도 피었고,
참나무 숲에 넓은 풀밭이 펼쳐진다.
복수초, 노루귀가 있을까 두리번거리지만 은련화(銀蓮花)라 불리는 '꿩의 바람꽃'만 보인다.
오서산에서 노랑제비꽃만 보다 흰색 꽃을 보니 더 반갑다.
여러해살이풀이며 독성이 있다고 알려졌다.
돌단풍도 만난다.
'돌나리' '부처손'이라고도 하며 설악산 비선대 계곡에서 만난 이후 오랫만이다.
다른 곳에서는 5월에 피는데 여러해살이풀이다.
세 시간도 안걸리는 4km의 짧은 산행거리의 아쉬움을 내일 '덕숭산(德崇山)'에서
풀어볼까.
18;00
고2 때 헤어진 후 44년 만에 만난 '김익수'동창이 낯설지 않으니 학연은 평생의 인연이
되는가 보다.
대천으로 내려와 수협에 근무하였다고 한다.
22;00
한잔 술에 취한 밤중
휴양림 방에 누워 언 땅이 풀리는 소리를 듣는다.
눈 녹은 명대계곡에 물 흐르는 소리,
새싹들이 땅을 밀고 올라오는 소리가 조곤조곤 들린다.
내일 오를 '덕숭산(德崇山)'에도 새싹들이 나올까?
2012. 4. 18, 오서산 자연휴양림에서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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