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느림의 미학 270 피안의 세계와 차안의 세계가 공존하는 <창녕 우포늪>

김흥만 2017. 3. 26. 15:31

2014.  11.  21.  06;00

세상은 어둠에 잠기고 깊어만 가는 가을 새벽하늘엔 그믐달이 실낫을 그린다.

잠시 후면 여명의 빨간빛이 엄숙해지겠지.

 

07;55

인간은 두 번 태어나는데,

한 번은 어머니 자궁에서, 또 한 번은 여행길 위에서 태어난다고 한다.

 

진부한 삶에서 탈출하려고 훌쩍 떠나 도착한 곳.

짙은 안개 속에 우포늪이 드러난다.

 

오늘은 진부하고 메마른 일상에서 벗어나 인생의 쉼표가 아닌, 낯선 곳에서 나의 발자국을

찍어보고 싶다.

 

날씨는 어제와 오늘이 비슷하다.

바람이 잠잠한데도 늪의 갈대가 사각대니 내 마음도 흔들린다.

 

가을의 끝자락에서 불던 소슬바람은 물러나고 본격적인 된바람이 오려나,

햇볕도 물리치는 바람에 귀가 시려 벙거지로 모자를 바꿔 써야 할지 망설여진다.

 

등 뒤에 짊어진 배낭도 던지고 싶다.

거추장스런 모든 짐을 벗고 그냥 알몸이 되어 우포늪을 걷고 싶다.

숨 쉬는 것만으로도 늪의 맑은 기운이 몸 안에 가득 들어와 넘친다.

 

가을이 나를 이미 배웅했는지 손도 시리기 시작해 겨울용 장갑으로 바꿔 낀다.

마음의 통증을 참으면 병이 되고, 몸의 통증도 참으면 병이 된다니 미리 따뜻하게 복장을

갖추는 게 나한테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수 천 수 만의 새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른다.


인기척에 놀랐는지 아침잠에서 깬 새들이 여기저기서 푸드득 거리며 안개 속 하늘을 뚫고

비상(飛翔)을 한다.

 

창녕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늪이 있으며, 그 중 우포늪은 한국 최대의 늪지로

옆에 있는 목포까지 합쳐 약 55만 평에 이른다고 한다.

토평천 상류의 퇴적물이 자연제방의 형태로 쌓이고, 낙동강의 하상이 높아져 토평천의

물이 제대로 빠져 나가지 못하여 거대한 늪지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홍수 때는 토평천 일대의 물이 흘러들고 낙동강 물이 역류하며, 수위가 무려

5~6m 가 높아지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거대한 호수로 변하기도 한다.

 

안내장에는

우포, 목포, 사지포, 쪽지벌을 총칭하여 습지보호지역으로 약 8.547㎢(약 261만 평),

천연보호구역으로 약 3,438㎢(약 104만 평), 우포늪이 물을 담고 있는 습지면적은

약 2,313㎢(약 70만 평)으로 나와 있으니 면적은 어느 것이 맞는지 나도 모르겠다.

 

처음 대하는 거대한 우포늪은

수많은 동, 식물에게 생존처와 휴식처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으니 더욱 신비스럽게 보인다.

 

늪(습지)이란 무엇일까?

습지란 물에 젖어 있는 땅,

물이 주변의 자연환경과 더불어 살아가는 동,식물의 생태를 조절하는 역할을 하는 곳으로

'물'도 아니고 뭍(땅)도 아닌 지역을 말한다.

 

람사르(Ramsar)협약의 습지조건은 자연적이든, 일시적이든 물이 고여 있던지,

흘러가든지, 민물과 짠물을 가리지 않고 물이 완전히 빠졌을 때 물의 깊이가 6m이하인

지역이라고 한다.

  

내 고향 진천에도 '덕문이 방죽(東湖)'이라는 꽤 큰 습지가 있었는데, 몇 해 전 찾아가니

씻은 듯이 흔적이 없고 그 자리엔 공장이 들어 서 있다.

최근에는 이곳도 개발논리에 밀려 일부 생태계의 파괴가 진행되고 있다니 걱정이 된다.

 

08;20

물이 흐르다 고이는 오랜 과정을 통하여 다양한 생명체를 키우는 생태계의 보고인

우포늪은 생성된 지 1억 4천만 년이나 되었다는데,

그 신비스런 모습이 걷히는 안개 속에 서서히 드러난다.

 

철새 날아오르자 늪의 고요(孤寥)가 깨진다.

낙엽 깔린 호젓한 숲은 아니지만 수양버들과 왕버들, 팥배나무에는 가을이 데려온

붉은 단풍이 내려앉고, 솜털이 자란 억새와 갈대가 차가운 물빛에 가라앉았다.

 

물은 무채색인데 인기척에 놀란 청둥오리가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우포늪은 1998년 3월 국제 람사르협약(Ramsar Convention)에 우리나라 1호로 등록 되었고,

1999년 2월엔 환경부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되었으며, 2011년 1월에는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엄격하게 보호를 받고 있다. 

 

모래가 많이 있다는 '모래벌(사지포늪)'에 큰기러기, 큰고니, 청둥오리, 쇠기러기들이

일제히 합창을 한다.

아마도 우리가 가까이 오는 걸 원하지 않나 보다. 

 

청머리오리, 노랑부리저어새, 논병아리, 재두루미도 있다는데 가까이 접근 할 수가 없어

확인을 하지 못하기에 날아오를 때만 기다리지만 언제 나를지 알 수가 없어 발길을 돌린다.

 

09;10

소벌(우포늪)을 지나 나무벌(목포늪)과 경계선인 숲탐방로 3길로 접어든다.

소벌은 부근의 지세가 소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소목마을 뒷편의 우항산(牛項山)은 소의

목 부분에 해당하는 위치이기에 얻은 명칭이며,

 

나무벌(목포늪)은 나무벌을 둘러싼 장재마을, 노동마을, 토평마을 일대에 소나무가 많아

한국전쟁 전에는 배를 타고 건너가 땔감으로 쓸 나무를 가져오던 곳이어서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정토(淨土)인가?

피안(彼岸)의 세계와 차안(此岸)의 세계가 공존하는 언덕을 바라본다.

 

늪의 물답지 않게 맑은 명경지수(明鏡止水)에 비치는 왕버들의 반영(反影)은 신비롭다.

물에 내 몸을 비추면 세속에 찌든 내 마음까지 비춰주려나?

 

갑자기 나타난 숲 속에서 도토리는 톡톡 떨어지고 밤송이는 딱딱거리며 벌어진다.

늪이라는 특수한 평야지대에서 나타난 산길은 제법 흥미를 끌지만 사방을 둘러봐도

가을꽃 한 송이 보이지 않고 낙엽만 차곡차곡 쌓인다. 

 

가끔 이런 산길을 걸을 때는 남 다른 감상(感想)에 젖어들기도 하는데,

지나간 일에 대한 그리움 보다는 다가올 거에 대한 두려움에 흔들리는지

요즘에는 삶의 의미를 별로 느끼지도 못하고 산길을 터벅터벅 걷는다.

 

              <       가을이 슬그머니 가려 한다

 

                    세상을 다 태울 듯 교만하게

                    이글거리던 여름의 태양과

                    눈부시게 높기만 했던

                    시월의 하늘이 지나더니

                    가을이 슬그머니 가려 한다.                   

 

                    첫 단풍 소식이 엊그제였는데

                    이파리는 누렇게 변해 낙엽이 되었고,

                    흰머리 휘날리는 억새꽃만 남아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을 친다.

 

                    가을은 이렇게 어느 날 문득 왔다가

                    쏜살같이 달아나야 제대로 된 가을인가?

                    야속해 달력을 들춰보니

                    어느새 입동(入冬)이 지나고

                    소설(小雪)인데 나만 몰랐구나.                                    석천   >

 

마을 어귀에서 만난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쫓아온다.

견종이 불독인가 참 억울하게 생겼지만 심성은 착해 보인다.

 

전체를 다 돌려면 트래킹 코스가 약 22km나 되기에 징검다리를 건너 8.4km로 단축시킨다.

내 개의 늪 중에서 규모가 가장 작기 때문에 '쪽지벌'이라는 늪을 지나 생태관으로 향한다.

 

10;20

왜가리가 조용히 물속을 응시한다.

고독을 즐기는지 아님 사냥준비가 되었는지 잔뜩 긴장된 자세로 움직이질 않는다.

 

갑자기 청장도하(靑莊淘荷)란 고사성어가 생각난다.

백로의 일종인 해오라기(청장 靑莊)는 한가하면서도 굶주리지 않지만,

펠리컨 종류인 사다새(도하 淘荷)는 온종일 먹이를 찾아도 몸만 더럽히고 굶주릴 때가 많다.

 

왜 그럴까?

우리나라 국회의원과 비슷한 '도하'는 욕심이 많아 이곳저곳을 헤매지만 정작 물고기

한 마리 잡기가 어렵다.

반면 '해오라기'는 욕심을 버리고 편안히 있으면 먹이가 저절로 찾아오고,

조금만 가지고도 만족하는 마음이라 하니 대자연에서 사람들이 배워야 할 또 하나의

덕목(德目)이다

 

요즘 삼성과 한화의 대규모 빅딜이 화제다.

서로가 '선택과 집중'이라는 이해가 맞아 성사가 되었다는데,

지금 조용히 서 있는 왜가리 역시 한군데에 집중을 하며 생존을 유지한다.



안개 걷힌 가을하늘은 티 없이 맑고 높다.

안개 속에 숨었던, 여름의 녹색에 감춰졌던 비경이 나타난다.

아무에게도 자신을 들어내고 싶지 않은 비경은 고독의 진경인가?

 

자신의 세계를 진경산수화로 드러내는 거대한 절벽에서 나타난 유일한 생명체인

쑥부쟁이를 찍으려 네 발로 기어오른다. 

 

깎아지른 절벽에서 만난 '쑥부쟁이'는 솔바람에 향기를 풀어 넣는다.

눈부실 정도의 순수(純粹)함은 속기(俗氣)에 물들지 않았다.

 

늦가을의 고요(孤寥)는 텅 빈 적막(寂寞)이다.

자꾸만 지워져 가는 대자연의 세월을 아쉬워하니 아직도 욕심의 언저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양이다.

 

여름이 풍성하게 만든 모든 것을 가을이 아낌없이 나눠주고 떠나려 한다.

채워졌던 산과 들은 애써 수고한 손길에게 돌려주고 허허롭게 지나는 바람에 고개를

수그린다. 

 

10;50

약 세 시간에 걸친 우포늪 트래킹은 따오기복원관을 지나며 끝이 난다.

생태관~대대제방~사지포제방~숲탐방로2길~소목마을주차장~숲탐방로3길~목포제방~

사초군락~전망대~생태관으로 이어지는 8.4km트래킹을 끝내니 가슴이 후련하면서도

서운하다.

 

늘 와보고 싶었던 곳.

늘 궁금했던 곳.

 

그러나 우포늪은 나에게 5월과 10월 말에 다시 오라고 숙제를 남겨준다.

아직도 보여줄 것이 많다며 나뭇가지에 앉았던 '딱새'가 뽀르르 날아가며 의미 있는

울음을 남기고 저편으로 사라진다.

 

몰입(沒入)이라,

인생은 미쳐야 바뀐다며?

늪을 걸으며 늪에 몰입하며, 생각을 정리하고 지루한 줄 몰랐으니,

무념무상(無念無想)도 아니고 무엇일까?

 

11;00

여행이 즐겁기 위해서는 볼거리도 중요하지만 먹거리도 매우 중요하다.

음식점을 골라도 한참 잘못 골랐다.

나는 전국을 싸돌아 다니며 가급적이면 현지 음식을 맛보길 좋아한다.

 

원래 비린 음식, 혐오음식, 흙냄새 나는 음식을 싫어하기에 '해물파전'을 시킨다.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경상도 음식에는 좋은 평가를 내리지 않는다.

 

밑반찬으로 나온 김치를 입에 넣으며 경악을 한다.

똑같은 재료로 이렇게 맛없는 음식을 만들 수 있는 재주가 대단하다.

콩나물 무침도 그렇고 오징어 다리 몇 개 든 파전도 가관이다.

 

난감하다.

손맛과는 거리가 먼 휴게소 음식보다 나으려니 했던 기대는 깨지고,

이대로 나갈 수도 없고, 가뜩이나 불친절한 음식점 의자에 앉아 애써 꾹 참는다.

 

라면으로 아침을 때워 부글거리는 음식이 아쉽기에 찾은 우포늪의 음식점.

김치 하나만 봐도 엉터리인데, 앞에서 부글거리며 끓는 메기와 붕어매운탕도 맛이

없는지 다들 남긴다.

 

차라리 6~7천 원 하는 된장찌게가 아쉽다.

10년 묵은 새까만 된장을 쓰지는 못할망정, 손맛이 없더라도 종업원의 친절이 아쉽다.

세계적인 우포늪의 일정은 늪의 환상적인 풍경으로 시작되었다가 식당의 음식으로

망가진다.

 

<에필로그>

지금 메모를 옮기고, 글을 정리하면서 피식 웃음이 나온다.

지난 산행과 여행의 시간들을 떠올리면 행복해서일까?

 

그 산행과 여행이 아름다운 이유는 내 삶에 있어 되돌릴 수 없는 추억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지나면 기억 속에 남은 모든 것들이 무척이나 고마워진다.

비록 아쉬움이 남는 게 인생이라지만, 이제부터는 아쉬움을 조금씩 줄여 나가는 것이

내 삶의 남겨진 숙제가 되리라.

 

                                    2014.  11.  21.  우포늪에서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