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느림의 마학 311 잡초의 미학 <옹진군 덕적도 비조봉 292m>

김흥만 2017. 3. 27. 11:26



2016.  6.  15.


아침부터 강풍을 동반한 장대비가 쏟아진다.


내일의 덕적도 기상을 체크하니 흐림에서 비 소식으로 바뀌었다.


하늘엔 먹구름이 요동을 치고, 강풍에 연둣빛에서 초록색으로 변하는 가로수의 여린 잎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이런, 이렇게 비바람이 불면 내일 덕적도행 배가 정상적으로 출항할 수 있으려나?


검색을 하니 다행히도 내일 예상 풍속은 7.1m로 나온다.



7.9m가 초과되면 주위단계로 격상되어도 배는 정상적으로 출항하겠지만 은근이 신경이


쓰여 바람의 기준을 보니 0~7.9m/s는 안전, 8.0~17.1m/s는 주의, 17.2~32.9m/s는 위험,


33.0~44.0m/s는 매우 위험으로 분류가 된다.




세월호 침몰 사건이후 배의 출항여부는 해운 항만청에서 상당히 신중하게 결정을 하는데,


강풍주의보는 육상에서 풍속 14m/s 이상 또는 순간 풍속 20m/s 이상일 때 발령되며,


강풍경보는 육상에서 풍속 21m/s 이상 또는 순간 풍속 25m/s 이상이 예상될 때 적용한다.



풍랑주의보는 해상에서 풍속 14m/s 이상이 3시간 이상 지속되거나 파고가 3m 이상이


예상될 때이며 풍랑경보는 풍속 21m/s 이상 지속되거나 유의파고가 5m 이상으로


예상될 때 발령을 하는데 수 년 전 덕적도의 인근 자월도에서 풍랑으로 이틀을 더 보낸 적이


있다.



2016.  6.  16.  04;00


종달새와 노란 빛깔의 꾀꼬리가 날아와 새벽 단잠을 깨운다.


작은 야산과 붙어 있는 내 집은 온갖 새들의 천국이다.



어제는 산비둘기, 동박새, 직박구리, 오늘은 꾀꼬리와 종달새가 날아와 노래를 하고,


내일은 어느 놈이 날아와 노래를 부를까 매일 생동감이 넘치는 새벽을 기대한다.



절 운동을 하며 새에 대해서 잠시 생각을 한다.


내가 새 전문가는 아니지만 몇 가지 재미나는 사연은 알지.



세상에서 가장 부부애가 좋다는 원앙새는 일 년 마다 배우자를 갈아 치우는 바람둥이 새요,


자기 알을 개개비 둥지에 낳아 개개비기 자기 새끼로 알고 키우게 하는 탁란(托卵)의


명수로 싸가지 없는 뻐꾸기,



흉조(凶鳥)로 알려진 까마귀는 머리가 좋으면서 부모가 죽을 때까지 가족을 버리지 않는 


효도새(孝道鳥) 즉 반효조(伴孝鳥)라는 사실,


이동을 할 때 처진 동료가 회복을 하면 같이 떠나고, 아님 죽을 때까지 지키고 있다가


떠나는 의리(義理)의 기러기,



길조(吉鳥)로 상징되었던 까치가 언젠가 부터는 사람들의 눈 밖에 나 해조(害鳥)로 각인되기


시작했고, 평화의 상징으로 불리던 비둘기가 도시의 애물단지가 되었다.



까마귀 검다고 놀려대는 백로의 속살은 오히려 까맣고, 검어야 할 까마귀는 속살이 희다는


사실과 매나 황조롱이 솔개 등 맹금류가 사냥을 오면 떼로 몰려들어 물리치는 개개비,


때까치 등 새에 관한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백팔배를 끝낸다.



07;00


티케팅을 하며 기상을 체크하니 강수량이 4mm 미만이고 비는 다 그쳤다.



풍속은 0m 니 바람은 아예 없고 바닷물은 호수처럼 잔잔하다.


잠시 파란 하늘이 보이더니 먹구름이 다시 요동을 친다.



내륙엔 소나기 예보가 있지만 내가 지금 향하는 서해 5도 중 하나인 덕적도는 구름예보만 있다.



09;00


배는 예정시간에서 단 1분도 지체하지 않고 출항을 한다.


뱃고동소리가 세 번 굵고 짧게 울린다.


문득 부산에서 근무할 때 하숙방 창문을 통해 들리던 뱃고동소리가 생각난다.



낮게 날던 갈매기가 다 사라졌다.


내가 탄 쾌속선은 수면 위를 미끄러지기 시작하고, 전날 강풍을 수반한 비가 많이


온 탓인지 여객선 내부에는 우리 일행이 앉은 자리이왼 절반 이상이 텅 비었다.



여행에 들뜬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하고, 출항시간을 맞추려 잠을 설친 사람들은 


슬그머니 잠이 들었다.




바닷물로 얼룩진 창문으로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베 여행은 늘 설렘을 주었지.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나에게 섬 여행이란 늘 특별하다.


충청도 내륙지방에서 자란 나는 저런 빨간 등대만 봐도 가슴이 설렌다.



나에게 여행은, 특히 섬 여행은 내 영혼을 충전해주는 배터리다.


육지에서는 영화, 등산, 산책, 당구 등 놀거리가 풍부하지만 그 약효가 떨어질 때쯤


나서는 섬 여행은 추억을 만들며 어김없이 약효를 빌휘한다.



이번 여행에서도 삼무(三無)의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폰은 늘 주머니에 있으니 피할 수가 없어 일단 전원을 끄기로 한다.



신문은 볼 수가 없으니 저절로 한 가지가 해결이 되고,


숙소에 비치된 TV는 안보면 되는 거다.



또한 우리 일행만 있어 다른 사람 눈치 볼 필요도 없으니 여기서 제일 문제되는 것은


인터넷이다.




세상과 등진 섬 여행을 하며, 스트레스에 의해 힘들었던 마음을 가라앉혀야겠지.


낯선 장소를 여행한다는 것은 내 마음에 여백(餘白)을 주는 일종의 주술행위일 수도 있어


내 지친 어깨를 풀어주겠지.


나이가 드니 여행하는 동안 시도 때도 없이 사소한 자극에도 심장이 두근거리며

일상 속에서 느끼지 못하는 설렘을 느낀다.


카메라 배터리가 네 개나 된다.

눈에 보이는 풍경을 마음껏 찍으며 즐기고,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며 답을 얻으려 한다.



꿈 많던 어린 시절, 어른들이 장래 희망을 묻거나 학교에서 조사를 하면 대통령과


장관이 제일 많이 나오던 시절,



나는 군인이 꿈이었고, 그 다음엔 멋진 마도로스가 되어 배를 타는 게 꿈이었지.

또다시 몰려드는 먹구름이 창문을 스치고, 파도가 없는 푸른 바다는 나폴리가 부럽지 않다.



인천대교 아래를 지나가며 만약에 북한이나 우리의 적들로부터 테러나 공격에 의하여


저 다리가 무너지면 인천항은 무용지물이 될까.



엉뚱한 상상을 하는데 엄청나게 큰 벌크선이 여객선을 스친다.





해안경비정이 물살을 헤치며 옆을 지나고 그 옆으로 어선이 지나간다.


어선은 만선(滿船)의 기쁨을 안고 돌아오려나.



덕적도는 어떤 섬일까.


쪽빛바다가 품은 보석일까?


섬에 가면 바람의 신(神)을 만날까.



아님 바다가 반짝 거리는 윤슬을 만날까.


내가 섬 산을 찾은 지 얼마나 되었지?



나에게 산은 도망치듯 찾은 산이기도 하지만 살기 위해 찾은 산이기도 하다.


산은 오를 때마다 늘 새롭고 신비한데 섬 산은 어떨까.



10;15

먹구름은 하늘에서 요동치는데 센바람이 나타나 하늘을 비질할 기색이 전혀 없다. 

항구를 벗어나 외해(外海)로 나와도 파도 없이 잔잔하다,


망망대해를 달린지 한 시간.

섬 하나가 나타난다.

터질듯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던 엔진 소리가 조금씩 잦아들더니 덜덜 떨리던

배의 선체가 미끄러지듯이 포구로 들어간다.


바다 속에 숨어 있다 불쑥 솟아오른 섬.

이젠 긴 항해가 마무리될 때이다.


섬은 나 같은 이방인에게 속살을 보여 주려는지 뿌연 해무(海霧)가 걷혔다.

나에겐 미지의 섬인 덕적도에 첫 번째 발을 내려놓는 순간 가슴이 뭉클하니 나 역시

섬이 되는 모양이다.


선착장에는 배에서 내리는 관광객들과 타고 떠나려는 사람들로 소란스런 분위기를

연출하고 군인들은 이런 분위기에 익숙한지 자세가 변하지 않는다.




10;50

배낭을 가볍게 하고,

푸른 바다와 산과 하늘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덕적도의 비조봉을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섬을 온전히 알려면 산에 올라야 하겠지.



서포리까지 걸어가서 능선을 타고 오를까 하다가,


힘이 있을 때 정상으로 곧장 오르고, 서포리해안쪽으로 능선을 길게 타고 내려와


포장도로 4.4km를 걸어 원점회귀하기로 결정한다.



이정표엔 비조봉 정상까지 0.9km로 되어 있으니 매우 짧은 길이다.


천천히 올라도 한 시간이면 되겠지.



숲으로 스며든다.

애타게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무위(無爲)의 세상은 여름을 불러왔다.


인생의 봄날도 아닌데 지금의 나는 무엇일까.

시린 계절, 시린 세월 지내며 풍파를 맞은 얼굴을 이 산은 반겨줄까.



아차 이 아이가 누구지?


'매화노루발'은 꽃대에 꽃이 하나만 피는데 여러 개가 피었으니 '호노루발'이네.


육지에서 찍지 못한 호노루발을 섬에 와서 만난다.



호노루발이 여기저기에 피어 나를 부른다.


이 산에서는 너무 흔하지만 처음 보는 꽃이라 은근히 정이 가고, 살짝 만져보니


눈과 손이 간질거릴 정도로 부드러운 촉감이다.



무릎을 땅에 대고 엎드려 찍으며 호노루발의 냄새를 맡는다.

특별하지 않은 꽃의 냄새가 오히려 더 정이 가고, 너무 귀엽고 앙증맞은 모습은 슬그머니

깨물어주고 싶은 욕망을 느끼게 한다. 


숲은 온갖 풀로 가득찼다.

잡초(雜草)라,

태어나 왜 잡초로 불릴까.

잡초에게도 삶의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걸까.


들판에도 산속에도 피어 잡초로 불리는 꽃,

우리네의 인생도 길가에 핀 한포기 잡초와 별반 다를 게 없는데,

나는 잡초의 특별한 의미를 찾으려 카메라 포커스를 맞춘다.


특별한 존재도 아닌 잡초,

나도 수십 억 명 중의 하나니 여기에 핀 잡초와도 같은 존재지.

삶이 별 게 아닌데 하며 하늘을 쳐다본다.


숲 속에 애기똥풀, 질경이, 쑥, 냉이, 서양토끼풀 등이 자라고 개망초도 피었다.

사람들은 이런 꽃과 식물을 잡초(雜草)라 구분한다.

사람이 기르면 화초(花草)고 자연에서 스스로 나고 자라면 잡초라 부른다.


저기 숲 속에 숨은 '말나리'도 잡초라 불릴까.

내 발밑에서 자라는 씀바귀와 이고들빼기, 금창초도 잡초라 부를까?

사람들의 자의적인 해석에 꽃들은 상처를 입는다.


강아지풀, 효소를 담그기에 좋다는 쇠비름, 가볍고 속이 비어 단단한  지팡이를

만들 수 있어 청려장(靑藜杖)이라는 별명을 가진 명아주,

강인한 생명력을 가졌고 작고 가벼운 씨앗을 대량 생산해 농부들이 제일

싫어하는 바랭이, 왕바랭이, 환삼덩굴이 지천이다.


공직에서 은퇴 후 과수원을 경영하시던 아버지는 잡초 중에서 바랭이를 제일

싫어하셨지.

바랭이는 땅을 기면서 마디마다 뿌리를 내려 과수원 땅바닥을 순식간에 장악을 한다.

뽑아도 뽑아도 계속 나기에 어느 해인가는 제초제를 뿌려 다른 농작물에도 피해를 주게

한 바랭이가 풀숲의 반을 채웠다.


가막사리와 망초, 개망초도 한껏 피었다.

꽃만 가지고는 계란꽃으로 불리는 개망초가 더 예쁘다.


개화기 나라가 망할 때 아메리카에서 들어와 개망초라는 이름이 붙은 꽃이 하늘거린다.

위정자(爲政者)들의 잘못으로 나라가 망했는데, 사람들은 잘못을 꽃에다 핑계를 대고

개망초라 이름을 짓더니 슬그머니 피했다. 


쇠비름도 땅을 기며 방석 모양으로 가지를 쳤다.

뽑아도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는 쇠비름은 중학교 여름방학 숙제로 건초(乾草)를

할 때 인정을 받지 못하는 풀이기도 했지만 요즘엔 효소재료로 각광을 받는다.



어두운 숲 속에 유독 '말나리' 한 송이가 환하게 빛난다.


말 그대로 붉은 꽃잎은 청초한 숲에서 요염한 자태를 뽐낸다.



땅을 보고 있으니 땅나리인가?


땅나리는 반점이 없고, 솔나리는 분홍색이다.


그렇다면 이 나리는 중나리일까, 아님 말나리일까.



하늘나리는 하늘을 보고 피며, 솔나리는 잎이 솔잎처럼 피침이며 섬말나리는 노란색에


가깝다.


꽃에 잔털이 없으니 털중나리도 아닌 '말나리'로구나.


민간에서 자양, 강장, 건위, 종독 등에 약으로 쓰이며, 봄에 여린 잎은 나물로 먹기도 했다.



숲의 생명은 다양성인데 나도 거기에 포함될까.


산은 몸을 곧추 세웠다.

나도 몸을 세웠다가 고개를 숙이고 된비알을 오른다.

어떤 풍경을 보여주려고 산은 급한 길을 만들었을까.


봄날이 수채화라면 여름은 녹색으로 그린 유화(油畵)이다.

바람이 온몸을 스치며 바쁜  마음을 툴툴 털어버리라고 한다.


저절로 느려지는 느림의 길,

해무가 숲 속을 슬쩍 파고들지만 초록은 변하지 않고 자연의 빛을 대변한다.


바람소리 들린다.

바람소리는 멀리서 들리는 파도소리와 어우러져 내 귀에 소중한 선물을 안긴다. 



참나리 꽃대 하나에서 세 송이가 피어 바람에 하늘거린다.


지금 이 숲 속에서는 '참나리'가 요정 노릇을 하는구나.



이 자리에 참나리가 없었더라면 얼마나 휑했을까.


이 섬이 나에게 보물을 내주었구나.



참나리꽃은 홀로 고요하게 지내다가 내가 가까이 다가가니 슬며시 몸을 흔든다.


꽃은 초록으로 가득한 숲을 마무리하는 보석과도 같다.


나리꽃을 찍으며 내 인생의 빈 곳이 채워지는 느낌을 받으니 비로소 내가 존재함을


알게 된다.



말나리와 털중나리, 중나리와 참나리는 서로 비슷하여 분간하기가 힘들다.


차라리 하늘을 보고 피면 날개하늘나리나 하늘말나리라고 부르겠지만 옆을 보고 피고


땅을 보고 피었어도 이 꽃은 '참나리'가 맞다.

 


허겁지겁 쫓아서 걷지 않아도 되는 산길에서 나만의 속도를 찾는다.

하늘과 바다 사이에 떠있는 이 길이야말로 느림의 길이지.


지금은 나를 오롯이 만나는 시간이다.

산은 이야기 한다.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니니 방황하지 말고 제대로 가라고 한다.

맞다 중요한 건 나에게 방향이고 길이지.


11;20

바다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다가선다.

발아래는 천 길 낭떠러지가 입을 벌리고 해무는 쪽빛바다를 감추려고 바삐 움직인다.


먼데서 온 길손을 반갑게 맞는 바람이 노래하고 파도가 춤추는 자연의 노랫소리가 들린다.



줄기차게 이어지는 산길은 허리를 펴게 해주질 않는다.



고개를 숙이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니 아득히 멀어졌던 풍경이 불쑥 나타난다.


여긴 선계(仙界)라, 산(山)의 신과 바다(海)의 신이 함께 사는 정자에 오른다.



비조봉 정상(292m)의 정자가 외롭다.

이 섬에서는 제일 높은 곳, 더 이상 오를 데가 없어 여유를 갖고 세상을 내려다본다.


누군가는 산이 너무 낮다고 한다.

섬 산으로서는 제법 높은 봉우리인데, 1,000m 이상 되는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11;53

푸른 하늘을 지운 해무(海霧)가 몰려온다.


두둥실 떠가는 한 조각 흰 구름이 보이지 않더라도,

바람 부는 대로 흘러가는 부평초 같은 인생이 아니라도,

오늘만큼은 여유롭고 아름답게 살고 싶다.


물 흐르듯 구름 흘러가듯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도 그냥 이렇게 머무르고 사는 게

내 황혼인생이겠지.




정상의 일망무제(一望無際)는 잡초를 찍으며 느꼈던 감정을 다시 한 번 떠오르게 한다.



순식간에 몰려온 해무가 능선과 바다를 감춘다.


몰려오는 바닷바람이 차 땀에 젖은 티셔츠로는 감당을 못해 바람막이용 겉옷을 꺼내 입는다.



정상에는 이제껏 보지 못하던 풍경이 펼쳐진다.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이 동화처럼 펼쳐지며 무의식의 세계로 빨려든다.


위에 오르니 산도 바다도 나도 푸르다.

바람에 밀려온 파도소리는 자연의 오케스트라지.


섬이 산이고 산이 섬인 비조봉에서 휴식을 한다.





12;40

하산 길에 만난

미스 김 라일락이라고 불리는 '흰섬개회나무'의 향이 콧구멍으로 스민다.

화장을 마친 성숙한 여인의 냄새로구나.


라일락은 세계적으로 약 20종 밖에 없으며, 유럽 동부와 아시아 동부지역에 국한되어

분포한다고 한다.


특히 우리나라에는 개회나무, 꽃개회나무, 수수꽃다리, 털개회나무, 섬개회나무,

정향나무, 흰정향나무 등 10종이나 자생하고 있는데,


설악산에서 개회나무를 공작산에서 수수꽃다리, 오대산에서 정향나무를 찍고 오늘

비조봉에서 흰섬개회나무를 찍으니 나 같은 문외한치고는 많이 찍은 게 아닌가. 



산악회에서 단체로 왔는지 여인들의 수다 떠는 소리가 딱따구리가 구멍을 파는

소리보다 더 크다.



숲 속에 숨은 말나리를 다시 찾아낸다.


요염한 자태를 바라보며 심호흡을 하며 잠시 눈을 감는다.




조릿대가 터널을 이뤘다.


남부지방에서나 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 짧은 상식은 허를 찔렸다.



'가는장구채'가 장구소리를 낸다.


귀를 기울여 조용히 들어볼까.


온갖 풀 속에서 연약한 줄기를 흔들며 환한 미소를 보낸다.



'가막사리'와 ' 뱀무'가 숲 속을 조용히 장악했다.



13;20


사는 게 그렇게 힘든 건가.


사는 게 쉽지는 않다.


그러나 아주 작은 생각의 전환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열심히 살지 않아서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올바른 방향을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



사물을 조금 다르게 보는 힘,


잡초라 불리는 아름다운 꽃들을 보며 관점(觀點)을 달리해본다.


관점을 달리하는 힘은 우리네 인생에서 나이가 들면 들수록 필요할 거 같다.




잡초는 무엇이고 화초는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고정된 관념에서 탈피하니


편협과 편향된 사고방식에서 비로소 해방이 된다.



강한 햇살을 받은 '소루쟁이'도 서서히 익어간다.



뽕나무 오디가 까맣게 익었다.


시골에서 오디는 어린 시절 최고의 간식이었지.


몇 개를 입에 넣으니 달콤한 맛이 입안을 휘젓는다.



손과 혀를 까맣게 물들이는 오디를 담은 뽕나무 나뭇가지가 흔들린다.


바람도 없으니 친구들의 손에 의해 흔들리는구나.


흔들림이란 어쩌면 무심(無心)할 정도로 자연스러운 자연(自然)의 일 아닌가.




일행 중 한 사람이 보리수 열매라고 알려주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에는 보리수가 없고 보리자나무가 있다.



이 열매는 보리수 열매가 아니고 보리밥나무의 열매로서 입에 넣고 씹으면 달큰한 맛이 난다.




꽃이 섬누리장나무꽃과 비슷하지만,


겨울에도 줄기가 마르지 않고 혹한을 견디며 새순을 내기에 인동초(忍冬草)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방과 민간에서 이뇨제, 해독제, 건위제, 해열제, 소염제, 지혈제로 쓰며 구토, 감기, 임질,


관절염에도 쓰기에 인삼에 버금가는 약초라 하니 만병통치 약재가 바로 이 인동초인


모양이다.





무슨 꽃일까?



큰연영초는 꽃잎이 석 장인데 이 꽃은 꽃잎이 5장이다.


큰꽃으아리도 아니고 육지와 섬의 식생구조가 조금씩은 다르니 아무리 봐도 모르겠다.




친구 손에 산길에서 딴 앵두가 들렸다.


빨간 열매에 아주 부드러운 솜털이 보이고 한 알을 입에 넣으니 달짝지근하며 상큼하다.



중국이 원산이고 장미과에 속하는 앵두가 여기저기 지천이다.


원래 앵두는 앵도(어린 櫻 복숭아 桃)가 변한 표현이다.



시골집 담벼락 밑에 솜털 보송보송한 잎을 달고 빨간 열매를 맺는 앵두나무,


그 흔하던 앵두나무가 요즘에는 육지에서 보기가 힘들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앵두는 철쭉과의 산앵두는 아니지만 빨간 앵두는 절세미인(絶世美人)의


입술을 표현한다.



건강한 여인들은 모세혈관이 잘 발달해 흐르는 혈액 순환이 왕성하기 때문에


입술에 나타나는 붉은 기운은 육체적 건강을 상징한다.



앵두같이 붉은 색감(色感)의 입술을 가진 건강한 여인들은 늘 사랑을 받았고,


간이나 심장이 좋지 않아 입술이 파란 여인들은 경계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요즘 대부분의 여인들은 붉은 루즈를 바르기에 분간하기가 힘들다. 




산행이 끝나고 도로를 따라 숙소로 향한다.



갈매기도 따라오지 않는 섬.


서포리 바닷가엔 파도소리만 철썩대며 외로운 나그네의 가슴을 적신다.



비구름이 사라진 하늘, 내 몸을 스치는 솔바람, 귓가에 울리는 파도소리, 풀잎이


무성해지는 백사장은 여백의 풍경이다.



찬 풍경보다는 이런 여백(餘白)의 풍경이 더 정겹지.


채워지지 않은 바닷가의 여백은 내 가슴속의 여백을 시리게 한다.



불안을 느끼지 말고, 가득 채워야 한다는 강박증을 버리라는 지혜를 주는 여백의 풍경에


나는 겸손을 배웠다.


`

옛날에는 '큰물섬'이라 했다.


깊고 큰 바다에 위치한 섬은 덕물도(德勿島)로 불리다가 덕적도(德積島)로 변했다는


이 섬은 22.97㎢의 면적에 해안선 길이는 37.6㎞라고 한다.



펜션 주인에게 인구를 물어보니 약 1,500명 정도고 특산물은 변변한 게 없다며


얼버무린다.



인천 상륙작전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기도 한 서포리 해수욕장의 1.5km 백사장엔


인적이 끊겼다.



인천에서 약 82km 떨어진 덕적도,


삼국 통일전쟁 때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도착하자 신라의 세자 법민이 이곳에 와


작전회의를 하기도 했다는 섬을 걷는다.




14;00


바닷가에서 제일 잘 어울리는 꽃,


해당화 분홍꽃잎안의 노란 꽃 수술이 파르르 떤다.



어린 순은 나물로 먹고 뿌리는 당뇨병 치료제로 쓰는데,


나는 어릴 때부터 해당화를 좋아했지.



요즘은 어떻게 사과나무 묘목을 생산하는지 모르지만, 60~70년대 사과나무의


종류는 홍옥, 데리셔츠, 국광 등이었는데 사과나무 뿌리가 약해 해당화 뿌리에


사과나무를 접붙여서 묘목을 생산했다.



따라서 접붙인 부분 위로는 사과나무가 자라고, 뿌리에서 파생되어 나온 부분에서는


해당화가 피어 과수원을 환하게 만들었다.



덩굴성 관목인 인동덩굴의 흰 꽃이 바닷가에서도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산길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하게 한다.




시간이 지나면 황색으로 변하는데 이 꽃은 아직 흰색이니 아기 꽃이구나.



다른 이름으로 금은화(金銀花)라고도 불리던 인동초의 꽃말은 사랑의 인연이라 했다.


금화와 은화라는 쌍둥이 자매가 전염병에 걸려 죽게 되자 '자신들이 죽으면 약초가 되어

우리처럼 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겠다.'라는 유언을 남긴다.


그 둘이 죽은 후 무덤에서 한줄기 가느다란 덩굴이 자라났고 금색과 은색의 꽃을


피워냈기에 금은화라 불리는 인동초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          길


                      내가 가는 길이 어딘지도 모르는 길.

                      갈림길이 나오면 어디로 갈까.

                      먼 곳을 바라보며

                      먼 곳으로 가야 하나.


                      바라보고 또 바라보던 바다에

                      고깃배가 지나가며 윤슬을 깬다.


                      세월이 흘러가도

                      익숙했던 것들이 내 곁에서 사라져도

                      내 마음속에 남아있던 삶의 흔적 따라

                      발자국이 남지 않아도

                      나의 의미가 존재하겠지.         석천   >



19;30


시간이 고여 있는 곳.


하루가 저물어가고 낙조가 떨어진다.



보름이 삼일이나 남았는데 달빛이 교교하다.


방안에서 술잔을 기울이다 밖으로 나온다.



술잔에 달빛이 쏟아지고
은근하게 들려오는 파도소리는 달빛 소나타를 연주한다.


서양(西洋)에서는 달과 달빛을 광기(狂氣) 또는 마법(魔法)의 기운을 머금은


사물이라 했다.


잠시 늑대인간으로 변해볼까, 아님 내 손가락으로 달빛을 퉁기며 마법을 부려볼까?



근데 여기는 동양(東洋)이거든,


동그라미 형태로 점점 차지는 달을 가리키며 웃음을 짓는다.



내가 지금 술과 함께 주아일체(酒我一體)가 되려했더니 달이 자기랑


물아일체(物我一體)가 되라 한다.




22;00


일배 일배 부일배(一杯 一杯 復一)라!


바닷바람 맞은 술잔에 달을 채워 마시니 어느새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빠진다.



스치는 밤 바람에 숲이 흔들린다.


잠시 술잔을 내려놓고 독락(獨樂)을 즐긴다.


가져온 하모니카를 꺼내려다 비조봉으로 눈길을 돌린다.


                 

               <         하룻밤



                        지금 이 순간도


                        바닷가의 시간은 흘러간다.


                        다시 오지 않을 시간,


                        내가 머무르는 시간이

 

                        다시 오지 못할 곳으로 흘러간다.



                        인연도 흘러가고

                    

                        세상을 향해 품었던 꿈도 흘러가고


                        초로가 된 나는 달빛 머금은 술잔을 드는구나.



                        달빛아래 구름도 흘러가고

 

                        시간도 내 꿈도 흘러가고


                        낯선 곳에서의 하룻밤은


                        내가 살고있다는 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로구나.     석천   >



달빛 아래 낮에 핀 패랭이꽃이 파르르 떨고, 저쪽에 홀로 서있는 앵두나무에도

달빛이 스며든다.



봉우리를 박차고 올라온 달이 뿌리는 달빛을 삼키며 이야기가 이어지다 '섬그늘


아기'를 흥얼거린다.


나는 술에 취한 건가, 달빛에 취한 건지 발걸음이 휘청거린다.




테레샤 수녀는 인생이란 낯선 여인숙에서의 하룻밤이라 했는데,


그의 깊은 철학을 모르는 나 같은 이방인에겐 낯설고 고독한 곳이라 쉽게 잠이


오질 않으니 아직도 한참 멀은 모양이다.



2016.  6.  17.  05;30


태양이 올라와 섬의 아침을 밝히고 해무가 바다를 서서히 덮는다.


해 뜰 녘 바닷가에서 밀물을 만나면 기분이 좋은 일인데, 지금은 밀물인지 썰물인지


모르겠다.





조심조심 발을 떼며 절벽가로 걸어간다.


부드러운 바람이 반짝이는 바닷물을 슬그머니 해변으로 밀어낸다.



바다와 울퉁불퉁한 바위, 울창한 송림(松林) 위로 파란 여백(餘白)의 하늘을 해무가


메꾸고 그 틈을 비집고 태양이 솟아오른다.



해무가 몰려오더니 순식간에 산을 삼키고 바다를 감춘다.


외로운 섬 덕적도에 감출 것이 얼마나 많다고 숨기는 걸까.


파도는 해무에 숨지 않고 모래사장과 갯바위를 때린다.



             <               방황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


                 외로운 황혼길 언제 끝나려나.


                 채워도 채워도 채울 수 없는


                 생(生)의 욕망은 나만 가진 걸까.



                 그나마 남은 황혼길,


                 마음 다하여 삶을 사랑하면 무엇이 남으리오.


                 슬픔이 남아도 삶의 찌꺼기요,


                 욕심이 남으면 허껍데기 삶이라.



                 인연도 세월도 흘러가는구름처럼,


                 몰려드는 해무(海霧)처럼,


                 하얗게 포말을 일으키며 산산히 부숴지는 파도처럼,


                 나를 버리고 훌훌 떠나겠지.                                  



                

                 목덜미를 스쳐 지나가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내가 걷는 길 위에서 무엇으로 위안을 삼을까.



                     육신이 아파도

                 

                 마음이 아파서 휘청거릴지라도


                 생(生)의 길은 방황이라,



                 썰물 되어 물 빠진 바닷가 잔해 속에


                 내 삶의 잔해가 스산하게 스며든 모양이다.



                 그래 파도처럼 밀려들어 세상을 산산조각 내 부숴라.


                 썰물처럼 사라져 가는 인생,


                 가는 세월 덧 없음을 슬퍼하지 않으려 했는데,


                 오늘따라 가슴속엔 슬픔이 밀려오더이다.




                         애절했던 그리움도


                 황혼길이 거칠어도


                 이젠 미련 없는 세월이고 기약 없는 그리움이라,


                 스치는 바람도


                 저 위를 흘러가는 구름도


                 나를 지나쳐 가지만,



                 남은 삶의 길이 아직도 남았기에


                 내 영혼이 영원히 쉴 곳을 찾을 때까지


                 얼마나 더 방황을 할까.                                     석천   >





08;20


양귀비꽃을 찍으며 덕적도와 이별을 준비한다.


이 양귀비꽃이 마약을 추출할 수 있는 양귀비라면 벌써 난리가 났을 것이다.



양귀비의 고향은 지중해 연안이다.


유럽 여행 시 지중해 연안에 무수히 핀 양귀비꽃을 만났지.



심지어는 호텔 식당 빵에도 뿌려지던 양귀비꽃 씨앗,


미사리 뚝 길에 양귀비꽃 파종을 권유했다가 마약을 심으면 큰일 난다고 거절을 하던


하남시 공무원이 생각난다.



양귀비는 전 세계 250여 개 품종이 있는데 이 중 마약 성분을 추출할 수 있는 양귀비는


두 종류뿐이며 이 양귀비의 열매에 칼로 열십자를 그어 상처를 내면 젖빛 진액이


나오는데 이 진액을 말려 굳힌 것이 천연 마약인 생아편이다.



이 양귀비는 줄기와 꽃봉오리에 잔털이 나 있어 관상용이다.


현행법으로는 50주 이상을 심으면 형사처벌을 받는데, 나 어렸을 때 울밑에 자생적으로


자라던 양귀비에서 진액을 굳혀 기름종이에 싸서 장롱에 두었다가 배가 아플 때 먹은


기억이 난다.



10;20


어제 나를 뱃속에서 토해냈던 쾌속선이 오늘도 하염없이 사람을 토해낸다.


떠나려는 자는 길을 길게 늘어섰고, 배낭을 멘 사람, 낚시도구와 비박준비를 한 사람들이


뱃속에서 하염없이 나온다.



이제 남는 사람과 떠나는 사람의 경계가 확실해지며 내 몸은 쾌속선으로 빨려 들어간다.


내 생전에 또 올 수가 있을까 비조봉을 보며 잠시 상념에 젖는다.


멈추면 보이고 찾아야만 볼 수 있는 곳에서 나는 머무르지 않고 떠나는 사람이 된다.




11;00


미사일 고속정이 빠른 속도로 우리를 스쳐 북으로 북으로 긴 항적을 남기며 올라간다.


뒤에도 또 한 척이 따르고 6척까지 세다가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연평해전이 며칠이지?


연평해전 기념일이 다가와 기동훈련을 하는지 서해바다를 확고히 지키는 고속함이


물보라를 일으키고,


파도에 들려진 함수의 5인치 함포는 적을 향해 발사할 준비가 되어 으르렁거린다.




배가 심하게 흔들린다.

너울성 파도가 높은 모양이다.



큰 너울을 타고 오르자 배가 다시 요동을 친다.


몇 사람은 배멀미를 하고 나는 조용히 잠이 든다.

                                             

                                         2016.  6.  16~17.  옹진 덕적도 비조봉을 다녀오며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