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느림의 미학 308 가평 강씨봉(830m)의 하모니카

김흥만 2017. 3. 27. 11:13



2016.  4.  28.

절기상 곡우(穀雨)인 4월 20일 봄비가 추적추적 내렸지.

제법 굵은 빗줄기가 하늘의 먹구름을 뚫고 하염없이 내린다.


약간 쌀쌀한 날씨에 비까지 내리니 창가에서 서성이며 따뜻한 커피 향을 음미하다가

문득 배낭을 둘러매고 우중산행(雨中山行)을 하고 싶은 유혹을 강하게 느낀다. 


묵직해진 저기압의 공기 속으로 커피향이 그윽하게 스며든다.

연둣빛 잎사귀가 튀어나오는 은행나무 가로수에도 봄비가 촉촉이 스며들고 메마른

내 가슴속도 촉촉이 젖어온다.


겨울비가 이별이라면 봄비는 그리움이다.

창문에 부딪치는 빗방울을 바라보면 시리고 앙상했던 마음이 포근해진다.

 

봄비는 봄의 들뜬 기분을 가라앉히고 잠시 쉬어가게 한다.

이젠 봄비가 한 차례씩 더 올 때마다 계절이 더 깊어지고, 빗방울이 꽃잎을 떨어뜨리면

어느 순간 여름을 데려오겠지.



황량했던 잿빛이 매일 매일 변한다.

들과 길가에는 벚꽃이 한꺼번에 피더니 달려드는 일진광풍에 꽃비(花雨)가 되어 내린다.

필 거 같지 않았던 자목련나무에서 땅에 떨어진 꽃잎은 갈색으로 변하며 꽃의 생을 슬퍼한다.


2016.  4.  28.  09;30

들판이 연두색으로 변하고 산의 나무에도 연한 잎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스치는 가로수에도 물이 잔뜩 올랐다.


사람들의 복장도 가벼워지고 삶의 고통을 활기 띤 봄 색깔로 지워 나간다.

이래서 봄의 세상은 살만한 모양이다.


오늘은 남쪽이 아니고 북쪽으로 달려 도착한 강씨봉에서 어떤 꽃을 볼지 어떤 자연의

풍경을 볼지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오늘 하루만큼은 발길 닿는 대로 가자.

계절이 바뀌니 하늘도 땅도 달라 보인다.


도시를 벗어났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산행을 하며 가슴 벅찬 봄 노래를 부르고 싶다.


숲은 나의 상처를 묻지 않는다.

힐링(Healing)이 필요하면 치유를 하고, 아픈 것이 있다면 숲에다 다 내려놓고 가라고 한다.


텅 빈 숲이 충만한 숲으로 변해가며 나를 마중 나왔다.

지난 몇 달의 아픔을 잊고 어느새 나도 성장을 하는 모양이다. 


북한산 여성봉을 오르고 난 후 만난 도성암 일운당 스님이 그랬지.

"힘들고 어려운 짐은 자기한테 다 내려놓고 가라"고 했지.

숲 또한 어느새 스님이 된 거다.


오늘만큼은 대자연에서 세상의 모습을 보고 싶다.


숲길을 걸으며 나무와 꽃들의 이야기를 듣고,

산 능선에 서면 흘러가는 구름과 이야기를 나누고, 

정상에 서서 몸에 와 부딪치는 바람과 실랑이라도 벌이면 돌아올 땐 나만의 비밀이

생기겠지.



숲 속의 나무들이 빽빽하게 서서 바람에 들리며 소리 없이 재잘거리고,

나는 그 속으로 성큼성큼 다가선다.


산행은 도성고개~정상~오뚜기고개~휴양림은 약 9.6km로 6시간 정도가 예상되기에

연화소를 지나 갈림길에서 우측 지름길로 정상에 올랐다가 도성고개 방향으로  

하산하기로 한다.


화려했던 왕벚꽃은 다 지고 담백한 산벚꽃이 산자락 여기저기를 수놓았다.

얼고 굳었던 산길엔 '괴불주머니'가 활짝 피고 단풍나무가 새잎을 밀어올리고 있다.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요란하다.

오늘은 바람 따라 물소리 따라 산행을 하는 행복을 누리겠구나.


바위가 된 막쇠와 언년이의 전설을 간직한 '암수바위'를 지난다. 

음흉하고 욕심 많은 부자(富者)와 언년이라는 여종, 막쇠라는 머슴과 삼각관계의

전설을 가진 바위라는 안내판을 읽으며 무슨 생각을 할까.


지나는 산객(山客)이 심심할까봐 이야깃거리를 만든 건지는 몰라도 그냥 재미로 읽고

흥미롭게 바라본다.


모진겨울을 벗어난 산야(山野)에 봄기운은 새록새록 밀려든다.

긴 침묵 속에 잠겼던 '피나물'이 말을 걸고, 나무와 꽃들이 봄바람에 흔들거리며 

숲 속의 침묵을 깬다. 



그동안 매화, 벚꽃, 산수유, 목련, 살구꽃, 복숭아꽃에 취해 살더니 무릉도원에 사는 걸로

착각을 하고 발아래 핀 꽃을 무시한 모양이다.


나무에 핀 꽃은 봄이 오고 있음을 알리는 꽃이지만 정작 봄을 즐기는 꽃은 귀엽고 앙증맞은

작은 꽃들인데, '홀아비바람꽃'이 하늘거리며 내가 며칠간 착각을 하며 살았다고 잔소리를

해댄다.



땅의 두터운 각질을 뚫고 올라온 피나물과 홀아비바람꽃, 개별꽃의 머리엔 미처 털리지

않은 흙들이 묻어있다.


계곡물소리가 바위를 때리고 계곡을 친다.

물소리에 가려 세상의 소리 지척에서도 분간하기 힘드니,

세상의 시비소리에 귀 들릴까 두려워 흐르는 이 계곡물로 인간세상을 둘러막았구나. 


여인의 향내가 깊은 산중에 풍긴다.

여인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연화소(蓮花) 푸른 물에 몸을 던질까.


철원에 도읍을 정한 태봉국 궁예의 폭정에 대해 부인 강씨가 만류를 하자,

궁예는 부인을 이곳으로 귀양을 보낸다.

강씨 부인은 궁예를 원망하지 않고 이곳 연화소(蓮花沼)에 와서 시름을 달랬다는데,

그렇다면 궁예의 부인 이름은 연화(蓮花)인가 아리송하다. 



이젠 겨우내 얼었던 마음의 문을 열고 한걸음씩 오르자.

가끔은 엎드려 애기똥풀이나 노랗게 핀 민들레꽃을 들여다보는 기쁨을 나는 알지.


오솔길 걷다가 푸드득 거리며 나무를 박차고 날아가는 종다리를 보는 행운도

산이 주는 특혜니 서둘러 오를 필요가 없다.


동박새 쭈비쭈비♬~하며 노래 부르니 화답이라도 하듯 종달새가 옥구슬 굴리는 목소리로

봄의 찬가(讚歌)를 부른다.

참 오래간만에 들리는 종달새 노랫소리는 천상의 화음이다.


산길이 두 갈래 곡선이다.

이런 길에선 속도가 문제가 아니라 방향이 문제다.

정확한 방향으로 천천히 나가야만 소기의 산행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자연의 소리와 바람소리를 들으며 나는 숲 속의 일부가 된다. 

그냥 자연과 발맞추고 보폭을 좁히며 서서히 오르자.


산길을 걷는다.

저만치 앞에서 동료가 천천히 오른다.


넓은 등판에 배낭을 짊어진 모습은 산(山)이다.

산이 걸어가고 따라가는 내 발걸음도 가벼워진다.



10;14

강씨봉이라는 산 이름이 재미있다.

우리나라 여느 산에도 다 전설이 있듯이 이 산에도 전설이 있다.


능선 왼쪽의 오뚜기 고개에 강씨들이 모여 산다고 해서 유래한다는 이야기는

조금 싱겁다.


태봉국의 임금인 궁예의 폭정이 심해진다.

참지 못한 왕비인 강씨가 직간(直諫)을 멈추지 않자 궁예가 왕비를 강씨봉 아랫마을로

귀양을 보냈고, 나중에 왕건에게 패한 궁예가 이곳에 와 부인을 찾았으나 죽고 없었다는

설(說)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이웃에 있는 국망봉, 명성산에도 궁예에 관련된 유래가 많으니 나는 궁예의 부인과 연루된

설에 더 친근감이 간다.

근데 우스운 것은 명색이 왕비인데도 이름이 없고 성만 있는 강씨라니,

나의 호적에도 재미있는 사실이 있지.


옛날 육군에 입대하고 최전방부대에 배치되면 신원조회가 필수 의무사항이다.

일등병 계급장을 달고 첫 휴가를 나오니 경찰서와 면사무소에서 신원을 확인하러

나왔었다며 내가 군에서 사고를 친줄 알고 집에서 깜짝 놀랐다고 한다.


제대를 하고 주택은행 입사 시험에 합격을 하고 신원조회에 필요한 서류를 제출하고자

호적등본을 뗀다.

나도 내 호적등본을 직접 보기는 처음이라 자세히 들여다본다.


세상에 이런! 

할아버지는 김서현, 할머니는 '최 씨'로만 기재되고 이름이 없다.


할머니에게 이름이 없고 최 씨로만 호적에 기재되었으니 아연실색을 한다.

형님에게 연유를 물으니 할아버지가 구한말 한양에서 요즘으로 치면 경찰청장 정도의

당상관이었는데 무슨 일인지 진천으로 낙향(落鄕)을 하였고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없다고 한다.


당시는 연좌제(緣坐制)에 누구든 자유롭지 못한 세상이었지.

친가, 외가 및 사돈에 팔촌까지 뒤져 그중에서 빨치산이나 간첩, 종북에 관여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월북할까봐 전방근무도 배제되고, 직장에서도 임용이 되지 않는 등

상당한 불이익을 받았다.


연좌제는 범죄인과 일정한 친족관계에 있는 자에게 연대책임을 지우는 제도를 말한다.

우리나라는 6.25전쟁과 남북분단이라는 특수한 시대적 배경에서 사상범, 부역자,

월북인사 등의 친족에게 사실상 불이익 처우를 하다가 1980년 헌법 제12조 3항에서

연좌제 폐지를 헌법적 요청으로 규정했고,


현행 헌법 제13조 3항에선 "모든 국민은 자기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해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 한다"라고 규정했다.

강씨봉이라는 산 이름을 생각하다 할머니의 이름과 연관이 되어 쓴웃음이 나온다.


10;14

봄을 만끽하며 어느새 2.2km를 올라왔구나.

계곡을 건너 강씨봉 정상까지 1km인 지름길로 올랐다가 하산은 도성고개 방향을 택한다.



진달래 사이로 철쭉이 분주히 꽃망울을 터뜨렸다.

개화시기가 엄연히 다른데도 동시다발적으로 꽃이 피고 지니 정신을 못 차리겠다.


아직 꽃을 피우지 못한 가지들도 반쯤 되고, 지금 피기 시작하는 꽃 봉우리들이 반쯤

열리고 있으니 하산할 때쯤이면 활짝 피겠지.


민들레는 어느새 흰머리 홀씨가 되어 장대한 창공으로 유영(流泳)을 할 차비를 갖췄다.

수십 년 동안 허리가 굵어진 진달래와 철쭉이 침묵을 깨고 꽃눈이 벌어진다.


향기를 품은 채 껍질을 깨고 부수고, 틀을 깨고 나올 때 꽃은 빛이 되는데,

봄꽃이 피는 숲 속 나무의 연둣빛 잎사귀들이 초록빛으로 짙어간다.


짧은 지름길을 선택하니 처음부터 된비알이다.

힘든 비탈길을 오르며 나이가 든 탓인지 몸이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는다.


청춘일 때는 무서움을 모르고 올랐는데,

최근 완주 안수산과 대둔산을 오르고 내리며 마음이 움츠러들어 엄두가 나지 않을 때가

종종 생겼다.

  

어찌 보면 몸은 자연의 이치에 충실히 따를 뿐인데,

마음은 늙지 않았으나 몸이 따라주지 않고 거부를 하니 자괴감이 든다.


세월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동식물에도 없다.

무심(無心)하고 무상(無常)한 세월은 나를 슬프게 한다.


일체의 만물이 끊임없이 생멸변화(生滅變化)하며 한 순간도 동일한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무상의 법칙에 따라 산은 사람에게 영혼이라는 선물을 주었지.


시공간(時空間)의 제약을 받는 육체는 서서히 시들어가지만 대자연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새로움으로 나를 더 멀리 더 높이 오르게 만든다.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장갑 낀 손으로 슬그머니 훔친다.

거친 숨을 참고 여기까지 올라왔으니 물 한 모금을 마셔야겠지.

힘들고 피곤할 때는 주저앉아 쉬는 것도 좋다.


산행 전문가들은 쉴 때 서서 쉬어야 몸의 탄력이 유지 된다고 하는데 나는 앉아서

쉬는 게 좋다.

서서 쉬는 것은 내가 괜히 허세를 부리고 욕심을 부린다는 생각이 든다.


끝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쉬엄쉬엄 걸어가며 쉴 때는 앉아서 쉬자.

목 마르면 물도 마시고 출출하면 막걸리도 한잔하자.

어차피 두 평생이 아닌 한평생인데 바삐 서두를 이유가 없지.

그래야 오늘같이 운이 좋으면 종달새 지저귀는 소리도 들을 수 있는 게지.


10;35

서서는 보지 못했던 '작은 구슬봉이'가 앉아 쉬는 내 눈에 포착이 된다.

앉으니 보이지 않았던 꽃들이 보이고 이쪽저쪽에 올라오는 잎새도 보이고,

사는 게 뭔지도 보인다.


내가 아는 야생화 중 가장 예쁜 이름을 가진 구슬봉이를 바라보며 기품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한다.


꽃에도 기품(氣品)이 있다.

사람들은 겉모습과 옷을 입은 모습만 보고 기품을 이야기 한다.

인간의 기품에는 무릇 행동과 자세, 그리고 언어에도 기품이 있어야 한다.

즉 취향과 우아함이 균형과 조화를 이뤄야만 기품이 서리는 것이다.

 

꽃도 풍기는 기운에 따라 기품이 다르다.

꽃에 따라 향기와 모습에서 기품이 저절로 풍겨 나오는데,

사람들은 매화와 난초를 꼽지만 나는 이런 작은 야생화에서도 기품을 느낀다.


양지 바른 곳에서 핀 '구슬봉이'는

잠시 지쳤던 내 몸에 따뜻한 온기와 생기를 가득 담아준다.



엎드려 '작은 구슬봉이'를 찍었더니 숨이 가쁘다.

심한 비탈길에서 미끄러지지 않으려 무릎을 꿇고 안간힘을 쓰니 꽃의 초점도 잘 맞지

않고 카메라가 흔들린다.


10;40

2.4km를 올라와 정상이 700m 남았다.

누구든 서글픈 종착지를 향해 삶이라는 긴 항해를 한다.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쌓이는 게 인생이지.

지금 오르막을 올라도 정상에 오르면 다시 내리막이 된다.


삶에서도 내리막보다 오르막이 힘들고,

산행에서도 오르막이 더 힘드니 힘들면 쉬었다 가자.


4월 한달은 나에게 잔인하다가 행복한 달이 되었지.

삶의 짐이 어깨에 매달리고 숨통을 조이다가 풀어주지만 고통의 무게는 점점 무거워진다.


살다보니 인생이 그리 호락호락하고 만만한 게 아니구나.

은행원 출신이라는 자만심에 국제유가 연동 DLS상품에 덜컥 가입을 했는데

그게 삶의 덜미를 잡을 줄이야.


기준가 배럴당 40$에서 시세가 23$ 이하로 떨어진다.

24$ 이하면 원금 손실구간인데, 손실구간으로 내려가자 영 잠이 오질 않는다.


담당 직원이 권유를 했어도 판단의 책임은 나에게 있으니 할 말이 없다.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살까, 이 나이가 되었어도 혼탁한 마음과 욕심이라는 찌꺼기가

내 마음 속에 남아있었나 보다.


다행히 기준일인 4월 25일 종가가 41$로 회복되어 목표가 대비 103%로 손실을

피하고 6%의 수익을 배당 받는다.


푸른 하늘아래 초록으로 변하는 산을 보며 그동안의 마음고생에서 평화를 찾는다.

다시는 욕심이라는 굴레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삶이 되지 않으리라 마음속으로

다짐을 하지만 제대로 잘될까,

이젠 깊은 산속에 뿌리내린 나무 한 그루 같은 마음으로 살고 싶다.


정상 바로 아래 '족두리풀'이 피어 적막한 정상에 수를 놓았다.

산에는 큰 놈 작은 놈 하얀 놈 붉은 놈이 등수도 가리지 않고 서열도 없이 마구 뒤섞여

여러 꽃이 핀다.


누가 가꾸지도 않았고 돌보지도 않았는데 이맘때면 영락없이 피는 꽃들을 바라보며 기품의

서열을 생각해본다.

 

선비들은 매화나 난초에 잔뜩 정을 쏟고 관리하면서 기품의 서열을 정하지만,

대자연에서는 사람이 사랑을 주지 않았는데도 기품 서린 보랏빛 자줏빛 주홍빛 꽃을

피우는 것이 대견스럽고 기특하지 않은가.




11;18

해발 830m의 강씨봉 정상에 선다.

시원한 바람과 엷은 안개사이로 한북정맥의 능선이 출렁거린다. 


탁 트여진 세계는 가슴을 후련하게 해준다.

서울보다 한 달이나 늦게 봄이 오니 가장 늦게 봄이 오고 가장 먼저 가을이 오는 곳,

하늘과 맛 닿아 세상을 등지고 살기에는 이곳이야말로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든다.



국망봉(1168.1m), 민둥산(1,009m), 석룡산(1,155m), 화악산(1,468.3m), 깊이봉(892m),

명지산(1,267m), 연인산(1,068m), 귀목봉 (1,036m), 청계산(849.1m), 광덕산(1,046m)이

내 눈앞에서 출렁거린다.


해발 1,000m 가 넘는 고산 준봉이 춤을 추는데도 영남 알프스, 충북 알프스라는 멋진 이름은

없고 한북정맥이라는 이름만 있다.


조선시대 우리 조상들은 산줄기 체계를 하나의 대간(大幹)인 백두대간과 하나의 정간(正幹)인

장백정간, 그리고 이로부터 가지를 친 13개의 정맥(正脈), 10대 강(江)으로만 인식을 하였는데,

지금도 이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백두산에서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원산에서 서수리곳산으로 이어지는 장백정간,

추가령에서 장명산으로 이어지는 이곳 한북정맥이라.


따라서 이곳의 이름도 학술적인 한북정맥이라는 이름에서 벗어나 '경기 알프스' 또는

'천상의 고원' 등으로 별칭을 주고 싶다. 



저 많은 봉우리를 내가 어디를 언제 올랐을까.

기억의 창고를 뒤진다.


광덕산 2회, 석룡산 2회, 연인산 4회, 운악산 5회, 국망봉 3회, 명지산 1회던가?

기억을 되찾으며 같이 올랐던 지인들의 얼굴을 떠올린다.


파도처럼 일렁이는 산봉우리와 능선을 바라보며

2002년 방배동지점장 시절 읽었던 안근찬 작가의 '멸(滅의 노래'가 문득 생각난다.

그 작가는 책에서 이곳을 배경으로 "산은 섬이 되었다"라고 표현을 했다.


세상이 멸(滅)했어도 내가 살아 있는 한 생존의 적을 피할 수가 없다.

인간에게 현상적인 멸(滅)은 죽음이다.


죽음이라는 사라짐 뒤에 다른 무엇이 된다 해도 멸후(滅後)의 존재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기에, 인간으로서의 가치와 개념을 잃은 후엔 인간으로서의 존재는 실재하지

않는다고 강하게 주장을 하며 기독교의 내세를 강하게 부정한다.


사람의 생명은 산에 서있는 나무보다 나약하고 무지하다.

안다고 믿는 것들,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찰나에 불과하다.


삶이란 참 허무하다.

내가 자연을 공부하며 기껏 안다고 자부하는 것들이 탄생과 죽음 사이에 벌어지는

감각적 현상뿐이다.


안근찬 작가는 저 앞에 보이는 화악산을 배경 삼았고,

가평계곡을 감춘 안개 밭과 낮은 구름이 산 능선을 누르고 앉았다고 표현을 했다.


해군 소속으로 DSA 즉 국방부 직속 정보부대의 특수임무를 맡은 주인공은 대위 계급장을

달았으니 드라마 태양의 후예 주인공인 송중기와 계급이 같다.


핵전쟁으로 인해 지독한 폭우가 사흘 낮밤을 내리며,

뇌성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산꼭대기를 뒤흔들었고, 비가 그친 다음엔 낮은 구름 사이로

붉은 별이 쏟아졌다고 표현을 한다.


폭우와 폭풍에 이어 산불,

아래세상은 바닷물이 들어와 온 땅을 삼켰고, 화악산과 명지산 등 해발 1,000m 가

넘는 봉우리만 섬이 되었다고 온갖 상상력을 동원하였다.


북한의 5차 핵실험을 앞두고 나도 작가와 같이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주인공인 대위는 49일을 섬이 된 산에서 버티고 나룻배로 탈출을 하다 서서히 죽음을

맞는다.


의식이 흐려지며,

"꿈?

혹시 죽은 것은 아닐까?

죽었다면~~~

하지만 언제?

죽었다 해도~~~

하긴 죽은 게 틀림없다면 다른 사람들은 상관없겠지.

그렇다면 지금껏 저승을 헤맸단 말인가?

어디로 가는 거지?" 라고 독백을 한다.


몸이 사라져버렸더라면~~~

몸이 사라지는 것은 유난스러운 일이 아니다.

어차피 느낄 수 없는 몸은 있으나마나한 존재라 오감(五感)을 유지하지 못하는

육체는 그저 구름이나 안개와 다르지 않기에 내 몸이라는 소유의 개념도 없다.


머리 수술 후 가끔은 멸(滅)에 대해서 생각을 한다.

멸(滅)을 생각하지 않는 삶,

멸후(滅後)를 고민하지 않는 삶은 무뇌(無腦)와 허무(虛無)의 가슴이다.


머리 수술이라는 생(生)과 사(死)의 법칙, 그리고 찾아온 황혼의 생로병사(生老病死),

아기들이 커가며 느끼는 희로애락(嬉怒愛樂)속에서 내 인생이 찾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집착과 욕심, 그리고 나(我)만 아닌 타인(他人)의 생과 사는 어떤 의미일까.

은퇴 후 올랐던 산 정상만의 사진으로 앨범을 만들기 위해 작업을 하다가

이미 이승을 떠난 친구들의 웃는 모습에서 생과 사의 유한(有限)함을 생각했지.


'멸의 노래'라는 책을 읽으며 새삼 느꼈던 세월,

지금 아무렇지 않게 버려지는 세월이 이젠 멸(滅)을 앞에 두고 후회하지 않는 삶이

되어야겠지.


11;24

도성고개 방향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산 정상의 바로 아래에서 노란 '양지꽃'이 햇빛을 받아 황금색을 뽐낸다.

돌에 피면 돌양지, 물가에 피면 물양지꽃은 노랑의 화신(花神)이다.


강렬한 태양빛 아래 내가 좋아하는 꽃향기에 취한다.

접사를 하려 꽃에 가까이 다가가니 향기가 코끝에 살짝 묻는다.


나무 작아 만지기에 애처롭고 아름다워 조금 떨어진다.

떨어지니 오히려 꽃잎과 꽃술이 눈에 들어온다.


꽃은 코로 향기를 맡고 손으로 만져서 감촉을 느끼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오늘 내 눈이 너무 호사를 하기에 잠시 눈을 감고 꽃을 느낀다.

향기도 멀리하고 만지지도 않고 조금 떨어져서 아름다움을 감상하다보니 일행들은

다 내려가고 나는 어느새 외톨이가 된다.



한동안은 산의 속살을 볼 수 있기에 앙상한 겨울의 나목(裸木)이 좋았는데, 이제 겨울나무는

쓸쓸해서 싫다.


지난 세월 무심코 바라보던 나뭇잎들,

능선의 나뭇가지에도 연둣빛 여린 잎이 나온다.

추위를 이기고 피는 꽃과 연둣빛 여린 잎이 점점 더 예뻐지니 나이가 들긴 들었나 보다.


아직 물이 덜 오른 시꺼멓고 마른 가지에서 솟아나는 여린 잎은 세상의 편견이나

주장 없이 세상으로 나온 신생아와 같이 순수하다.

얼마 후면 이 여린 잎들도 짙푸른 녹색으로 변하고 다가올 가을을 준비하겠지.   


                  <         능선


                      연분홍색 진달래꽃이

                      능선을 환하게 밝히고

                      신갈나무 여린 잎이

                      나무 끝에 매달려 파르르 떤다.


                     겨울바람에 날아간 이파리

                     눈과 비에 시달리던 껍질에

                     봄바람이 날아와 야윈 몸에 부딪히니

                     나뭇가지는 비명을 지르며 부숴지려 한다.             석천   >


300m 를 내려오니 도성고개까지 1.14km 남았다는 이정표가 나온다.


민둥산(민드기봉) 능선이 저 멀리서 꿈틀거린다.

문명은 눈으로 먼저 들어오고 자연은 귀로부터 들어오는 법이지.

진달래 꽃망울이 활짝 터지며 나를 환영한다.


능선으로 바람이 불고, 하늘금이 출렁이는 속에서 나는 숨의 결을 찾아 멀리 하늘가로

눈길을 돌린다.


이 길로 곧장 가면 도성고개를 거쳐 민둥산(1,009m)~개이빨산(견치봉 1,124m)~

국망봉(1,168m)~백운산(903m)~광덕산(1,046m)으로 이어지겠지.


세상은 변해간다.

도성고개를 향한 길에선 연둣빛 세상이 펼쳐지고 돌멩이 하나 없는 순한 길은 구불구불

이어진다.

 

사람들은 산에서, 삶에서 힘듦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곧잘 말한다.

그러나 나는 싸우는 게 아니라 나 자신과 소통하면서 살고 걷는 거라고 생각한다.


11;40

힘들면 쉬어가자.

산에선 순탄한 길만 있는 게 아니지.

가다 보면, 오르다 보면 때로는 산마루에 앉아 한숨을 몰아쉴 때도 있는 게 산행이다.


살아가는 길 위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게 되면 새로운 생동감을 얻기도 하지만

때로는 까닭 모를 서러움에 목 메이기도 한다.

육신이 지쳐 앞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일까.


발아래 까마득한 저 길 참 많이도 걸어왔다.

내가 걸어온 인생길 그리고 지금 걷는 산길,

가끔은 이렇게 자리에 앉아 막걸리 한잔을 하며 걸어온 길을 돌아다본다.


배낭에서 하모니카를 꺼낸다.

언제부터인가 산상(山上)에서 하모니카를 불고 싶었다.

나의 살던 고향은♬~~동요를 몇 곡 부르다 어느새 숨이 꽉 찬다.


초등학교 시절 형들이 불다 놔두면 슬그머니 불던 하모니카,

그 하모니카를 오십 년 넘게 간직했었는데 어느 날 아기가 장난으로 분해를 하는 바람에

고치질 못하고 버린 후 새로 산 하모니카.

아직은 연습 부족으로 잘 불지를 못한다.


세월이 흐르고 쌓여 이젠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짧아진다.

인생의 변곡점이 되는 나이지만 가끔은 하모니카를 불며 나만의 음악을 만들어 듣고 싶다.


하모니카를 불면서 내 인생에서 소중한 것들을 잊고 살았는지, 어떤 것을 잃고, 무엇을

얻고 살았는지 머릿속에서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잠시 동심으로 돌아가 나 스스로 내는 음악을 들으면서 문득 가슴이 이프고 코끝이 찡해진다.

지난날에 대한 아쉬움과 후회가 많아서일까.

이미 사라진 세월이 아쉬워도 이젠 나 스스로 내는 음악을 들으며 나머지 인생을 살고 싶다.


12;22

이렇게 봄꽃이 꽃 향기를 날릴 때는 쉬엄쉬엄 내려가자.

대부분의 개별꽃은 개별로 피는데 여기 '개별꽃'은 소담하게 모여 군락을 이뤘다.


누구 하나 관심을 주지 않는 산속에 고즈넉하게 핀 개별꽃,

꽃 이름이 있어도 너무 흔해 괄시를 받는 꽃이지만 결코 가볍거나 천박하지 않은 꽃을

나는 손에 닿으면 부숴 질까 보석을 다루듯 조용히 바라본다.


평화로움이 깃든 산.

왼쪽의 참나무 국수나무는 연두색, 오른쪽의 잣나무는 암록(暗綠)색으로 좌우 대칭이

묘한 균형을 이룬다.


봄이 아래에서 올라와 서서히 농담(濃淡)의 붓질을 하며 수채화가가 유화(油畵)로 돼가고,

봄의 풍경 속에 나도 하나의 풍경이 된다.


개별꽃을 찍다보니 다들 내려갔는지 어느새 나 혼자가 되었다.

혼자 내려가며 나의 내면(內面)과 마주한다.


가끔은 고요한 삶, 외로운 삶과도 벗이 되어야 한다.

텅 빈 사무실과 이곳 텅 빈 대자연은 닮지 않았으면서도 비슷하게 닮았다.

나도 이제는 혼자 있는 외로움에 많이 익숙해졌다.


누군가가 옆에 있으면 더 좋겠지만 때로는 이렇게 텅 빈 공간을 혼자 걷는 것도 괜찮다.

인생이란 어차피 혼자 걸어가는 길이라 이젠 혼자 있어도 답답함과 무기력감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더 자유롭고 그동안 생각해보지 못했던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겨서 좋다.


하늘을 찌르고 있는 전나무와 소나무를 비롯해 걸출한 잣나무들이 숲을 이뤘다.

여기서는 여는 것이 우주의 주인이다.

4월 들어 여러 날을 심한 미세먼지로 고생을 했지. 


달이 어둠을 열어서 미혹을 밝히면, 해는 하늘을 열어서 어둠을 밀어내고 천지를 비춘다.

이 산에서는 바람이 엷은 구름을 쫓아내면서 하늘은 태양빛으로 빛나고,

나는 대자연의 주인이 된다.


대자연과 꽃에 취해 내가 나를 여니 나 자신이 연둣빛 산이 되고 무한한 우주공간이 된다.

정상에서 내려오며 내내 멸(滅)을 담았던 나는 살아있는 거로구나.



6장의 꽃잎이 활짝 핀 '얼레지'에 코를 가까이 대고 심호흡을 한다.

꽃은 암묵(暗默)을 열어 향기를 발하고, 마치 성숙한 여인이 탄력있는 가슴을 활처럼

뒤로 젖혀 춤을 추는 동작으로 내 가슴속을 휘 젖는다.


             <           얼레지


                   얼레지는 저 홀로 피었다 지고

                   뻐꾸기 숲에서 애달파하네.

                   내 마음 얼룩진 얼레지 풀잎에 머무니

                   가슴속 얽힌 사연을 어찌 감당할까.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흔들리고

                   풀잎에 맺혔던 이슬은 사라졌구나.


                   무심한 봄바람에 흔들리는 여린 잎은

                   그리움을 바람에 날려 보내는데,

                   바보 같은 나는

                   가슴속 얽힌 사연에 속앓이를 하는구나.          석천   >


꽃의 진리는 무엇일까.

향기 나는 빛일까.

모든 생명의 진리는 빛이요 광명이기 때문인가.


얼레지가 말한다.

천천히 올라도, 빠르게 걸어도 주어진 시간은 뻔하기에,

어차피 가야할 곳으로 떠나가는 게 인생이라 소중한 시간에 사랑하며 살아가라 한다.

지난날 후회하기 보다는 나머지 날은 주어진 둘도 없는 삶이기에 희망과 행복을

찾으며 걷자.


소박하고 아름다운 얼레지,

큰 꽃송이, 특이한 꽃의 모양, 얼룩진 잎사귀와 얼레지라는 이름이지만 외국 꽃이

아니고 우리의 토종 들꽃이다.


청순가련한 모습의 얼레지는 웬만한 작은 산에서는 만날 수가 없고,

높고 깊은 산속에서나 만날 수 있다.

밤에는 꽃 살을 오므렸다가 햇빛이 대지를 밝게 비추는 아침에 다시 펴는데, 엎드려 렌즈를

대면서도 고운 자태와 향기에 빠져 잠시 멍해진다.


이런 산에서는 바람도 돌멩이에게도 고마움을 느낀다.

땅바닥에 핀 '노랑제비꽃'이 나무에 핀 꽃만 보지 말고 자기네들도 봐달라고 아우성을 친다.


길가의 왕벚꽃은 화려함을 자랑하기에 금세 싫증을 느끼는데 산벚꽃은 수수해서 좋다.

작년 겨울에 미처 떨어지지 않은 나뭇잎이 산벚꽃과 함께 떨어진다.


새로 돋아나는 나뭇잎들이 낡은 것들을 제치고 일어서는 건 자연의 순리이지.

  

12;50

1.5km를 내려오니 도성고개(631m)가 나온다.

이제 3.5km만 걸으면 목적지구나.

반대쪽 오뚜기 고개는 주둔하고 있는 오뚜기 부대가 공사를 하여 이름이 붙었다는데,

도성고개는 무슨 연유가 있을까?


전국 어느 산이든 원효대사와 마의태자의 전설이 곳곳에 스며들었는데,

유독 강씨봉 만큼은 그들이 아닌 궁예와 그의 부인 강씨, 두 아들의 전설이 녹아들었다.


직박구리 한 마리가 신갈나무 등걸에 앉아 나를 쳐다본다.

밑에서 바람이 올라와 들메나무 황벽나무 소나무가 서있는 숲을 지나 내 목덜미를

파고든다.


이제는 바람과 함께 산을 내려가야겠지.

연두색 나뭇잎이 나오는 나무들로 꽉 찬 숲에는 햇빛이 스며들고,

치밀하게 미로(迷路)로 만들어진 숲 속에선 아지랑이가 안개처럼 살짝 퍼지며

점점 안으로 스며든다.


각시붓꽃이 덤불속에 숨었다.

붓꽃의 주변을 정리할까 하다가 꽃을 보며 깜짝 놀란다.

각시붓꽃은 자신의 신비를 보여주면서 이대로 놔두라고 한다.

  

바위 절벽 틈을 비집고 피어난 노란 돌양지꽃이 신비하다.

찔레나무 가시에 찔릴까봐 주위를 정리해주려다 렌즈를 그냥 댄다.

  

사진작가들이 찍은 꽃 사진은 놀랄 만큼 꽃 주변이 깨끗하다.

예쁜 꽃 사진을 얻기 위해 묵은 잎을 따고 덤불을 걷어 내는 등 꽃 주변을 말끔히 정리했기

때문이다. 


요즘 피는 꽃들은 수시로 변덕스럽게 찾아오는 추위에 견딜 이불도 필요하기에

숨어 피어야 생명력이 오래간다.

사진을 찍기 위해 주변을 말끔히 정리하면 스트레스를 받은 다른 꽃씨는 발아하지 않는다.


소나무 아래에 피나물꽃이 군락을 이뤘기에 무심히 쳐다본다.

독성이 강한 꽃인데 꽃잎에 상처가 많으니 피나물꽃보다 독한 곤충이 베어 먹었나 보다.



최근 디지털 카메라가 널리 보급되면서 사진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나는 전문적으로 배우지 못한 초보자이지만 사진을 찍을 때마다 행여 풀 한 포기,

꽃 한 그루라도 밟아 뭉갤까 조심을 한다.


전문가가 강의하는 사진 강좌에서는 카메라 노출이나 각도 등 잘 찍는 방법만 가르치고,

사진가의 윤리를 가르치지 않는다고 한다.


따라서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연과 생명을 해치면서 까지도 좋은 사진을

찍고 싶어 하기에 ,

사진을 찍으며 연출을 하고, 심지어는 찍은 후 다른 사람들이 찍지 못하게 뽑아버리기도

하고 발로 밟아 훼손을 시키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또한 야생화 식물원을 가진 사람들이 야생화를 고가(高價)에 사들이기도 해

점점 자연이 훼손되고 멸종위기로 내몬다. 


사진을 처음 배울 때부터 야생화와 조류 등 자연에 있는 대상과 교감하고 존중하는 법을

제대로 가르친다면 지금과 같이 사진가의 윤리가 심각하지 않을 텐데, 작은 꽃 한 송이를

바라보며 괜히 미안해진다.


양심없는 짓을 행하며 억지로 만든 사진들은 결코 좋은 사진이 될 수 없다.

좋은 사진은 생명과 환경을 존중하는 마음부터 길러야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조팝나무의 흰 꽃이 빈숲을 메꾸다가 보고 싶었냐며 말을 걸어온다.

늦게 핀 산벚꽃과 능수벚꽃, 드믈 게는 산딸나무 이팝나무도 때 이르게 꽃을 피워

숲 속을 하얗게 장식했다. 



13;00

명지산의 뾰족한 봉우리가 나를 유혹한다.

저곳에 오른 후 20년 세월이 흘렀다.


날짜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새벽 세 시 익근리에 도착하여 명지폭포를 지나 제일봉까지 오른 후 밑에서 기다리는

친구들과 시간을 맞추기 위해 하산을 했지.


가평 현리에서 가평천을 따라 운전을 하다가 헤드라이트 불빛에 뛰어드는 고라니를

피하며 외마디 비명을 지르게 했던 명지산,


그 때 자리를 같이 했던 친구 중 영선, 부태, 수재가 있었는데, 이 친구 세 명이

다 폐암(肺癌)으로 불귀(不歸)의 객(客)이 되었구나. 



                        <          추억


                           내 가슴속에 품었던

                           아픈 추억을

                           한참이나 묻어버렸는데,


                           내가 산과 친해지면

                           슬픔에 오열을 할까봐

                           침묵을 지켰는데,


                           새로운 추억을,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기엔

                           너무 늦은 황혼이라,


                           묻어둔 추억을 다시 꺼냈더니

                           괜히 가슴만 아프구나.                        석천  >



13;40

동자소(童子沼)의 푸른 물이 침묵을 지킨다.

궁예의 두 아들이 물장구를 치며 놀았다는 전설을 가진 동자소는 슬픈 전설을 품었다.


14;00

조그만 샘도 없는 강씨봉,

방울방울 떨어지는 샘물도 없는 산,

샘물이 없어도 마음의 갈증을 시원하게 풀어준 강씨봉 산행도 끝나가는구나.


14;10

뒤풀이로 제기차기를 하며 산행으로 긴장되었던 근육을 푼다.



지난 정월 대보름 행사 때처럼 어지자지, 땅강아지, 헐랭이로 차는데 먼저보다 실력이

많이 늘었다.



20;00

깜깜한 밤,

술 한 잔을 하며 인생의 긴 이야기를 나눈다.


그냥 잠들기엔 별빛이 너무 좋아 아쉽다.

능선 위로 쏟아지는 별들의 찬란한 빛을 모아 가슴으로 삼킨다.


                                                 2016.  4.  28.  강씨봉에서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