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9. 11. 06;00
폭이 3m 정도의 실개천을 건너면 내가 좋아하는 숲이다. 다리 위에 서서 청둥오리가 유유자적(裕裕自適)하던 곳을 바라본다. 없다. 어제와 같은 시간인데 5일째인 오늘도 오지 않았다. 청둥오리 가족 6마리는 자연의 법칙을 어긴 내가 싫어진 모양이다. 지난주 금요일 새벽 실개천에서 노는 청둥오리를 따라 다닌다. 내가 상류로 올라가면 오리들은 하류로 내려가고, 몸의 방향을 바꾸지 않고 뒷걸음치며 하류로 따라가니 오리 가족은 다시 상류로 올라간다. 내가 따라가면 반대로 곡선을 그리며 피하는 거다. 5번을 반복해서 서로 똑같은 행동을 하다가, 오리는 경계심과 거부감을 나타내며 수면을 박차고 허공으로 사라진다. 이런 내가 실수를 했구나싶어 오리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숲으로 들어선다. 06;10 지난여름 폭염과 가뭄으로 신음을 했던 나무와 숲, 며칠간 내린 가을비로 생기를 찾는가싶더니 20도 이하로 떨어진 기온에 다시 기운을 잃어가며 풀이 죽었다. 외롭게 핀 한 송이 벌개미취와 넓은잎쥐오줌풀의 냄새를 맡는다. 무릇과 여뀌, 칡꽃에게도 코를 가까이 댄다. 사람이나 꽃에겐 냄새가 있다. 사람의 냄새를 인품훈유(人品薰蕕)라 하는데 꽃에겐 무엇이라 할까, 꽃은 화초훈유(花草薰蕕)라 해야 맞겠다. 누구나 좋은 냄새가 나는 사람은 계속 보겠지만 나쁜 냄새가 나는 사람은 보기가 싫겠지. 그런데 꽃풀은 묘하게 나쁜 냄새가 나도 예쁘다. 옛사람들이 훈(薰)은 향기 나는 풀이고, 유(蕕)는 고약한 냄새가 나는 풀이라 했지. 숲속에 하얀 소금을 뿌린 모습의 쥐오줌풀도, 노랗게 피어 큰 키를 자랑하는 금마타리도 뿌리에선 고약한 냄새가 나지만 꽃에서는 향기가 나니 훈(薰)으로 쳐야겠다. 산모퉁이를 돌자 까마귀 서너 마리가 처절하게 비명을 지른다. 숲속에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사위질빵 넝쿨을 헤치고 갈참나무로 다가가니 까마귀 한 마리의 사체가 보인다. 까마귀는 반효조(伴孝鳥)로 죽을 때까지 부모나 가족을 버리지 않는 효도새라, 조금 전 죽은 가족의 곁을 지키다가 나의 인기척에 더 놀라 경계를 하기에 서둘러 그곳을 벗어난다. 07;00 두달간 치열한 싸움이 있었던 담장엔 계요등이 완승을 거두고 겨울채비를 한다. 작년엔 계요등이 박주가리에게 완승을 했는데, 금년엔 박주가리 세력이 계요등에게 완승을 거두는가싶더니 누군가 박주가리의 넝쿨을 싹둑 자르는 바람에 계요등의 최종 승리가 눈앞이다. 몇 번이나 박주가리의 성장을 방해하려 하다가 자연의 법칙을 어기는 게 싫어 그대로 두었는데 성질 급한 누군가가 싸움에 간섭을 한 모양이다. 인간이 간섭하면 자연의 균형은 무너진다. 이러한 원칙을 알면서도 청둥오리를 따라다니며 유희(遊戱)를 즐겼으니 희롱(戱弄)으로 받아들인 오리는 사라진 거다. 세상을 살다보면 기다려야할 때가 많다. 기다림은 지루함이 아니고 그리움이다. 기다림은 외롭지만, 기다림이 있는 삶은 사랑이고 축복이다. 자연은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늘 변하며 돌고 또 돌기에 떠나간 청둥오리를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그 다음날도 올 때까지 난 기다리련다. 2018. 9. 11. 석천 흥만 졸필
자연에서 가장 자연스런 것은 무심(無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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