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 8. 06;00
삼 일째 줄기차게 내리는 겨울비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아직 먼동이 트지 않아 산길은 어두워도 굵은 빗줄기는 선명하다.
군데군데 서있는 가로등아래만 환하고 빛이 닿지 않는 골짜기와 숲은 깊은
심연(深淵)이 되어 속을 보여주지 않는다.
반대편에서 한사람이 올라온다.
새해가 시작 된지 며칠 안 되었기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를 한다.
소이부답(笑而不答)도 아니고 묵묵부답(默默不答)으로 그냥 지나가니 괜히
머쓱하다.
인사(人事)란 사람만 하는 게 아니다.
동물도 만나면 서로 냄새를 맡거나 인사와 비슷한 행동을 하는데 모르는
사람에게 괜히 인사를 한 모양이다.
이제부턴 산에서 사람을 만나도 인사를 하지 말아야겠다라는 생각이 스친다.
완벽한 계획은 무계획이라는 사람도 있는 세상이고, 성격은 생각대로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생각도 퍼뜩 들기에 평생 밴 습관대로 답례가 없어도 해야겠지.
꽤 오래전이지.
IMF외환위기시 사람들은 인사를 해도 받지 않았다.
내가 근무하던 주택은행도 3천명이 넘게 퇴직을 하는 혹독한 구조조정으로
백수가 넘쳐나는 세상이라 인사를 주고받을 흥이 나지 않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등산로 입구에 있는 등산복과 등산화 등 등산장비 대여점이 때 아닌 호황을
누렸고, 남한산성에 자주 오르는 어느 여인이 다음과 같이 인터뷰한 내용이
신문기사로 실려 눈길을 끈 기억이 난다.
월, 화요일에 고개를 푹 숙이고 산을 오르면서 남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하면 초보백수요,
수, 목요일에 적당하게 두리번거리는 사람은 중견백수고,
금, 토요일에 여유를 보이는 사람은 십중팔구 현역이 아니면 백수장노라고 했다.
여기서 장노라함은 장기간 노는 사람을 말하는데 요즘도 경제상황이 안 좋아
실직 도는 폐업하는 자영업자가 부쩍 늘었다는 통계가 발표되었다.
20년 전
외환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1999년 12월 31일 새로운 밀레니엄 (millennium),
즉 새천년시대가 열린다며 온 국민이 23;59;50초부터 10, 9~2, 1 카운트다운을
하며 동시에 환호를 지른 적이 있지.
사람들은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어도 새로운 천년이 열리면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으로 환호를 질렀고 얼마 후엔 IMF구제 금융위기에서 벗어났다.
연도 맨 앞자리가 그렇게 바뀌더니 어느새 20년이 흐르고
지금은 내가 백수신세가 되었으니 인생 또한 자연과 더불어 제행무상이구나.
살아간다는 건 매일매일 새로운 길로 접어드는 것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던 세상은 돌고 돌기에,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 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지 않은지 오래됐다.
집값과 실업률은 폭등하고, 수출은 줄어들고 세금은 줄기차게 늘어 수탈(收奪)을
당하는 단계이다.
대통령 신년사에서 유체이탈(遺體離脫) 화법으로 말을 하는 대통령을 국민들이
달나라 대통령이라고 비아냥거려도 북한만 챙기려 하고, 자기편만 세금으로 먹여
살리는 나라에서 당장 어려움에 봉착한 사람들이 인사를 나눌 여유가 있을까,
괜히 민망해지는 아침이다.
2020. 1. 8.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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