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4. 23. 오후
아내는 진료실로 들어가고 사회적 거리두기가 병원도 예외가 아니기에
보호자실로 들어가 사람이 없는 빈구석을 찾아 앉는다.
한쪽 구석에 앉은 여인이 땅이 꺼질듯 한숨을 쉬더니 눈물을 하염없이 흘린다.
무슨 사연이 있어 눈물을 흘리는 걸까.
병원에서 눈물을 보이는 경우는 대개 지인이 사망하였거나 치명적인
진단결과가 나왔을 때인데, 지켜보다가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나이가 들면 주책없이 아무 때나 눈물이 난다.
굳이 안구건조증을 들추지 않더라도 바람을 맞으면 눈물이 난다.
문해피사(文海彼沙)의 노인지반(老人之反)에서 '곡무루 이소유루(哭無淚
而笑有淚)'라 울 때는 눈물이 안 나고 웃을 때 눈물이 난다고 했다.
이 정도 나이가 되었으면 모진 세파에 시달려 눈물이 메마를 때도 되었는데
희한하게도 눈물샘은 마르지 않았나 보다.
잠시 눈을 감는다.
이 나이가 되기까지 더께 쌓인 인연들 중
누군가는 불귀(不歸)의 객이 되어 떠나갔고,
누군가는 스스로 인연을 끊었고,
또 누군가는 망각의 늪을 향해 달려간다.
시선을 돌리고 양지은의 '그강을 건너지 마오'라는 노래를 듣는다.
절제된 자세로 담백하게 부르는 그녀의 노래소리를 들으며 나도 모르게
눈가가 촉촉히 젖기 시작한다.
최근 트로트가 대세라 방송을 많이 본다.
트로트는 꺾기, 간드러진 기교, 한(恨)을 내뱉는 소리가 나와야 인기를 끄는데,
나는 오히려 양지은이 담담(淡淡)하게 부르는 노래와 임영웅의 이야기하듯
부르는 노래가 더 좋다.
맞다.
노인지반(老人之反)이 아니라도 바람이 불면 눈물이 나고,
슬픈 사연을 대하면 눈물이 나고,
서글픈 노래를 들어도 눈물이 나고,
지금 들리는 '그강을 건너지 마오'같은 담백한 노래를 들어도 눈물이
날 때가 되었다.
아파도 남자라는 이유로, 힘들어도 가장이라는 이유로,
최고 책임자라는 중압감으로 울고싶어도 울지 못했던 세월이 얼마나 되었을까.
그사이 내 청춘은 다 녹았다.
내 곁의 소중한 사람들이 많이도 떠났고 또 떠나려 한다.
옆에서 누가 울어도,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빗물에도,
바람 불어 떨어지는 꽃잎소리에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나이가 되었으니
이게 바로 종심의 세계인 모양이다.
2021. 4. 23.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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