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느림의 미학 620 일비

김흥만 2021. 5. 2. 18:41

2021.  5.  2.  04;00

하늘이 뻥 뚫린 모양이다.

지붕을 두드리는 빗줄기가 북채가 되어 둥둥둥둥 북소리를 낸다.

 

어둠을 뚫고 쏟아지는 빗줄기를 망연히 바라보며 5월초에 내리는 봄비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를 생각해본다.

 

오랜 건조주의보를 무장해제 시키는 봄비는 단비다.

농부에게는 일이 많아 비가 내려도 일한다는 '일비'란 뜻이요,

모내기에 충분하게 내리니 '못비'라는 말도,

모내기할 무렵에 한목 오는 '목비'라는 말도 맞겠지만,

 

어쨌든 봄 가뭄이 시작되는 시점에 요긴하게 내리니 '약비'라고 하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  수레국화  >

 

06;00

비가 잦아들자 숲속을 향한다.

여명이 밝아오자 숲 그늘은 농담(濃淡)이 다른 초록 세상으로 바뀌었다.

 

뻐꾸기, 직박구리, 동박새, 까치 등 쏟아지는 새 소리가 자연의 교향악을

연주하고, 나뭇잎에 고였던 빗물 떨어지는 소리까지 합세하자 귀가 활짝

열린다.

 

누가 봄은 만물이 소생(蘇生)하는 계절이라 했던가.

나는 소생이라는 말을 거부한다.

 

소생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거의 죽어 가던 상태에서 다시 살아남'을

뜻하는데,

지금 녹색의 향연을 시작하는 나무는 혹한을 이겨내며 더 단단해졌고,

나무 밑의 풀과 꽃은 지난겨울 죽었다가 다시 태어났으니 소생이라고 하기

보다는 새로운 탄생(誕生)이 아닌가.

                                            <  붓꽃  >

 

어제 새벽엔 우산을 쓰고 올랐다.

우산을 때리는 빗방울의 위세에 밀려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고 서둘러

하산을 하였는데 오늘은 우산을 쓰지 않았으니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5월 중하순에나 피는 이팝나무도 쌀밥 같은 흰 꽃을 피웠고,

쌀 뻥튀기 같은 꽃을 피운 아카시의 진한 향이 콧구멍으로 스멀스멀 들어온다.

 

오늘은 누가 탄생의 소식을 전할까.

숲속을 두리번거리자 막 피기 시작하는 붓꽃이 눈이 들어온다.

                                    <  붓꽃  >

 

봄엔 노란 복수초로 시작하기에 노란색이 대세였다,

개나리, 영춘화, 민들레, 산수유, 생강나무, 히어리,양지꽃, 돌나물, 씀바귀가

노란색이었다면

그뒤를 이어 벚꽃, 봄맞이꽃, 흰제비꽃, 백목련 등은 하얀 꽃을 피웠다.

 

붓꽃이 신비로운 보라색으로 피니 지금부터는 보라색 꽃이 대세인가.

나비와 벌이 좋아하는 색은 무슨 색일까.

 

꽃들은 생존본능으로 색깔을 달리한다.

나무의 몸짓 하나하나, 꽃들의 각기 다른 색깔은 각자 생존과 직결된 본능이

아닐까.

 

07;00

느릿느릿 걸으며 미음완보(微吟緩步)의 시간을 보내다 '수레국화'를 만나는데

오늘은 묘하게도 보라색꽃을 많이 만난다.

 

다시 만난 '수레국화'의 보라색을 바라보며,

수레국화에게서 살기 위한 몸부림과 치밀한 생존전략을 읽는다.

 

일찍 피는 꽃들은 겨울을 버티는 동안 바닥난 에너지로는 화려한 색을 만들 수

없어 노란색을 만들었고, 지금부터 피는 녀석들은 에너지가 많이 남았기에

화려한 색을 만드는 게 각자의 생존전략이라는 이론도 있다.

                                      <  수레국화  >

벌과 나비, 다른 곤충은 무슨 색을 좋아할까.

에 꿀만 많이 들었으면 좋은 게 아닐까라는 생각은 나의 편견일지도

모르겠다.

 

자연에서도 생명에 대한 존중, 자연의 질서, 생존본능, 삶과 죽음은 상존한다.

때가 되면 제행무상(諸行無常)으로 머무르지 않고, 유위(有爲)와 무위(無爲)의

질서 속 자연에서 색을 선택한 나무와 꽃들의 생존방식을 내가 알려하니

너무나 어리석은 게 아닐까.

 

그래도 산속에서 이런 야생화를 보고 있는 순간에는 삶의 불안과 고통이

사라진다.

꽃의 색깔이 노란빛이든 하얀빛이던, 보랏빛이어도 좋다.

 

어차피 꽃은 자기의 색으로 생존을 해나갈 거고,

나는 그 꽃을 보며 삶의 호흡과 의식을 이어나갈 거니까 말이다.

 

                                   2021.  5.  2.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