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느림의 미학 714 삶의 순간들(함양 대봉산 1,228 m)

김흥만 2022. 10. 30. 10:44

2022.  10.  27.  11;15

원정 산행이 얼마만인가?

2020년 6월 24일 안갯속 백두대간 능경봉(1,123.2m)을 오른 후

코로나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려 원정 산행을 중지하였으니 어느새

2년이 흘렀다.

 

세월 참 빠르다.

사람들은 세월 빠름을 순식간(瞬息間)으로 표현한다.

 

즉 눈을 한 번 깜짝하거나 숨을 한 번 쉴 만한 극히 짧은 동안을

표현하는 '순식간'이라는 말이 이럴 때 절묘하게 맞겠다는 생각이

든다. 

 

12.15.

네 시간을 달려와 함양 대봉산의 5분마다 탈 수 있는 8인승 모노레일

앞에 선다.

 

근무자는 대봉산 정상까지 모노레일은 국내 최장 길이로 총 3.93km이며

정상까지 약 32분 정도 소요되고 왕복 1시간이 걸린다고 안내를 한다.

 

당초 모노레일로 대봉산 정상에 오른 후 빼빼재(원통재) 방향으로

하산을 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발권 창구 여직원의 "하산은 반드시 모노레일을 타야 한다"는

공무원식 쌀쌀한 응대에 질려 제대로 산행을 즐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일단 정상에 오른 후 하산 코스를 결정하기로 하고 모노레일에 몸을

싣는다.

 

안전벨트를 매었어도 급경사를 오를 때는 몸이 뒤로 쏠리고,

내려갈 때 몸이 앞으로 쏠리는 건 중력 현상이라 어쩔 수가 없다.

 

말 그대로 한 줄의 레일인 모노레일을 타고 오르기에 과학의 힘을

믿고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산행의 방법으론 산길로 땀을 흘려 오르는 방법이 있고,

이렇게 편히 오를 수 있는 방법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나온다.

 

2년 전 하남지역에 출마하는 국회의원 후보자와 이번 시장 후보자에게

검단산 관광벨트를 공약에 넣자고 건의를 했다.

 

검단산에 케이블카나 트램 설치를 권유하고, 약 500m 상공에 검단산과

예봉산을 잇는 케이블카나 곤돌라를 설치하자는 내 의견이 선거공약에

일부 반영되었다.

 

트램은 산길에 깐 레일 위를 주행하는 노면전차이며 전기를 사용해

움직이기에 오염 물질이 적은 친환경 수단이라고 알려졌다.

 

그러나 산에 길을 내야 하기에 자연을 많이 훼손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모노레일도 생각보다 많게 자연을 훼손시킨 현장을 목도(目睹)한다.

 

곤돌라나 케이블카는 트램이나 모노레일보다는 환경파괴를 적게 할 수

있겠지만 역시 만만치 않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내가 괜한 건의를 했는가?

창밖 당단풍나무의 단풍을 보며 스스로 성찰(省察)을 해본다.

 

한참 오르던 중 산등성이에서 하얀 호랑이 한 마리가 금세라도 나를

덮칠 듯 도약(跳躍) 자세로 노려본다.

 

비록 조형물이지만 산꼭대기에서 백호(白虎)를 보며,

우리나라에서 1921년 마지막으로 호랑이를 잡았다는 경주 대덕산과

1962년 합천 오도산에서 사로잡혀 창경원으로 옮겨졌다는 표범을

떠올린다.

 

2013년 7월 3일 비바람 속에 오도산(1,134m)에 올랐다.

산을 오르며 선명하게 찍혀있던 짐승 발자국을 보며 등골이 오싹

했었다.

 

물론 우리나라의 호랑이와 표범은 공식적으로 멸종이 되었다.

그러나 2012. 9. 19일 평창 두타산(1,394m)을 오르며 착각이지만 

바람소리와 물소리가 어우러진 사이로 어흥! 하는 소리를 들었다.

 

2009년 평창 진부면 문창호 예비군 면대장이 군사용 이정표 확인을

위해 두타산을 오르던 중 해발 1,017m 지점에서 길이 2m, 키 1m

가량의 얼룩무늬 대형동물을 20m 전방에서 발견하고 긴급 대피

하였다고 한다.

 

다음날 전문가들과 다시 현장을 찾아 확인하니 전나무와 다릅나무에

짐승이 몸을 비빈 흔적과 털이 발견되었고,

15cm 정도의 발자국이 찍혀 호랑이로 추정된다고 해 며칠간 신문,

Tv 등 매스컴에 기사로 떴었다.

 

암튼 백호는 우리 민족에게 호랑이 중 신령스러운 존재로 각인되었다.

하늘을 별자리에 따라 구분한 동서남북의 사관(四官), 또는 사궁

(四宮) 중 서관을 다스리는 신(神)으로 청룡(靑龍), 주작(朱雀), 현무

(玄武)와 더불어 사신(四神)으로 불리는 백호를 바라본다.

 

12;35

세계 최장 집라인인 3.27km 길이의 5코스 중 2단계 집라인을 타려는

한 여인이 하강 준비를 한다.

 

시속 120km라니 얼마나 짜릿할까.

군생활 3년 동안 단 한 번도 유격훈련을 받아보지 못했다.

 

양구 동면저수지의 21사단 유격장에서 전우들이 하강하던 기분은

어땠을까,

그 때 제대로 훈련을 받지 못한 아쉬움이 지금까지 남았다.

 

정상이 가까워진다.

저곳의 풍경은 어떨까,

멋진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12;47

정상에 올랐다.

거칠 것이 없는 일망무제(一望無際)의 풍경,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풍경에 온몸이 떨린다.

 

오랜만에 만나는 정상의 풍경에 몸이 떨리니 오르가즘의 변형된 말로 

'산르가즘'인 모양이다.

 

힘들게 땀을 빼며 오르지 않았으니 '클라이머스 하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염치가 없어 내가 만든 말인 신조어 '산르가즘'을 쓰는 거다.

 

대봉산(大鳳山 1,228m)은 봉황이 알을 품은 형상으로 큰 인물이 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일제 강점기 시대 벼슬하는 사람이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산 이름을

괘관산(掛冠山)으로 격하하였으나 2009년 3월 30일 중앙지명위원회의

승인 고시(告示)를 거쳐 대봉산으로 바로 잡았다고 한다.

 

'벼슬을 마친 선비가 갓을 벗어 걸어둔 산'이라는 뜻의  '괘관산'

이라는 이름은 사라졌으나 불로초를 구해오라던 진시황이 찾았던

산삼의 산,

봉황이 우뚝 솟구친 대봉산 정상에서 나는 산의 기(氣)를 받는다.

 

대봉산 천왕봉에서 박무(薄霧)가 끼어 아스라한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보며 잠시 행복에 젖었다.

다음엔 무등산 천왕봉에 올라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봐야겠다.

 

오르지 않았으면 결코 보지 못했을 풍경을 보며,

행복이란 쟁취하고, 또한 가진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즐거움을

느끼면 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심마니들이 제단을 차려 지극정성으로 제를 올린 후 산삼을 캤다는

소원바위가 특이한 형상을 자랑하는데, 그 옆의 산신 조형물은 산의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생뚱맞은 모습이다.

 

그래도 한 가지 소원을 간절히 빌면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하니

그 한 가지로 무엇을 위해 빌까 궁리를 해야겠다.

 

옆에 달린 소원 띠를 보니 대부분 건강과 장수 그리고 재물이라는

세 가지 소원을 빌었는데, 그중에서 '임영웅 콘서트' 입장권에 당첨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원 띠가 눈에 띈다.

 

산신령을 찍으며 나도 마음속으로 건강을 빈다.

이틀 전인 10월 25일 10시 정각이 되자 간(肝) 전문의 방에서 호명을

한다.

검사 결과가 어떻게 나왔을까.

 

코로나 감염 후 해제되자마자 두 달 전 예약이 된 건강검진을 받았다.

내과 주치의는 간(肝) 수치가 지난봄의 정상치를 벗어나 비상식적으로

많이 올랐기에 위험수위라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간 전문의에게

나를 넘긴다.

 

간암, 간염, 체장, 담도 등 간과 관련된 모든 항목에 대하여 초음파

검사는 물론 정밀검사를 해야 한다는 간 전문의와 대화 중 코로나

치료제인 '팍스로비드'를 복용하였기에 일시적으로 간수치가 오르지

않았겠냐는 나의 의견은 철저히 무시가 되고 각종 검사를 받는다.

 

삶의 순간은 지금 내 앞의 롤러코스터(Roller coasters)와 같다.

어쩌면 저 앞의 급경사를 올랐다가 급하강을 하는 모노레일이

우리네의 인생과 딱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방에 들어가 간 담당 의사를 보며 가슴이 두근거린다.

코로나 감염 후 피로감을 많이 느꼈는데 간 상태가 심각하게 나왔을까.

 

의사는 검사 전 급성간염이나 간암, 또는 췌장까지 의심이 된다고

했었다.

의사의 말 한마디는 사람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하는데,

검사 결과를 들여다보는 간 담당의사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긴장된다.

 

대부분 병은 진단이라고 하지만 암(癌) 또는 불치병은 판사가

피고인에게 준엄한 판결을 내리는 행위와 비슷해 선고(宣告)라 한다.

 

진단을 내릴까, 아님 가족을 찾고 선고를 내릴까,

살만큼 살았는데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17년 전 뇌종양 선고도 받았는데, 이번에는 무탈하게 넘어갈까.

어쩌면 삶의 갈림길이 될지도 몰라 심장박동이 빨라진다.

 

2~3분 정도 컴퓨터를 바라보던 의사는 뜻밖의 말을 한다.

정밀검사 전 내가 무슨 약을 복용했는지, 아님 운동을 많이 하였는가를

묻는다.

 

약은 복용하지 않았고, 운동은 늘 하던 대로 했다고 하니

모든 간 수치가 정상으로 나왔고, GOT가 기준 40에 30, GPT가 기준

35인데 30, 감마 GPT 기준이 63인데 역시 30으로 건강한 수치라고

하며 젊은이에 해당한다는 엉뚱한 말을 한다.

 

이어 췌장, 담도, 담관 등 간에 관련된 모든 수치가 정상으로 나와

축하를 한다며 내가 나이가 많아 내과 주치의와 함께 걱정을 많이

했다는 거다.

 

간 담당의사가 너무 겁을 줘 20여 일 정도 마음고생은 물론 고가의

검사를 한 결과 일단 정상으로 나왔으니 마음은 홀가분하다.

 

술을 좋아하는 애주가로서 만약에 금주령(禁酒令)이라도 내리면 남은

인생 지루해 어떻게 살까,

 

간암 등 중병으로 선고를 받으면 산(山)으로 들어가야 하나 혼자

지지리 떨던 궁상(窮狀)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이제부터 삶의 순간들을

즐기면 된다는 생각에 환희의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14;40

하산을 하며 '진돌쩌귀 꽃'을 만났다.

꽃이 까마귀와 닮아 조선초오(朝鮮草烏)라고도 불리는데 '각시투구꽃'과

구분하기 힘들다.

 

마나리아재비과로 잎이 길게 삐쭉삐쭉하게 나왔으면 각시투구꽃이고,

이렇게 잎이 쑥잎처럼 갈퀴 모양이면 '돌쩌귀'로 구분을 한다.

 

유독성 식물로 옛날 천남성과 함께 사약(死藥)을 만들던 재료로 썼는데,

배우 김명민이 주연하던 '각시투구꽃의 비밀'이라는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14;30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은 병원에서 진단 결과를 알기 전까지는

많이 두려워한다.

 

의사는 역지사지(易之思之)로 환자의 입장에서 이야기하고,

환자는 의사를 믿으면 되는데,

세상사가 그렇게 쉽지 않으니 결과가 나올 때 까지 답답하고 두려운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붉게 물든 담쟁이 잎을 바라보며 벗들과 함께 걷고 웃고 이야기하고,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는 동안 나의 가을은 점점 깊어만 간다.

 

                                  2022.  10.  27.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