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10. 05;30
소쩍~소쩍♬♪
소쩍새가 밤새 울었다.
예전 비슬산 휴양림에서 들었던 그 소쩍새 소리다.
2010. 5. 20일 새벽에 들었으니 무려 12년 만에 제대로 듣는
소쩍새 소리에 주섬주섬 카메라를 챙기고 숙소를 나선다.
어제 낮에는 30도를 넘는 더위였는데 호수가의 온도는 14도까지
떨어져 감겨오는 냉기에 몸이 움츠러든다.
기온차가 무려 16도인데 물안개가 피어오르지 않고 시간이 일러
윤슬도 보이지 않는다.
소쩍새가 어느 쪽에 있을까.
물 건너 피안(彼岸)의 버드나무에 있을까.
저쪽은 버드나무가 늘어진 언덕 즉 피안(彼岸)이라 생사의 경계를
넘어선 해탈의 세계요,
내가 서있는 곳은 번뇌에 얽매인 차안(此岸)의 세상이다.
고요함에 잠기었으니 침정(沈靜)인가.
자태가 한가롭고 단정하니 참된 고요함 속에 소쩍새 소리를 따라
걷는 호숫가는 도피안(到彼岸)이로구나.
낚시꾼 몇 사람이 바늘에 미끼를 달아 호수에 던지니 퐁당 소리가 난다.
호수를 벗어나 마을 안쪽으로 들어간다.
어디선가 쏜살같이 튀어나온 강아지가 안아달라고 떼를 쓰고,
뒤따라 나온 아낙이 누군가에 의해 포획되었다가 구출이 된 강아지라고
하는데 목에 죽기 직전까지 고통을 받었던 상처가 그대로 남았다.
내가 '금주리'라는 마을에 대해 묻자 이곳에 금광이 7~8개 있어서
큰 동네였다고 하는데 지금도 제법 큰 마을이다.
05;40
초록 무늬가 특이한 '설악초'가 숲 속에 보인다.
이름은 설악초지만 북아메리카가 원산인 외래종이다.
설악초 주변은 물론 밭두렁과 산아래는 단풍돼지풀이 잠식해간다.
한강에도 단풍돼지풀과 가시박이 번성해 관계자들을 고생시키는데
이젠 전국의 산과 들에 다 퍼진 모양이다.
나팔꽃, 분꽃, 달맞이꽃도 설악초나 돼지풀과 같이 이름만으론 정겨운
우리 풀이다.
그런나 이 꽃들이 먼 옛날부터 우리나라의 산과 들, 강, 집 모퉁이를
지켜온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인도, 중미, 남미, 북미가 원산지다.
여름부터 지금까지 한창 피고 있는 개망초, 토끼풀, 서양민들레도 다
국내에 정착한 외래종이다.
이런 귀화식물이 400여 종이 넘는다는데 전문가도 아닌 내가 새삼
꽃이나 나무의 국적을 따져 무엇하랴.
생태계에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잘 어울려 살아가면 그게 우리 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돼지풀이나 가시박같이 생태계를 혼란
시키면 곤란하겠지.
작년엔 집 앞 담장에서 계요등과 가시박이 치열하게 싸움을 하는데,
가시박 덩굴을 잘라 계요등 편을 들어줄까 하다가 자연의 섭리에
어긋나는 거 같아 그냥 두었는데 며칠 후 직원들이 예초기로 싹둑
잘라 버렸던 일이 생각난다.
강태공 한 사람이 낚싯대를 당긴다.
월척으로 보이는 큰 '배스' 한 마리가 낚시대에 끌려 나온다.
그 사람은 배스를 살림 그물망에 넣으며 중국어로 투덜거린다.
설악초와 단풍돼지풀을 보며 외래종이라 투덜거렸는데,
낚시꾼도 외국인이요, 잡힌 물고기도 외래종인 배스이니 오늘은
외래종만 상대할 모양이다.
06;00
호수 가장자리에 길이 있으면 제방까지 가야겠다.
바람소리, 사람 소리, 물이 파도치는 소리도 없다.
호숫가는 쓸쓸하고 고요하여 내가 자연과 하나 된다.
이럴 때 쓰는 말이 요요적적(寥寥寂寂)인가, 아님 적적요요
(寂寂寥寥)일까.
오늘같이 습도가 없는 날은 멀리까지 내 목소리가 퍼질 텐데
건너편을 향해 소리를 질러 침잠(沈潛)의 분위기를 깨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물은 잔물결 없이 잔잔하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호수의 파문은 호수의 일이 아닌가.
아직 해가 뜨지 않았는데 파문과 윤슬을 기대하는 내가 어리석다.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며 무심코 걷다가 '산괴불주머니'를 만났다.
어린이의 불알 옆에 차고 다닌다는 노리개 괴불주머니라,
3~4월에 피는데 9월에도 피었으니 계절을 모르는가,
이 녀석은 시공(時空)을 초월한 모양이다.
< 산괴불주머니 >
나는 자연 속을 걷는 산책을 좋아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걸어가면서 이름 모를 식물, 여러 종류의 곤충과
조류 등을 만나지만 그냥 무심코 지나쳐버릴 때가 많다.
이렇게 아름다운 '물봉선'을 그냥 지나쳐버리기엔 너무나 많은 것을
놓치는 게 아닌가.
나는 세상을 걸을 때 풀 한 포기, 잠자리 등 곤충 한 마리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내 나름대로 이름 없는, 이름 모를 풀 한 포기, 꽃 한송이에서도 수많은
아름다움과 그 안에 담긴 자연의 오묘한 섭리를 깨닫고 싶은 거다.
< 물봉선 >
금광이 있다는 산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새가 쪼아 먹는 걸 막기 위해서 망태를 둘러 씌운 '수수'가 이채롭다.
붉은강낭콩 꽃이 참 신비하다.
지금 꽃이 피면 언제 열매가 열리려나,
붉은 꽃을 보며 예쁜 여인의 단순호치(丹脣皓齒)를 생각한다.
참 신기하다.
시골길에서 흔히 보아왔지만 오늘 따라 신비하고도 오묘해 보이니
말이다.
강낭콩 꽃은 홀로 걷는 지루함과 복잡한 머릿속에 쌓였던 번뇌들이
한순간 사라지게 한다.
어느새 영업준비를 마친 숙소 옆 커피공방이 조용하고,
커피향이 스멀스멀 콧구멍으로 들어온다.
06;40
내가 세속을 초월(超越)할 능력도 없고, 해탈도 하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이기에 끝내 소쩍새를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잠시 번잡스러운 세상을 내려놓고, 잔잔한 호수의 물과 야생화를
바라보며 소쩍새가 우는 피안의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떨림과 울림이었다.
그리고 고요함은 호수에 있지 않고 내 마음속에 있었다.
2022. 9. 10. 추석날 포천 금주 호수에서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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