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느림의 미학 715 덕유산 산자락으로 스며들다.

김흥만 2022. 11. 1. 21:35

2022.  10.  28.  06;50

이태원에 핼러윈 인파가 10만 명 이상 모인다는 뉴스를 보며

무언가 표현하기 힘든 불길한 생각과 함께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 좁은 구역에 시(市)급 인구인 10만 명이나 몰린다니,

"사고가 나면 대형 참사로 이어질 텐데~" 뜬금없는 걱정을 하며

덕유산 산자락의 오솔길을 걷고자 숙소를 나선다.

 

07;00

썰렁하다.

무주 평지의 현재 기온은 영상 2도지만 여기 산속은 해발 600m가

넘기에 실제 온도는 영하권으로 냉기(冷氣)가 온몸을 감싼다.

 

온도를 측정할 때는 지표면에서 공기가 잘 통하는 백엽상 안 1.5m

높이에 걸린 온도계로 잰다고 초등학교 시절 자연 시간에 배웠다. 

 

산에서는 온도가 다르다.

해발고도가 100m 정도 높아질 때마다 대략 0.65도 정도가 낮아지니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산자락의 실제 온도는 영하 2도로 보비슷하게

맞는다.

 

덕유산 휴양림의 산책로 안내판을 보고 가문비나무숲을 향해 걷는다.

단풍 든 낙엽송, 즉 '일본잎갈송' 군락지 위쪽으로 가문비나무 군락지가

있다는데 위험구간으로 통행금지다.

 

금곡 홍유릉의 거대한 독일가문비나무와 비슷한 위용을 이곳에서 보려

했던 나의 꿈은 사라졌다.

 

그냥 허리 굽혀 '주홍서나물'에 대고 인사를 한다.

멀리서 '담뱃대풀'로 보였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주홍서나물'이다. 

 

생태교란종으로 지정된  외래종 '서양등골나물'이 이곳 덕유산 산자락에도

퍼지기 시작했다.

어디쯤에서 멈출까.

 

10월은 이상한 달이다.

어제는 대봉산 정상에서 눈이 시리도록 파란 가을 하늘을 보며 마음이

들떴었다.

그러나 오늘은 빨갛게 물들었던 단풍이 수북하게 떨어진 땅바닥을 보며

마음이 착 가라앉는다.

 

3일 후면 10월도 끝나고 올해도 고작 두 달밖에 남지 않았다.

장대한 우주의 시간을 고작 100년도 못 사는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놓은

시간의 흐름으로 보면서 끝을 향해 질주한다는 생각을 하니 아이러니

(Irony) 한 지도 모르겠다.

 

단풍나무에 초록은 몽땅 사라지고 붉은 잎만 남았다.

 

여름의 경쾌했던 초록잎이 어느덧 바람의 잔영(殘影)으로 사라지고,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자연은 여름에서 가을로 다시 겨울로 시간의

순환을 재촉한다.

 

산길에서 '궁궁이'를 만났다.

처음엔 '선밀나물'인 줄 알았다.

 

선밀나물은 5가닥의 꽃가지가 5각형 모양을 이루는데, 이 녀석의 꽃잎

떨어진 꽃가지를 세어보니 열 가닥이 넘는다.

 

그래도 머릿속 기억의 창고에서 '궁궁이'의 잔해(殘骸) 임을 찾아내니

아직 치매는 아닌 모양이다.

 

07;30

문득 시간이란 무엇일까,

나에게 생(生)의 시간은 얼마나 남았을까.

 

지금 나에게 다가온 가을은 나에게 몇 번째 가을일까,

자연의 순환과 흐름 속에 '나만의 생'에 너무 집착하는 것은 아닐까.

 

나만의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너무 안달복달 하는 것은 아닐까.

나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묻지만 정답은 나오지 않는다.

                                            <  궁궁이  >

 

숲에서 흰색이 보이자 내 눈의 동공이 확대된다.

'구절초'의 꽃잎이 순결의 백색이지만 황량한 숲 속에선 오히려

요염하게 보이니 말이다.

 

단군신화에서 곰이 백일 동안 먹었다는 쑥이 바로 이 '구절초'인데

나도 먹어볼까.

                                <  구절초  >

 

덕유산 산자락은 야생화의 보고(寶庫)라,

임금님께 진상을 해 수라상에 올리던 '어수리' 나물도 눈에 띈다.

 

가을의 끝자락에 핀 어수리 한 송이가 나의 감성을 자극한다.

이젠 단풍잎 한 장, 노랗게 말라비틀어진 풀잎 하나하나가 아쉽고

아득해지니 말이다.

                                   <  어수리  >

 

소실점으로 사라지는 친구의 뒷모습을 보며 가수 이용의 '잊힌 계절'

이던가,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노래를 흥얼거린다.

 

행복한 시간이 영원할 수는 없다.

그 시간이 지나면 이별의 아픔과 사라진 그리움을 찾아 헤매기도 한다.

 

08;30

가을이 점점 깊어간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함양지방 과수원의 붉은 사과와 감이 차창밖으로

실루엣을 그리며 사라진다.

 

나에게 가을은 몇 번이 찾아왔고, 내게 가을은 얼마나 남았을까를

생각하니 갑자기 한숨이 나온다.

가을은 수확과 조락(凋落)의 의미를 지닌 계절이라서 어쩌면 더 가을을

타는지도 모르겠다.

 

숨이 끊어질 것 같았던 고통의 시간도 지나갔다.

항상 젊었다는 착각의 시간도, 환희의 시간도 지나갔다.

 

황혼의 나이에는 늦가을이 되면 될수록 쓸쓸해진다.

이제 내 인생의 시간은 생의 한가운데를 지나 종착역을 향해 달려간다.

그러고 보니 내가 적은 나이가 아니었구나.

 

epilogue]

머피의 법칙인가,

그날의 불길했던 예감은 끔찍한 현실로 돌아왔다.

 

이 글을 정리한 후 조용히 눈을 감고 이태원 참사 희생자의 명복을

빌어야겠다.

 

                                      2022.  10.  28. 덕유산 산자락에서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