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8. 30.
철길을 걸어서 호수가 있는 '푸른 수목원' 트래킹을 하자고?
8월 어느 날 구로구 오류동에서 회계사 사무실을 경영하는 친구가
철길로 걸어서 갈 수 있다는 푸른 수목원에 대한 정보를 단톡에
올렸다.
이 나이에 철길을 걸을 수 있다는 글을 읽는 순간 가슴이 설렜다.
진천이라는 내륙지방에서 자란 나는 어릴 때 두 가지 소망이 있었다.
진천 하늘로 항로(航路)가 있어서 날아가는 비행기는 자주 보았기에
못 타본 기차를 타보는 거와 바다를 보는 거였다.
1964년 상산초교 수학여행 때 난생처음 증평에서 기차를 탔었지.
덜커덕덜커덕 레일 이음새 부딪치는 소리와 기적소리가 신기했다.
수학여행 첫날 숙소는 서울역 인근 동자동 굴다리 옆 '경향여관'이었는데
수시로 들리는 기적소리에 뒤척이며 잠을 설쳤다.
둘째 날은 남산에 올라갔다가 밤에는 영등포역으로 가 지나가는 기차를
보며 휘황찬란한 서울구경을 했다.
수학여행 마지막 날 인천 월미도 앞바다에서 출렁이는 파도를 보며
감탄을 하다가 주사위를 가지고 노름을 하는 야바위꾼에 걸려 용돈
100원을 날렸던 내가 어느새 초로의 인생이 되었다.
진천엔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전기가 들어왔는데 일반선과 특선으로
구분되었다.
일반선은 밤 12시 통행금지 사이렌과 함께 전기불이 나갔고,
우리 집은 아버지가 공직에 계시는 덕분에 특선을 사용해 24시간 내내
전기불이 들어왔다.
시골에선 50년대 등잔불에 이어 60년대 남포(램프)불로 바뀌었다가
전기가 들어왔지만 비싼 전기세(전기료)로 제대로 쓰는 집이 드물었고,
영등포역에서 휘황찬란한 전기불을 보며 별세상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기차를 타봤으니 이젠 기찻길이 걷고 싶어졌다.
백두산 등정 후 백두산 자락에 있는 통화의 용산(1,165m)에 오르기 위해
2014. 5월 28일 철길을 걸었는데 그곳은 중국이다.
이 철길이 걷고 싶어,
영등포역 지점장으로 근무 시 5호선으로 5년이나 다녀 익숙한 길인데도
불구하고 신길역 환승통로를 걸으며 오류역을 가려면 인천행을 타야 하나,
아니면 수원행을 타야 하는지 갑자기 멍해진다.
10;20
어제부터 내린 비가 그칠 기미가 없다.
기왕에 길을 나섰으니 비가 내리면 우산을 쓰고 걸으면 되는 게 아닌가.
하늘이 지치면 비가 오고 사람이 지치면 눈물이 나는 법인데 비가 계속
내리니 한참 익어갈 농작물이 걱정된다.
부설하고 한 번도 사용을 못했다는 비운(非運)의 철길은 녹이 잔뜩 슬었고,
철길 옆은 정비가 되지 않아 지저분하다.
빗물이 넘치는 배수로에서 비를 머금은 나팔꽃, 시계꽃, 뚱딴지꽃이 나를
반긴다.
우산을 접고 꽃에 포커스를 맞추다 거센 빗줄기에 포기를 하고 그냥 걷는다.
두 개의 쇠붙이가 평행을 이루고 곧장 나아가더니 어느 순간 합쳐졌다.
나는 철길의 저런 소실점(消失點 vanishing point)이 그리웠나 보다.
서대문 형무소 담벼락 길, 하남 당정 섬 메타세콰이어 길이 데칼코마니
(decalcomanie)와는 거리가 먼 소실점이라면 여기는 시간과 공간이
함께 어우러진 소실점이다.
문득 길이란 무엇일까 잠시 상념에 빠져들자 생각은 생각을 낳고
생각은 추억을 되살린다.
세상의 길은 참 많다.
수많은 사람들이 걷던 길과 걷는 길,
곧게 뻗은 직선 길이 있다면 이리저리 휘감아 도는 곡선길도 있다.
한숨마저 삼켜버리는 낭떠러지 길도 있고,
인생길에선 꽃마차를 타고 가는 꽃길이 있다면 사람으로서 가는 길
즉 사람이 가야 할 도리(道理)의 길도 길이라 한다.
산에선 직선보다는 곡선으로 나있는 길이 예쁘다.
그래서 나는 덕유산 덕유평전의 꼬부랑길을 사랑했고,
계방산에서 내려다 보이는 운두령 고갯길을 좋아했다.
장수 삿갓봉에서 내려다보던 지그재그 길,
흑산도 기념탑에서 내려다보던 고갯길,
중국 장가계 천문산에 오르던 고갯길,
속리산 말티재, 양구 돌산령과 광치 고갯길이 아련하게 생각나지만
오늘은 유독 이 철길의 소실점이 사랑스럽다.
< 산꼬리풀 >
어느 시인은 길은 가면 뒤에 있다고 했다.
인생에 정해진 길이란 없다는데 오늘은 무슨 일이 있을까,
그냥 길이 보이던 보이지 않던 비가 오니 우산을 쓰고 정처(定處) 없이
걸을 뿐, '산딸나무'의 열매를 보며 문득 나의 지나온 인생길이 보인다.
< 산딸나무 열매 >
사실 철길을 걸으며 무슨 소리가 날까 궁금했었는데 빗소리에 묻혀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산사태로 후문이 막혀 일시 우회로로 만든 산길을 오른다.
영동 월류봉에서 만났던 '범의 꼬리꽃'이 여기도 한창이다.
구로구 항동에 있는 푸른 수목원은 서울시 최초 시립 수목원으로 2018년
서울시 1호 공립수목원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한 바퀴를 돌아보니 미선나무의 팻말 오류가 눈에 띄었고,
KB가 기부한 온실에는 토종 없이 외래종 나무와 꽃이 자리를 잡았다.
외래종과 원예종이 많은 길을 걷다가 토종인 '금마타리'를 겨우 찾았다.
계요등(鷄尿藤)은 옆에만 가도 오줌냄새가 진동을 하는데,
뿌리에 똥냄새가 나는 금마타리는 빗방울이 스며든 탓인지 지금은 냄새가
나지 않는다.
< 금마타리 >
벌개미취와 쑥부쟁이도 찾았다.
수목원에서 토종을 찾는 게 이렇게도 어려운 일인가.
어쩌면 거액을 투자한 수목원에서 토종을 찾는 내가 바보인지도 모르겠다.
11;30
비 내리는 호수를 바라본다.
무성한 갈대가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금년 여름 엄청 더웠으니 가온량(加溫量)이 충분해 멋진 가을꽃을 기대해도
되겠다.
트래킹 중 만난 호수에서 나는 마음의 울림을 받는다.
비 핑계로 떠나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하였을 풍경을 보며 마음이 편안해진다.
지금 이 순간 알파파(波)를 받아 나의 영혼이 자유로운지도 모르겠다.
사실 트래킹을 할 때 이렇게 물을 만나는 경우는 드물다.
빗방울이 호수에 떨어지며 파문을 그리고 잠시 호수에 귀를 기울인다.
물이 나에게 무슨 말을 할까.
자연의 소리는 마음에서 들려야 하기에
알파파(腦波)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호수의 소리에 기대 본다.
꽃사과에 내린 빗물이 뚝뚝 떨어진다.
시간과 공간이 함께하는 자연의 풍경에 마음이 편해지니 잠시라도 삶의
쉼표를 찾았다.
비 오는 날 호수가를 거닐며 호수를 바라보는 거도 참 오랜만이다.
도시의 소음이 사라진 곳,
비가 오더라도 깨끗하고 맑다는 생각이 드니 바로 명징(明澄)의
마음이로다.
12;00
친구가 가져온 막걸리를 한잔한다.
오늘처럼 부슬부슬 부슬비가 내리면 빛바랜 추억의 사진첩을 들추기가
좋은 날이지.
삶을 살아가다 보면 읽기와 듣기, 말하기가 대부분이지.
그중에서도 말 배우는데 2년, 말 듣기를 하는데 60년이 걸린다 했다.
김수환 추기경께서는 사랑이 가슴까지 내려오는데 60년이 걸렸다고
했는데 호수의 정자는 친구들에게 공간과 시간을 이동해줬다.
기차 통학, 당구와 군대 이야기를 나누고 학창생활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나누다가 고등학교 시절 위XX 선생 한테 당했던 수모를 꺼낸다.
몸이 아파 휴학을 앞둔 친구가 선생님에게 얼마나 억울하고 원한이
맺혔으면 50년 세월이 흘렀어도 가슴에 응어리로 남았을까.
이럴 때는 이청득심(以聽得心)이라,
가급적 이야기를 경청하고 추억과 아픔을 공유하고 맞장구치는 게 좋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마음이 아리다 못해 시려진다.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지만 숨소리도 슬퍼지는 나이에 과거의 슬펐던
이야기를 들어보니 위xx 선생한테 내 2년 선배이자 둘째형, 동기 동창
차00와 똑같은 수모를 당한 거다.
학창 시절 후 50번이나 꽃이 피고 지더니 어느새 황혼이다.
그동안 인생길 힘들었어도 참 열심히 살았지 않은가.
번뇌(煩惱)란 필요 없는 망념(妄念)일 수 있다.
그렇지만 머리와 가슴속에 꼭 필요한 지혜만 있으면 그게 사람인가.
이젠 마음속의 응어리가 나에게 이야기한 걸로 사라졌으면 좋겠다.
오늘 같이 비 오는 날 옛날을 추억하며 기억을 할 수 있는 친구들이
곁에 있어 참 행복한 날이다.
세상사 원망과 미움이 한 조각이 되어 사라지고, 수련과 억새 사이로 비를
피하는 '흰뺨 검둥오리'를 보며 비 오는 날의 나의 수채화는 완성이 된다.
2022. 8. 30.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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