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느림의 미학 747 생(生)과 사(死)는 종이 한 장 차이

김흥만 2023. 5. 14. 10:45

2023.  5.  13.  06;00

바람이 분다.

봄에 부는 새벽바람치곤 이례적(異例的)으로 강풍이다.

 

며칠째 계속되는 컨디션 난조로 어제 청주 큰 형님 팔순잔치에

못 갔는데 오늘도 여전히 몸이 무겁다.

 

새벽산책을 할까 한참을 망설이다가 평소보다 한 시간 이상 늦게

집을 나선다.

뜰안은 떨어진 나뭇잎들로 엉망이고 바람에 놀란 고양이가 

불안한지 처마밑에서 잔뜩 웅크린 자세로 빤히 쳐다본다.

 

내가 늘 오르는 동산인 황산에 가려면 육교와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길을 건너야 한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마자 황당한 광경과 맞닥뜨린다.

소방대원 세 명이 누워있는 사람에게 급히 심폐소생술을 하다가

구급차에 태우고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내며 사라진다.

 

길바닥엔 쓰러졌던 사람의 핏자국이 선명하고, 주인 잃은 물병과

모자가 바람에 나뒹군다.

 

모자와 물병이 있으니 새벽운동을 나온 사람 같아 보이는데

왜 쓰러졌을까.

옆에 전기자전거가 세워져 있는데 자전거 사고일까.

당뇨가 심해 저혈당쇼크가 온 걸까.

주머니에 비상용 초콜릿 등을 휴대하지는 않았을까.

 

부정맥으로 인해 갑자기 심장마비가 왔을까.

입가에 피가 많이 나있던데 무슨 일이었을까.

최초 신고는 누가 했을까.

 

생(生)과 사(死)의 갈림길에 선 그 사람을 신(神)은 어느 쪽을

선택했을까.

가족들은 얼마나 황망(慌忙)할까.

 

내가 최초 목격자였다면 당황하지 않고 제대로 신고와 심폐

소생술을 시행하였을까.

생각은 의문(疑問)을 낳고 의문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한참을 멍하니 서있다가

작년 11.28일 교육받았던 심폐소생술을 문득 떠올린다.

 

가슴의 양쪽 젖꼭지 중간, 쇄골과 갈라진 가슴뼈 사이 반의 반이

포인트였지.

교관은 손에 깍지를 끼고 팔은 직각으로, 엉덩이는 오리 궁둥이

자세로 가슴을 압박해라 했지.

 

개울을 건너며 놀랐던 가슴을 진정시키려 골전도 이어폰을 켠다.

이럴 때는 베토벤이나 모차르트의 무겁고 장중한 교향곡보다는

가벼운 음악이 좋을 거 같아 바이올린으로 연주하는 '우리 가곡'을

선택한다.

 

김동명 시인의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

이어서 홍난파 작곡 이은상 작사인 '사랑'과 이수인의 '고향의

노래'가 나오고,

 

안효근의 '그리움'과 이홍렬의 '고향 그리워' 등

5곡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이 차분하고 평온해진다.

 

07;00

개여울에 양귀비 한 송이가 피었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지금의 양귀비와 '노루귀'의 솜털 중 어느 게

더 예쁠까 비교하는 나쁜 버릇이 튀어나온다.

 

꽃이라면 다 예쁜 게 아닌가.

개여울의 시간은 잠시 정지되었고 양귀비꽃도 정지된 화면으로

바뀌었다.

 

개울가에 홀로 핀 양귀비 한송이를 한참 바라본다.

물에서 나오는 알파파(alpha波)를 느끼며 한참을 바라보았으니

제대로 꽃멍을 즐긴 셈이다.

 

12;20

오늘은 모교(母校) 개교 100주년 기념식이 있는 날이다.

새벽부터 안 좋은 일을 목격하였는데 또 무슨 일이 생길까.

 

손목에 찬 스마트워치에서 요란스럽게 진동이 울리고,

뜻밖에 뇌경색으로 몸이 불편했던 친구의 타계(他界) 소식이

들어온다.

 

세상 참, 

저서가 19권이나 되는 문재(文才)가 이렇게 허망하게 가다니,

죽음이 그리 쉬운 건가.

 

저세상으로 훌쩍 떠난 친구 소식에 오늘 두 번째로 놀란 가슴이

마구 콩당콩당 거린다.

 

당구에서 공이 안 맞고 살짝 빠지면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사실 삶에서도 생(生)과 사(死)는 종이 한 장 차이인 모양이다.

 

13;00

수십 명의 친구들 사이에서 코로나로 인해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가까운 친구의 손을 잡는다.

 

미세한 떨림이 온다.

파킨슨병이 온 걸까,

아님 알츠하이머가 시작된 걸까?

 

수전증(手顫症)이 왔다는 거다.

오늘의 일진(日辰)이 안 좋은가 보다.

세 번째 안 좋은 소식을 들으니 말이다.

 

본태성 진전(떨림) 즉 수전증은 소뇌의 세포들이 일찍 노화되면서

생기며 완치시키는 약도 없고 평생 동안 지속된다는데 어쩌나.

 

이럴 때는 말을 많이 들어주는 게 좋다.

상대편이 이야기를 하자마자 바로 "나도 안 좋은데"하며 '나'로

전환시켜 '전환반응'을 보이면 서로 공감이 되지 않기에 친구가

하는 이야기를 말없이 조용히 듣는다.

 

사실 나도 양손이 좋지 않다.

왼손은 중지에 '방아쇠 수지증후군'이 와 매년 2회 이상 통증완화

주사를 맞으며 겨우 버티고,

오른손은 뇌종양 후유증으로 마비가 되어 이젠 이름 석자 쓰는

것도 버겁다.

 

며칠 전에도 은행에서 자필서명을 요구하는데 참 난감하다.

직원에게 마비로 글씨를 제대로 쓰지 못한다며 양해를 구하고,

간신히 이름 석자만 쓰고 주소 등 나머지는 은행직원이 쓸 정도로

심해졌다.

 

세월은 속일 수 없다.

안 아픈 척, 젊고 씩씩한 척해도 위선에 불과하고 세월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실 종심(從心)이라는 나이가 적은 나이는 아니다.

이 나이가 되면 생(生)과 사(死)는 백지 한 장 차이일 뿐이라,

물욕을 버리고 마음도 미니멀리즘(minimalism)을 실천하며

비우는 게 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누가 말했던가.

 

                                 2023.  5.  13.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