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느림의 미학 745 엄니, 아부지 나 어떡혀!

김흥만 2023. 4. 29. 14:38

2023.  4.  29.  05;00

엄니한테 칼국수를 안 먹고 편식한다며 충청도말로 '뒈지게'

혼나다가 잠에서 깨었다.

참고로 충청도에선 어머니, 아버지를 '엄니', '아부지'라 부른다.

 

꿈이었다.

최근 거의 매일 꿈을 꾸었고, 꾸었던 꿈이 너무도 선명하다.

밤 10시 취침해 중간에 깨지 않고 푹 자다가 새벽 5시 기상을

했는데 꿈에서 본 엄니, 아부지의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 거다.

 

요즘들어 엄니, 아부지를 꿈에서 자주 뵌다.

우울증이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있는 거도 아닌데

그럴까.

 

잠을 자고 있지만 뇌파가 깨어있는 상태를 말하는 렘수면(Rem

睡眠)이 아마도 남들보다 오래 지속되는 모양이다.

                                            <    애기똥풀   >

 

10;00

창밖에 보슬비가 내린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는 칼국수가 먹고 싶다고 아내가 말하는데

나는 대꾸를 하지 않는다.

 

이 나이가 되면 음식에 대한 호불호(好不好)가 극명하게 갈린다.

사실 칼국수는 내가 싫어하는 몇 가지 음식 중 하나이기에

대꾸를 하지 않는 거다.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7남매나 되는 대가족이라

엄니는 자식들의 식사와 살림에 대해 늘 고민을 하셨지.

 

하루 세 끼 중 한 끼 정도는 밀가루 음식 또는 옥수수, 찐 감자

등으로 때웠는데, 당시는 쌀밥만 먹으면 각기병(脚氣病)이

걸린다며 잡곡을 섞은 혼식(混食)을 적극 장려할 때다.

 

오늘같이 비 오는 날 메뉴는 밀가루 반죽을 홍두깨로 밀어서

만든 칼국수요,

또 어떤 날은 담장에서 딴 늙은 호박으로 달짝지근하게 만든

호박죽으로 끼니를 때웠다.

 

보릿고개 시절이라 호박죽엔 귀한 쌀이 별로 들어가지 않았고

호박으로만 거의 채워 씹는 맛없이 물컹거리기만 했다.

 

당시 대표적 구황식물(求荒食物)이었던 질경이나 달개비를

넣고 끓이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어릴 때 질리도록 먹은 탓인지

지금도 칼국수와 호박죽을 좋아하지 않으며,

또 하나 쳐다보기도 싫은 음식이 있는데 개고기 보신탕이다.

 

지금은 초등학교지만 당시는 국민학교였지.

5학년 때인가 학교에서 돌아오니 동네 어른들이 뒷마당에

솥단지를 걸어놓고 불을 지펴 무엇인가를 끓인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꼬리를 흔들며 나를 반겨주던 강아지

'메리'가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다.

알고 보니 동네 어른들의 추렴에 걸려 우리 집 '메리'가 희생

된 거다.

 

어른들의 행동에 화가 많이 났고 서운했으며, 그 트라우마로

인해 개고기를 싫어하게 되었고, 영업상이나 접대가 필요할 때만

마지못해 보신탕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이젠 세월이 흐르고 흘러 예전 내가 그렇게도 싫어했던 '엄니표

손칼국수'와 '호박죽'이 웰빙식품이 되었고,

머리수술 후 주치의가 힘을 차릴 수 있는 음식이라며 싫어했던

개고기를 적극 추천했던 기억이 난다.

                                       <   돌단풍   >

 

뇌종양을 수술과 등산으로 간신히 극복을 했다.

그런데 작년 9월 건강검진 중 위(胃)에서 착근(着根)되지 않은

악성물질이 돌연(突然) 발견되었고,

4개월 후인 12월 '위점막하 박리술'로 악성물질을 제거하였다.

 

덕분에 통증과 암세포 없는 위암선고와 함께 금주령(禁酒令)이

내렸고, 항암이 필요 없는 의료비 5%짜리 산정특례자가 되었다.

 

엄니, 아부지!

나 이제 어떡혀유!

이 셋째 아들이 이번엔 위암이래요.

 

누군가 부는 하모니카 소리가 빗소리 사이로 들려오고 나도

서랍에서 하모니카를 꺼내 '섬집아기'를 불기 시작한다.

 

무심한 봄비는 창문을 두드리고 유리창문에 노랗게 달라붙었던

송화(松花) 가루가 힘없이 씻겨 내려간다.

아픔이라는 긴 터널의 시간도 때가 되면 빗물같이 지나가리라.

 

                             2023.  4.  29.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