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느림의 미학 754 "너는 행복하니?"

김흥만 2023. 6. 25. 09:46

2023.  6.  22.  09;00

알바 근무시간은 09시부터 12시까지인데, 평생습관을 버리지

못해 늘 1시간 일찍 출근한다.

 

8시 40분이 되자 여인들이 사무실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결혼 이주여성들을 돕는 '글로벌 다문화센터'라 남자는 없고,

출입하는 사람들은 베트남, 필리핀, 태국, 인도네시아 등 대부분

동남아 출신 여성들이다.

 

이주여성들은 주로 오후나 밤 시간에 나오는데, 오늘따라 많은

여성들이 일찍 나왔고 내가 있을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생각이

퍼뜩 들어 사무실에서 조기퇴근하지만 이른 시간이라 막상

갈 데가 없다.

 

당구장은 11시에 문을 열어 2시간을 기다려야 하고,

집에 다시 들어가기도 마뜩잖아 전철 풍산역 근처에 있는 작은

공원의 그늘진 의자에 앉아 골전도 이어폰을 꺼낸다.

 

그동안 클래식 중 교향곡 위주로 들었는데,

우리 가곡을 블루투스로 연결하여

'바우고개~' '옛 동산에 올라~' 등 피아노 연주곡을 듣는다.

 

우리 가곡이 이렇게도 아름다웠던가?

너무나 서정적이고 가슴 울리는 곡을 들으며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올려다본다.

 

강아지 두 마리를 앞세우고 걷는 여인의 곧은 각선미가 예쁘다.

다리가 늘씬하고 자신이 있으니 짧은 핫팬티를 입었겠지.

 

시선을 돌려 건너편에 앉아있는 여인의 하얀 허벅지를 바라본다.

이 정도라면 공원의 풍경과 분위기가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 자주

들려야겠다.

 

이 생각 저 생각에 손가락과 팔의 통증도 잠시 잊었다.

쳇바퀴 돌듯이 돌고 도는 세상을 살며 그 무엇에라도 몰두(沒頭)

하고 몰각(沒却)하는 것도 괜찮다.

 

의자에서 일어나 공원의 작은 길을 걷는다.

길 양쪽으로 풀이 많이 자랐고 일부는 누웠다.

 

지난밤에 비가 조금 내렸다.

하룻밤 사이에 비를 맞고 마법처럼 자란 잔디와 바랭이, 씀바귀가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려 허리를 숙였다가 풀의 냄새를 맡는다.

 

땅바닥에는 간밤에 비를 맞고 튀어나온 지렁이가 꿈틀거리고,

그 옆엔 달팽이가 풀숲을 향하여 느릿느릿 기어간다.

 

해가 나면 이 지렁이는 바로 말라죽던지 새의 먹이가 될 텐데,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달팽이는 자기만의 속도로 간다.

 

달팽이의 움직임은 느림일까.

달팽이 스스로에게 가장 알맞은 속도를 느림이라고 표현하는

나의 편견(偏見)을 버려야겠지.

 

옆에 하얗게 핀 개망초와 황금색의 황금낮 달맞이꽃이 요염(妖艶)

하다. 

서로 다른 속도로, 서로 다른 색으로 어우러지는 자연에서

나란 존재는 무엇일까.

 

자고 일어나서 밥 먹고 사무실에 나가고,

사무실에서 나왔어도 갈 곳이 없어 공원에서 방황을 하며

은퇴하던 해 검단산에 자주 오르던 생각이 문득 난다.

 

사람은 늘 어디론가를 향해 걸어가는 존재이다.

누구나 보폭이 넓거나 좁거나, 빠르거나 느리거나 어차피

한생(生)이 전부다.

 

순간을 사는 인간이 자연의 영원 앞에 무엇을 얼마나 알겠는가.

걷다 보면 무엇인가를 보게 되고, 무엇인가를 느끼게 되고,

살아가면서 저마다의 이유가 있겠지만 오늘은 이유 없이 시간을

때우려 그냥 걷는 거다.

 

길에서 달팽이를 보고 감탄을 하며,

꿈틀거리는 지렁이가 단 며칠이라도 더 살라고 작은 나뭇가지로

집어 풀숲에 집어넣기도 한다.

 

시간이 흐르자 하늘에 뭉게구름이 피어오른다.

나의 청춘과 꿈은 뭉게구름처럼 어디론가 사라졌는데,

추억과 그리움은 흘러가지 않고 옛날 그 모습으로 떠오른다.

 

아프고 힘들고 멈추고 싶었던 순간들도 많았지만 특별하게

바뀐 건 아무것도 없다.

 

목표 없이 마냥 걷던 발걸음 멈추고,

"너는 행복하니, 나는 행복한가?"라고 스스로 묻고 답을 하지만

여전히 정답은 나오지 않는다.

 

                        2023.  6.  22.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