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느림의 미학 757 위암(胃癌) 선고 후 7개월

김흥만 2023. 7. 16. 09:50

2023.  7.  16.  05;00

며칠간 지독하게 많은 장맛비가 쏟아졌고 비의 급수도 올라갔다.

폭우라는 표현도 부족해 '극한폭우'라는 이름으로 상향되었다.

 

400mm가 넘는 비로 전국 곳곳이 비에 잠기고 산사태와 제방

붕괴 등으로 재산손실은 물론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었고,

어느 신문기사에서는 백 년도 아니고 천 년에 한 번 올까말까한

비라는 표현을 썼다.

 

산사태 경고가 발령되었다는데 숲길을 올라야 하나.

아직 어둠 속에 잠긴 황산숲길은 음산한 기운마저 풍긴다.

 

산사태가 우려되는 산길을 피해 포장된 길로 올랐다가

물 빠진 망월천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소강상태였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해 우산을 편다.

100m 전방엔 비가 오지 않았다.

 

'소잔등비'인가?

"여름비는 소 잔등을 가른다."라는 속담이 생각난다.

 

소잔등비란 여름에 쏟아지는 소나기는 들쭉날쭉해 좁은

소잔등 위에서도 비를 맞는 부분과 맞지 않는 부분으로 나뉠

정도로 오는 비를 비유하는 이름이다.

 

어제는 하루종일 어수선했다.

괴산댐 월류로 괴산 목도에 사는 여동생이 침수를 당했다.

 

청주 다섯째 동생이 아침 8시에 통과했다는 오송 궁평지하차도가

동생이 통과한 지 불과 30여 분 만에 제방이 무너진 미호강에서

몰려든 물에 침수되어 9명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소식도

전해진다.

 

그렇다면 동생은 30분 차이로 천운(天運)이었고, 희생자는 미호천

범람으로 죽었으니 안타까운 액운(厄運)이로다.

 

05;30

슈만(schumann)의 '꿈을 꾸다'라는 뜻으로 천진난만한 어린이의

세계를 표현한 트로메라이(Traumerei)를 들으며 흥얼거린다.

 

이어서 그리그(Grieg)의 '아침의 무드'가 끝나고 프랑스 오페라

작곡가인 마스네의 '타이스의 명상곡(Meditation de Thais)'이

흘러나와 이어폰의 볼륨을 조정한다.

                               <     애기똥풀     >

 

06;00

풀숲 웅덩이에서 맹~꽁♬ 맹꽁이 여러 마리가 합창을 한다.

맹꽁이는 혼자서 맹~꽁까지 소리를 내지 못하고 하나만 소리를

낼 수 있는데 주변에서 나는 소리에 따라 금방 울음소리가 바뀌기도

한다.

 

맹꽁이들이 맹꽁하니 개구리들도 덩달아 개골거리는 새벽,

빈 의자에 앉아 급류가 사라진 망월천을 바라보며 물멍을 때리는

거도 좋겠다.

 

오늘이 며칠이더라,

핸드폰의 메모장을 본다.

 

작년 12월 내과 주치의로부터 위암진단을 받고 산정특례자로 

지정되었으니 오늘이 7개월째인가.

 

병원에서 검사를 하고 병을 알리는 표준어는 '진단'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암(癌)을 진단받을 때 선고(宣告)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공판정에서 판사가 사건 관계인에게 재판의 판결을 준엄하게

공표하는 선고라는 단어를 쓰는 걸까.

암이란 환자의 생사(生死)에 대해 매우 중대한 영향을 끼쳐서인가.

 

위암이 초기라 특별한 처방이 없다.

진단 후 3개월, 그다음엔 6개월 후 내시경과 초음파, CT촬영등으로

검사를 하고 이상이 없으면, 매 1년마다 동일한 검사를 받아야 한다.

 

오늘이 7월 16일이면 첫 번 위내시경을 받은 지 3개월이 지났고,

특별한 이상증세는 느끼지 못한다.

 

체중의 변화도 없고, 암세포가 없고, 통증도 없고, 처방도 없고,

항암치료도 없으니 달라진 거는 아무것도 없다.

단지 1급 발암물질로 지정된 술만 먹지 못하게 하는 거다.

 

암 발생 이전과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는 생활이 이어진다.

굳이 따지자면 친구들과 막걸리 한잔을 마시며 담소를 즐기던 

재미가 사라졌다.

 

피할 수 없는 자리라면 소주잔에 생수따라 마시며 분위기에

어울리려 노력하는데 술자리가 즐겁지 않고 조금 지루할뿐이다.

 

06;10

며칠 전 안과에서 CT촬영상 황반변성이 조금 더 악화되었으니

3개월 후 '아일리아'라는 눈주사를 맞을 생각을 하고 병원에

나오라고 주치의가 말한다.

 

주치의의 말 한마디에 대학교 입학을 포기했다.

만날 당구장에만 들락거리는 게 진부해 대학교 진학을 꿈꿨는데

인생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 사이버대 '심리학과'에 '만학도'로 지원해 합격이 되었고,

18학점을 취득하면 학위가 수여되고, 성적에 따라 월반이 되며,

조기졸업을 할 수 있다기에 지원을 하였는데,

눈상태가 나빠지고 있다는 의사의 말 한마디에 꿈이 사라진 거다.

 

나는 책 보기를 좋아했고, 공부하는 게 재미있다.

그러나 현재의 눈 상태로는 책을 보기가 힘들고, 컴퓨터를 보는 게

점점 힘들어진다.

 

이대로는 인터넷 강의를 제대로 받을 수가 없다는 생각이 퍼뜩

들어 아쉽지만 포기로 결정했다.

 

무작정 시작을 해볼까도 생각을 했었다.

잠시 숨을 돌리고 생각을 해보니 그 고통을 참아낼 자신이 사라진

거다.

 

따라서 버티는 자세만으로는 내가 좋아하는 삶을 완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젠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예전 머리의 통증도 참고 견디었건만, 눈의 장애는 참아서 될

문제가 아니다.

안타깝게도 그동안 잘 버티어왔던 삶이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걸

느끼게 되면서 희망이 점차 사라진다.

 

삶이란 참 묘하다.

하고 싶은 걸 다 할 수 있는 삶이 있다면,

하고 싶어도 못하고, 시작을 하려는데 의외의 변수가 생겨 시작도

하지 못하는 삶도 있다.

 

이유야 어떻든 사는 동안 서서히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는 게

황혼의 삶이다.

그렇다고 무너지는 순간에 대해 겁을 먹거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공부를 하던 못하던, 암세포가 착근(着根)이 되든 말든, 눈이 더

악화가 되든 말든 어떠한 순간에도 나의 삶은 계속되고 포기를

하지 않을 테니까.

 

                                  2023.  7.  16.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