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4. 24. 09;00
봄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황량했던 산과 들에 하얗게 수를 놓았던 벚꽃이 일제히
사라지고, 5월 중순에 피는 이팝나무꽃이 성급하게 그
자리를 메꿔나간다.
누런 속살을 보였던 산과 들판은 연두색을 제친 초록이
꽉꽉 채워가고 하늘엔 검은 비구름이 넘실댄다.
모처럼 일정을 잡은 일박산행,
청주 낙가산은 어떤 모습을 나에게 보여줄까,
하늘은 설레는 나의 마음을 아랑곳하지 않고 제법 굵은
빗줄기를 뿌려댄다.
인터넷으로 날씨를 다시 확인하니 우리가 도착할 무렵인
11시부터 비가 그침으로 나온다.
비가 그쳐 비를 맞지 않고 산에 오르는 게 좋을까,
아니면 추적추적 내리는 봄비를 맞으며 오르는 게 좋을까.
어느 게 정답인지는 모르지만,
예비옷을 가져왔으니 오랜만에 비를 맞고 산행을 하는
것도 괜찮겠다.
11.20
김수녕 양궁장 주차장에 내려 산행준비를 하는 동안 비는
그쳤다.
등산지도를 보니 정상까지 2.3km라 천천히 올라도 두 시간
정도면 되겠다.
낙가산 바로 옆에 맨발로 걸을 수 있는 용정산림공원
황톳길이 조성되어 많은 사람들이 맨발 걷기를 즐긴다.
소요시간은 편도 약 15분 정도라는 말을 들으며 낙가산
들머리로 들어선다.
숨을 깊게 4, 7,8 호흡법으로 깊게 들이마셨다가 길게
내뱉는다.
아~청량한 숲냄새가 내 폐부로 깊숙이 들어온다.
그래 바로 이맛이지,
곁들인 동박새와 직박구리 노랫소리, 살짝 불어오는
솔바람소리, 습기를 살짝 머금은 맑은 공기가 삼박자의
조화를 만들며 몸과 마음을 가볍게 만들어준다.
4,7,8 호흡법이란 일종의 복식호흡법으로
4초간 코로 숨을 들이마시고,
7초간 숨을 참았다가 8초간 입으로 내뱉는 방식이다.
이 방식으로 호흡을 하면 산소를 많이 들이마실 수 있어
활성산소 억제에 도움이 되고 체내 독소를 배출할 수
있다고 한다.
체내 독소는 주로 호흡, 피부, 대소변을 통해 배출하는데
휘발성 독소는 호흡으로 배출해야 되며,
독소를 배출하면 면역력 증진도 되고 수면개선에도 도움이
된다는 거다.
동의보감에서 추천하는 양생법(養生法)으로는 가부좌
(跏趺坐)를 틀고 호흡하라고 했다.
산행을 하면서 바위 위에 앉아 가부좌를 틀 수도 없고,
양손에 등산용 스틱을 들고 카메라까지 메고 있으니
뒷짐 지고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어슬렁어슬렁 오르는
미음완보(微吟緩步) 보법도 지금은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수시로 4,7,8 호흡을 했더니 기혈이 빠르게 순환
되는 기분을 느낀다.
군대에서 구보를 할 때 숨을 두 번씩 끊어서 코로 들이
마시고 두 번씩 입으로 내뱉는 복식호흡법을 배워 지금까지
유용하게 사용했는데 오늘 산을 오르며 새로운 호흡법을
써보니 의외로 어렵지 않고 괜찮다.
다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산길은 제법 가파르다.
높이가 해발 500m도 되지 않아 쉬울 거로 예상했는데
의외로 힘들다.
힘들면 어떤가, 힘들면 힘든 대로 오르고,
더 힘들면 쉬었다 가고 그러다 보면 정상에 오르지 않겠는가.
힘들게 오르내리는 등산은 어쩌면 한 편의 내 인생드라마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산 이름은 '낙가산'이다.
옆에 붙은 산도 '것대산'으로 이름이 특이하다.
예전 강화 석모도 낙가산에도 올랐는데 그곳에는 보문사와
눈썹바위가 있었다.
이 낙가산엔 무슨 전설이 있고 무엇이 있을까.
설명서에도 없고 자료를 찾을 수 없으니 그냥 산에나
올라야겠다.
이만 평이 넘는 넓은 운동장과 사대(射臺)가 수십 개나 되는
김수녕 양궁장이 시야를 압도한다.
청주 출신 김수녕 선수는 우리나라 양궁계의 신궁이자
불세출(不世出)의 영웅이다.
여성에게 수컷 웅(雄) 자를 쓰는 영웅 호칭이 좀 이상한가.
올림픽에서만 금메달 4개, 은메달 1개, 동메달 1개를 따고
1993년에 은퇴를 했으니 그녀가 활약한 후 어느새 30년
세월이 흘렀다.
우리나라 양궁은 김수녕, 김진호, 박성현, 서향순, 장혜진,
기보배 등 기라성 같은 선수들이 나와 올림픽에서
금메달 27개, 은메달 9개, 동메달 7개를 딴 최고의 효자
종목이다.
사람에게는 격(格)이 있다.
사람 중에서 가장 잘난 사람은 성(聖)이다.
그다음으로 현(賢)을 치는데 둘을 합치면 성현(聖賢)이 된다.
유가(儒家)에서는 공자를 지성(至聖), 맹자를 아성(亞聖)으로
친다.
중국에서는 역사가 사마천을 사성(史聖), 서예가 왕희지를
서성(書聖), 시인 두보(杜甫)를 시성(詩聖)으로 부른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에게 성현(聖賢)을 붙인 경우는 기억이
나지 않으니 공부를 더해야겠다.
이밖에 성(聖)과 현(賢)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남에 비해
탁월한 사람을 영(英), 준(俊), 호(豪), 걸(傑)로 일컫는데,
매우 빼어난 능력자를 영준(英俊), 영호(英豪), 준걸(俊傑),
호준(豪俊)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비록 여성이지만 한때 나의 우상이기도 했던
김수녕 선수에게는 어떤 호칭이 잘 어울릴까.
나는 신궁(神弓)으로 불리는 그녀에게 감히 성궁(聖弓)
이라는 별칭도 함께 주고 싶다.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며 오르다 '으름덩굴'을 만났다.
비를 흠뻑 맞은 초록의 으름덩굴은 빛나는 생명이다.
청주에는 나의 지인이 많다.
7남매 중 서열 1, 4, 5, 6번이 청주에 살고,
군에서 제대할 때까지 변치 않았던 여자친구와 초중학교
학연을 가진 친구들도 여럿이다.
산에 오르며 한번 생각에 빠지면 과거, 현실과 미래까지
수십 년 세월이 오간다.
낙가산이야말로 나의 사유(思惟) 창고 역할을 충실히
해준다.
13;00
낙가산 정상에 올랐다.
아주 작은 정상석과 무슨 용도인지 모르겠지만
컨테이너와 운동기구 몇 점, 그리고 거대한 통신탑이
멋진 정상의 풍경을 기대했던 나에게 실망을 안겨준다.
산 정상에 관리가 되지 않아 황폐해진 누군가의 묘(墓)가
눈에 띈다.
483m의 낙가산 정상에 묘를 썼으니 무슨 사연이 있을까,
예전 2014년 3월 26일 올랐던 전라도 순창 회문산(830m)
정상에서 여기저기 산재한 수십 기의 무덤을 목격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회문산은 정상인 회문봉을 중심으로 말이 하늘로 올라가는
천마승공형(天馬昇空形)과 말이 물을 먹는 형상인 갈마
음수형(渴馬飮水形)으로 명당을 찾는 전국의 풍수가들이
수시로 모여들고 정상과 능선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암반
위까지 묘소를 써 거대한 공동묘지가 되었다.
이 묘도 후손의 발복을 위한 풍수와 관련된 묘일까,
산정상으로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이 아니고
장군대좌형(將軍大坐形)도 아닌데 말이다.
아무리 봐도 명당자리가 아닌 것 같은데 힘들게 이곳에
왜 묘를 썼는지 아리송하다.
14;00
낙가산 산행이 끝나간다.
3월은 동창친구들의 장수사진 촬영으로 부산했고,
4월은 소장용 액자를 배부하느라 한 달이 훌쩍 지나갔다.
신장암 등으로 4월 20일까지 버티지 못할 거 같다던 어느
동창은 장수사진 촬영 후 치료가 잘 진행되는 모양이다.
어쩌면 장수사진의 플라세보 효과(placevo effect)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비구름은 다 물러갔다.
내 손가락보다 작은 두꺼비 한 마리가 떡갈나무 잎사귀에
앉아 휴식을 취한다.
이렇게 무방비로 노출되면 지나가는 새의 먹이가 되겠지.
나뭇잎을 살짝 흔들어서 땅으로 뛰어내리게 한다.
2024. 4. 24.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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