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3. 23. 11;00
전철을 타면 고대산에 갈 수 있을까,
신탄리역으로 가는 대중교통을 이용할까 고민하다
승용차로 고대산에 왔다.
사람들은 고대산(高臺山 832m)이 때 묻지 않은 산이라
했다.
군 장병들이 곳곳에 폐타이어로 계단을 만들어 안전한
산이라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해발 고도 832m로 그리 높지 않은 고대산,
연천과 철원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등산이 허용된
산(山)으로는 북한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산이라고 해
궁금했던 고대산을 오른다.
고대산 들머리에 '금낭화'가 곱게 피어 나를 환영한다.
금낭화는 토질이 산성이면 흰색이나 연분홍색으로
피는데 꽃색깔이 붉은색에 가까우니 이곳 토질은
알칼리성에 가깝겠다.
시기가 늦어 얼레지와 바람꽃, 처녀치마 등을 기대하긴
어렵겠지만 서울근교보다 개화기가 늦으니 다른 꽃을
볼 수 있겠지.
고대산이라는 지명은 큰 고래라는 '신탄' 지명에서 연루
되었다고 한다.
땔나무를 사용하는 온돌방 구들장 밑으로 불길과 연기가
통하여 나가는 고랑인 방고래를 이르는 것으로, 산의 골이
깊고 높아 고대산이라는데 나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나는 산을 결정할 때 지도를 펼쳐 전체를 숙지하고,
예정된 산은 어떤 산일까 설렘 속에 무한 상상을 하기도
한다.
숲으로 스며든다.
친구의 배낭에 수납한 빵,
연천 신서면 카페에서 산 '갈립마늘빵' 냄새가 구수하다.
수억겁년의 세월이 내려앉은 바위를 보며
기백산 정상(1,331m) 부근의 책바위인 누룩담과 부안의
채석강이 생각난다.
규모는 작지만 바위 하나하나가 책을 얹어놓은 서가로
보이기도 하고, 켜켜이 쌓은 시루떡으로도 보이니
내 나름대로 '고대 책바위'라고 이름을 지어본다.
11;20
고대산 초입부터 참 험하다.
첫 번째 나오는 정자까지 돌과 계단만 밟고 올랐다.
고도계를 확인하니 336m라 아직도 500m나 고도를 올려야
하는데 이렇게 돌길과 계단만 계속 나온다면 내 무릎이
무사할지 모르겠다.
인적이 끊긴 산에서 등산객 한 명이 내려오기에 옆으로
피해서 양보를 한다.
교차하기 힘든 좁은 산길에서 마주치면 누가 먼저 양보를
해야 할까.
물론 차량의 양보 순서와는 다르지만 오르는 사람이 조금
더 힘드니까 내려오는 사람이 잠깐 기다려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고속도로에서 특별한 장면을 목격하였다.
포천행 고속도로에서 경찰 순찰차가 요란한 사이렌과 함께
경광봉을 흔들며 지그재그 운전을 한다.
무슨 일일까.
혹시 대통령이 지나가나 호기심이 발동하여 전방을 주시
하는데, 경찰차가 타차량의 속도를 줄이게 하는 행동으로
인해 질주를 하던 차량들이 일제히 속도를 줄이고 서행을
한다.
한 2km 정도 서행을 하는데 1차로에서 승용차 세대가
정차 중이다.
사고가 났고 2차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경찰차가 다른
차량들의 서행을 멋지게 유도한 거다.
정속주행을 하고 방어운전과 양보운전을 하였어도 저런
사고가 났을까.
나는 1987년 운전면허를 땄고 첫차는 옵션으로 에어컨이
달린 '포니 2'였다.
초보운전자 시절 운전을 하며 라디오를 켰더니 교통
방송에서 당시엔 흔하지 않은 15년 무사고 운전자와 MC의
대화가 진행 중이다.
MC가 무사고 운전 비결을 물으니 그 사람은
"무사고 운전 비결이요? 비결이 따로 있나요, 양보입니다.
그런데 양보를 하려고 마음을 먹을 때는 이미 늦었어요,
마음먹기 전에 몸이 이미 양보가 되어있어야 사고가
나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들으며 나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은행영업에서 한때 제일 중요한 것을 친절로 꼽았고,
직원들에게 수시로 cs(고객만족, customer satisfation)
교육을 진행하였다.
롤 플레잉(role playing)이라는 역할연기로 친절에 대한
반복교육을 했는데,
"친절 또한 친절하겠다는 마음을 먹기 전에 이미 친절이
몸에 밴 행동이 나와야 된다'를 강조하였고,
방배서 지점장 때 cs평가에서 전점포 중 1위를 하여 다른
지점장들이 견학을 오기도 했다.
물론 나는 37년째 무사고 운전자로 면허갱신을 눈앞에
두고 있다.
첫 번째 나온 육모정 정자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바람 불어 좋은 날, 새소리 활기차 좋은 날이다.
이 정자를 지나면 말등바위가 나오고, 거친 칼바위 능선이
나오겠지.
접적지역(接敵地域) 답게 철근 콘크리트로 만든 벙커를
만났다.
벙커는
방어력을 중시하며 내부의 인원과 장비를 보호하는 '방공호',
내부에 들어가는 무기와 장비를 이용해 활동하는 '엄폐호',
또는 공격에 특화된 요새인 '토치카'를 말한다.
이곳은 '특화점 벙커'이다.
전투를 진행하는 동안 적의 화력에 무력화되지 않을
정도의 방어력을 가진 방호벽의 두께와 기관총을 거치할
정도의 총안구가 특징이라 뒤로 돌아가 안을 보니 제법 큰
벙커이다.
11;28
한참을 올랐다고 생각이 드는데 겨우 340m를 올랐다.
제대로 된 이정표일까 의구심이 든다.
정상을 밟고 하산을 하며 내 의구심(疑懼心)은 정확히
맞아 거의 700m 오차가 생긴 이정표를 수시로 발견했다.
육모정을 지나 말등바위를 만났다.
아래는 천길 만길 낭떠러지라 얼마나 깊은 수직절벽인지
가늠할 수가 없다.
12;50
출발한 지 1시간 50분 만에 칼바위길을 오른다.
좌우는 높이를 알 수 없는 절벽으로 오싹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군에서 제대 후 올랐던 공룡능선에서 느꼈던 위기감이
여기에서도 비슷하게 감지가 되는 거다.
스틱과 양쪽에 있는 안전줄을 잡고 천천히 오르는 수밖에
없다.
13;35
대광봉(810m) 정상에서 나 홀로 등반하는 두 사람을
만났다.
2코스를 오르며 대단히 힘들고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한 사람은 우리가 하산을 예정한 3코스에서 올라왔고,
또 다른 사람은 2코스에서 올라왔다는데 홀로 등반을
하다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가끔 나 홀로 등반을 즐기기도 하는데,
검단산(657m)이나 객산(301m) 등 비교적 낮으며,
위험구간이 적고 등산객이 많아 안전하다고 생각이 드는
산 위주로 혼자 자주 올랐다.
산에서 옆의 사람과 대화하면서 오르는 것과
조용히 혼자 가는 것 중 하나를 택하라면 어떤 걸 선택할까.
나는 혼자가 아닌 동행을 선택할 것이다.
물론 혼란을 피하기 위해 혼자를 택할 수도 있겠지만
여럿과의 동행은 친밀한 인간관계를 나타내는 기준이
될 수도 있겠고 서로를 보호해 주고 지루하지 않아 좋다.
이 나이에 어떻게 늙어갈지 예측할 수 있는 모델은
혈압과 당뇨수치 등 건강지표를 따지는 게 아니다.
50과 60대를 거치며 사람은 누구나 시간이 한정적이라는
명확한 사실을 깨닫는다.
나랑 동행하는 친구들과 산에서 대화를 하는 것만으로도
좋기 때문에 굳이 삶의 지표가 맞지 않는 친구와 아까운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
가까운 친구들과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실에 집중하고,
작은 것 하나에도 서로 감사를 느끼는 우리 나이에 같은 곳을
향해 동행을 할 때 행복지수가 가장 높아지기 때문이다.
수십 년간 산을 오르내리며 동고동락(同苦同樂)을 한
친구들에게 우리 스스로에게 좋은 삶은 무엇일까를
묻는다.
이 나이에 좋은 삶은 서로 좋은 관계의 유지이다.
우리를 진정 행복하게 해주는 건 일시적인 사랑과 우정
보다는 우정과 사랑을 오래 유지하는 것이 최상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여기저기 따지지 않고, 이곳저곳에 있는 사람 고르지 않고
바로 내 옆에서 묵묵히 동행하는 친구들과 함께 말이다.
이곳은 서울근교보다 꽃피는 시기가 한 달 정도 늦다.
방향으로 봐서는 예전에 올랐던 감악산과 금학산으로
보이는데, 이름을 알 수 없는 산골짜기에 하얀 '아까시'가
한창이다.
13;35
산이 험해 하산 코스를 정하기 위해 각자의 의견을 묻는다.
우리가 오른 2코스는 위험한 구간이 많아 일단 제외하고,
1코스로 하산을 할까 망설이다 당초 예정대로 정상
고대봉을 밟은 후 3코스로 하산하기로 결정을 한다.
삼각봉(815m) 바로 밑에서 '큰꽃의아리'를 만났다.
세 시간 정도 산행 중 줄딸기꽃 말고 처음 만난 꽃이다.
2014. 5. 15일 방태산 1,400 고지에서 찍은 '큰 연령초'와
꽃 크기가 비슷한데,
큰꽃의아리를 찍으며 1분간 휴식으로 숨을 고른다.
< 큰꽃의아리 >
광대봉에서 삼각봉을 거쳐 고대산의 최고 정상인
고대봉까지는 평지에 가까울 정도로 순한 길이다.
오늘 처음 밟는 흙길이라서인지 오름길에 쌓였던 고단함이
슬그머니 사라진다.
14;26
세 시간 반 만에 고대봉 정상에 올랐다.
다른 사람들은 두 시간 정도가 걸렸다는데 우리가 너무
천천히 오른 모양이다.
정상은 360도 조망이 되는 일망무제(一望無際)로다.
거침없는 이 풍경을 보기 위해 땀 흘려 이곳에 오른 게
아닌가.
문득 고대산은 천사와 악마가 공존하는 산,
천국과 지옥이 공존하는 산이라는 생각이 든다.
은둔의 땅 북한은 여전히 박무속에 갇혀있고,
하얀 띠구름을 향해 몇 마리의 새가 날아간다.
북녘땅 하늘의 하얀 구름 띠는 마치 히말라야 설산으로
보인다.
철원평야, 6.25 전쟁 최대의 격전지인 철의 삼각지와
백마고지, 내가 수년 전에 올랐던 금학산과 감악산, 동원
예비군 훈련 때 올랐던 대성산 향로봉이 박무(薄霧) 속에
갇혔다.
땀 흘리며 힘들여서 올라온 산,
바로 여기가 천국이로구나.
천상에서 천하의 비경을 바라보는 나,
잠깐 신선이 되었다.
저쪽 산은 무슨 산일까.
갈짓(之) 자로 오르는 고갯길을 바라보며
군복을 입고 양구 동면 팔랑리와 돌산령을 거쳐 대암산으로
올랐던 그 옛날이 생각난다.
정상 한쪽에 서있는 정향나무의 향기가 솔바람을 타고
콧속으로 들어온다.
일망무제의 정경과 함께 들어오는 꽃향기는 선경으로 가히
손색이 없다.
천국의 풍경은 끝났고,
악마가 사는 지옥같이 지긋지긋한 하산이 시작된다.
하산 시작 후 10여 분 만에 나무등걸에 미끄러진
내 몸은 허공에 떴다가 친구의 다리에 걸려 멈췄고
2~3초간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
10여 초를 그 자세로 있다가 손발을 움직여보니 다행히
다친 곳이 없다.
자칫 대형사고가 날 정도로 하산길은 험하고 거칠다.
15;40
일행 중 한 친구가 근육선통인 '쥐'가 나 잠시 지체를 한다.
거의 직벽에 가까운 너덜길을 내려오다 잠시 근육이
경직된 모양이라 호루라기를 길게 불며 먼저 내려간
친구를 기다리게 한다.
쥐가 날 정도로 다리 근육이 혹사를 당했다.
근육의 수축과 이완을 담당하는 신경세포의 평형상태가
깨졌는데 얼음찜질을 할 수 없으니 마사지를 하는 방법밖에
없다.
16;40
고대산에서 유명하다는 '표범바위'를 지난다.
깎아지른 암반의 거친 면이 표범 무늬를 닮아서
표범바위라는데 멀리서 보니 용암이 흘러내린 주상절리로
보인다.
시간이 늦어 표범폭포 코스는 생략하고 하산을 서두른다.
거친 산의 모난 돌길을 내려오다 14년간 내 발을 지켜준
등산화도 지쳤는지 왼쪽 등산화의 바닥가죽이 벗겨졌다.
창갈이를 두 번이나 할 정도로 내 최애(崔愛) 등산화도
고대산에 질려 이별을 고한다.
밑창이 떨어져 나갔어도 다행히 하산하는데 지장은 없고
산길가에 핀 '괴불주머니'를 찍는다.
17;10
산행이 끝나간다.
여기 삼거리에서 10여분이면 출발지에 도착하겠다.
17;30
나의 고대산 산행은 끝났지만 아직 네 명이 하산하지 않았다.
20여분 후 두 명이 도착하고 남은 두 명이 여전히 산속에서
고전 중이다.
다행히 산을 잘 타는 친구가 마중을 나가 안전하게 하산을
하도록 도왔다.
정상의 풍경은 그 어느 산보다 좋았다.
그러나 거친 산길과 돌, 그리고 수없이 밟아야 하는 계단,
난이도가 설악산 공룡능선과 비슷한 칼바위길,
700m나 오차가 나는 이정표,
고즈넉한 분위기가 없는 산,
거친 산길을 이겨내지 못한 내 등산화,
친구의 근육경련,
각자도생(各自圖生)으로 하산을 한 산,
평소 술을 즐기지 않는 친구가 하산 후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는 모습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고대산 산행은
이렇게 끝났다.
나는 산을 사랑한다.
40여 년 전부터 오르내린 산,
어떤 산이라도 환장(換腸)을 할 정도로 좋아한다.
그러나 내가 이 고대산을 계속 사랑할 수가 있을까?
2024. 5. 23.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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