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2. 13. 06;30
짙은 어둠 속에 눈보라가 안경을 때린다.
20여 분 기다리니 검단산 경유 배알미리 행 마을버스가 내 앞에 선다.
밤새 내리고, 지금도 소복이 내리는 눈은 발목까지 빠져 들고,
스패츠와 아이젠을 차니 발걸음이 한층 가볍다.
바람은 없고 눈이 안경을 때리니 좀 더 조심을 하며 어둠 속에 찬공기를 가르며 검단산을
올라간다.
오늘은 철저히 혼자만의 산행인데, 걷고 있는 내가 행복하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누리는 것? 깨달음의 경지?
그저 무념무상(無念無想)이다.
여명이 밝아 오며 흰 눈이 보석처럼 빛난다.
앞만 보고 정신없이 달려온 나는 누구일까?
자세를 낮추고 설원의 향연을 보며 고도를 높인다.
리기다소나무 군락지를 벗어나니 태어난 지 한 달 정도 되는 강아지 두 마리가 따라온다.
나는 '토토'를 기르며 사랑의 기쁨을 알았고 이별의 슬픔을 배웠다.
생명과 생명간의 소통을 배웠고, 눈만 보면 무엇을 원하는지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비무장으로 왔으니 줄 게 아무 것도 없어 괜히 강아지에게 미안하다.
입춘이 지나니 영하의 날씨에도 얼음은 녹기 시작하고, 계곡물소리가 제법이다.
물은 아래로 아래로만 흐른다,
생명의 근원인 물이 위로 흐르는 것은 아무도 보지 못했다지?
아래로만 흘러갈 뿐만 아니라, 돌과 바위가 있으면 피해 가면서 흐르는 것이 물이다.
저항이라는 것을 모르며, 부드럽고 자유스러운 것이 물인데.
노자(老)子는
"최상의 선(善)은 물과 같은 것이라야 한다.
물은 모든 생물에 이로움을 주면서 다투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으로만 흐른다."라고 하며,
"천하에서 가장 부드러운 물이 천하에서 가장 단단한 바위를 향하여 돌진하고,
형체도 없는 기(氣)는 빈틈이 없는 곳에서도 침투한다."라고 한다.
노자는 물에 대해서 또 다시
"천하에 물보다 더 부드럽고 약한 것은 없다. 그러나 굳고 강한 것을 공격하는데는 물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 그 어떤 것도 물과 바꿀만한 것이 없다" 라고 말한다.
나는 그러한 심오한 사상을 잘 모른다.
그저 물이 자연적으로 흘러가듯,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싶을 뿐이다.
전화벨이 울려 받으니 재백이 목소리다.
목소리 상태가 매우 안 좋고~"3차 항암치료 및 임상실험도 실패로 끝난 것 같으니
이대로 죽어야 하는가?"라고 하는 말을 들으며 가슴이 저며 온다.
비록 백혈병이라는 거대한 적과 싸우면서도 항상 희망과 웃음을 잃지 않았는데,
이를 어쩌나! 탄식만 나온다.
이제 전반기 인생의 막은 내렸으니 후반전의 새로운 막을 시작하여야 하는데,
지나간 전반전은 잊어버리고, 즐겁게 후반전을 살아갈 설계를 해야 하는데,
너무나 아파하니 가슴이 칼로 베이는 듯 에리다.
난 비교적 운이 좋은 탓인지,
뇌종양과 척수공동증이 악화되어 마비가 시작되며, 대수술 끝에 희망을 찾았는데,
문득 알 수 없는 설움이 오며 눈물이 난다.
당장 달려가도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고 거친 내 숨소리만 들린다.
곧추선 낙엽송의 기개가 대단하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숲은 평화롭다.
사람의 소리가 아닌 새소리가 적막을 깬다.
무슨 새일까?
귀를 기우리니 "따따따딱" 딱따구리 소리이다.
오색 딱따구리일까, 까막 딱따구리일까?
아무리 둘러봐도 찾을 수 없다.
정상에 이르는 길은 자갈과 돌로 이루어진 너덜지대인데 눈에 묻혔다.
바람에 지친 나뭇가지에 눈꽃이 피었다.
설원을 누비며 올라올 만하다.
하얀 백지 위에 그림을 그리듯 하얀 설원에 내 발자국을 남긴다.
생강나무, 소나무, 잣나무, 화살나무, 진달래나무에 설화가 피고 상고대도 피었다.
상고대는 영하 5도 이하에서 습도78%, 바람이 초속 3m 이하에서 피는데,
오늘은 설화와 상고대가 같이 피었다.
하나하나씩 돌을 쌓은 돌무덤 위에도 눈은 쌓였고,
저 돌 틈 사이에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매서운 바람과 추위를 피해 있을까.
느티나무 밑 휴식 장소에 이르니 몇 번 먹이를 준 인연으로 나를 알아 본 고양이가 먹을 것을
달라고 내 다리를 툭툭 친다.
우리 강아지 육포를 훔쳐와 주리라 생각했었는데, 오늘따라 배낭엔 크라운산도뿐이니
던져줘도 선뜻 먹지 않고 심술을 부린다.
현 위치가 해발 450m 지점인데,
이 고양이는 금년 겨울 매서운 추위에도 꿋꿋하게 버티며 저를 버린 주인을 기다리며 이곳에서
사는데 배가 불룩하니 임신응 했는지,
아님 먹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많이 먹어 배가 기형적으로 되었는지 정상의 모습은 아니다.
검단산 정상에 사는 검은 고양이는 새끼를 세 마리나 낳았다고 한다.
소나무, 잣나무에 얹어진 눈의 무게가 꽤나 나갈 텐데, 저 가지들이 버틸 수 있을지.
동박새도 아닌데 이름 모를 새 두 마리가 운다.
'새' 공부시간이 너무 어려워 농땡이를 쳤더니 도저히 모르겠다.
사위질빵 넝쿨에도 설화가 피었다.
지난주 정기산행 시에는 솜털만 남았었는데, 사위질빵은 줄기가 연하고 잘 끊어져서 붙여진
이름이다.
2010. 2. 6 정기산행시 촬영한 <사위질빵>
우리나라에선 사위가 오면 씨암탉을 잡는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사위 사랑이 지극했다.
그런 옛 풍습 가운데 추수 때 사위를 불러다 일을 시키는 예가 있는데,
귀한 사위가 힘들까봐 장모가 다른 일꾼들 몰래 사위가 짊어진 짐을 덜어내곤 했다.
그걸 본 사람들이 잘 끊어지는 연약한 사위질빵으로 지게 멜빵을 만들어도 안 끊어지겠다며
사위를 놀렸다 하여 그 뒤로 사위질빵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세월의 무게일까?
눈의 무게일까?
누운 소나무의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다.
붉은 태양의 자리에 희뿌연 안개와 검은 먹구름이 자리하며 요동을 치더니,
잠시 구름이 걷히며 하늘이 열린다.
정상의 매바위와 나무들에 하얀 눈꽃이 피어 풍경은 보석처럼 빛난다.
나는 풍경을 눈으로 보고, 카메라에 담고 가슴에 담아간다.
설경 하나하나를 눈에 새기며, 산속에 동화되어 산과 대화를 한다.
산은 안다, 나를 안다.
검단산 산신령이시어!
전지전능한 신이 계시다면 하나님도 좋고, 예수님도 좋고, 부처님도 좋으니
내 친구 재백이에게 힘을 주소서!
병실에서 아스라이 꺼져가는 친구에게 '살아 있음' 그 하나로 더 없는 기쁨과 감사의 눈물을
흘리게 하소서!
2010. 2. 13. 검단산에서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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