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느림의 미학 88 바람과 눈의 <백덕산>

김흥만 2017. 3. 24. 21:05


2010.  1.  27.

번개산행은 또 다른 맛이다.

오후 늦게 눈이나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는데 얼마나 내리려나. 

 

한국의 100대 명산에 들어가는 백덕산은 진즉부터 알았지만 오늘이 초행이다.

십여 년 전 인근에 있는 금당산을 등반한 며칠 후에 일행이었던 한 사람이 자살한 이후로

이 지역에 대하여는 별로 호감이 가지 않았다.

 

산을 힘 있게 잘 타는 영재가 엄청 힘들었고, 등산로에 암벽 등 위험구간이 꽤나 있다고

산행책자에 나와 있어 관심이 없었는데,

눈이 녹기 전 눈의 산 백덕산을 가자고 제의가 들어온다.

 

새말 IC에서 조반을 마치고 문재(800m)로 올라서니 안내도가 말끔하게 서있다.

 

 

입구의 다리를 건너 잘 정비된 등산로로 올라서니 초입부터 된 비알이다.

숨은 턱밑까지 차오르고, 10여 분 오르니 임도가 나오며 산악회 리본이 많이 붙은 쪽으로

올라선다.

 

들머리에서 정상까지 5.6km 안내판이 서있었는데, 급경사를 300m이상 올라왔는데도

또 5.6km 안내판이 서있다.

여기도 가리왕산 같이 이정표가 엉터리면 고생을 하겠지.

 

쭉쭉 뻗은 낙엽송 군락의 주능선이 나오고 고도계는 1,000m를 가리킨다.


훤히 트인 헬기장이다.

가시거리 60~100여 km가 될 정도로 오대산, 계방산, 선자령의 모습에 눈이 시리다.

오랜만에 보는 겨울 산의 아름다움이다.



어느 산이던 저마다의 색깔을 가지고 있는데 산의 그림이 너무나 아름답다.

겨울 산은 다른 계절과 달리 또 하나의 매력이 있다.

즉 감춰진 산의 속살을 보는 즐거움을 더한다.

얼굴에 와 닿는 찬바람의 매서움에 잠시 몸이 긴장된다.

 

차세대 에너지원으로 부각되고 있는 물박달나무, 세찬 바람에도 미쳐 떨어지지 않은

당단풍나무의 말라붙은 잎사귀, 물푸레나무의 선명한 무늬,

수피가 많이 벗겨진 자작나무 등이 눈 녹은 백덕산의 속살을 보여준다.

 

 사자산의 3거리 갈림길에서 거친 숨을 달랜다.

 

현재고도 1,125m.

문재에서 80m 오차가 발생했던 고도계가 정상으로 돌아왔는지 거의 맞는다.

이곳에서 700m만 가면 사자산이라 불리는 <사재산>이나, 통상적으로 다 같이 백덕산으로

불린다.

 

동쪽의 석청꿀, 서쪽의 옻나무골, 남쪽에는 흉년에 먹을 수 있는 흙,북쪽엔 산삼이 있다하여

사재(四在)산으로 불리기도 한다.

 

최근 지진참사로 수십만 명이 죽은 '아이티'란 중남미 국가에선 배 고픈 백성들이 진흙을 발라

구운 쿠키로 연명한다고 하는데,

옛날 우리 조상들도 흉년과 기근이 들었을 때 이곳에선 진흙을 먹었나 보다.

요즘 국회의원들이 세종시나 4대강 가지고 지랄하는 꼴을 보면 우리나라 장래도 걱정이 된다.

 

백덕산(白德山 1,350m)은 예전엔 아주 오지였다.

강원도 횡성, 영월, 평창 3개 군의 경계를 이룬다는데, 3도봉이 아니고 3군봉이라 하면

적당할 것 같다.


그만큼 외진 곳에 자리한 덩치 큰 산인데, 이 산은 기묘한 암봉과 아람드리 노송군락이

어우러진 멋진 분위기와 겨울엔 화려한 눈꽃으로 겨울에 특히 인기를 끈다 하는데,

오늘은 철저히 우리 다섯 명뿐이다.

 

비교적 험한 산세와 계곡, 돌이 별로 없는 흙길, 능선 곳곳의 기암절벽이 소나무와 조화를

이루고, 여름의 녹음, 가을의 오색찬란한 단풍, 겨울엔 눈꽃이 만발한 설경 등으로

등산객들의 사랑을 받을 천혜의 조건을 가졌다.

 

정상까지 3.4km 남았으니 벌써 2.2km를 걸었다.

계곡으로 들어갈수록 바람소리가 귀를 때린다.

몸은 힘들어도 눈길 닿는 곳마다 아름다운 풍경이다.


왜 우리는 세상의 수많은 길을 두고 이렇게 힘든 산길을 걸을까.

정상가는 길이 힘드니 의욕만 갖고 빨리 걸을 수 없기에 천천히 뚜벅뚜벅 올라간다.


나는 이 길에서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얻고, 무엇을 알고, 무엇을 비웠는가.

욕심을 버리면 보이지 않던 것도 보인다기에 그저 내 삶을 자연에 맡기며 살아가야겠다.

 

삼성전자의 10억 연봉에 60억 자산가인 부사장이 자살했다고 연일 방송에 나온다.

남부럽지 않은 위치에서 2년 연속 좌천을 당한 굴욕감에 마지막 선택을 한 건지

해소되지 않는 스트레스에 숨가쁘게 달려오던 삶이 주춤거리면서 성급한 결정을 한 모양이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부와 명예가 아닌 느림의 여유인데 너무나 아쉽다.


암튼 반도체 분야의 큰 인물이 저세상으로 갔다.

두려움의 원천은 미래에 있고, 미래로부터 해방된 자는 겁날 게 없는데 한발짝 물러서서

단 얼마동안이라도 자연을 벗삼아 자연에 맡기며 살아가면 간단한 것을,

마음을 비우고 산이라는 종합병원에서 단 하루만이라도 살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오래전,

상일동지점 차장으로 근무 시 부지점장 승진에서 누락된 거 같다는 본부장의 전화를 받고,

나는 심한 좌절감을 느낀다.

업무능력과 실적에서 난 항상 당당했고, 인정을 받아왔는데 누락이라니?

8대 1이라는 어려운 시험을 거쳐 대리가 되고, 차장승진 시 난 항상 선두주자였다.

 

허탈한 마음으로 난 배낭을 꾸린다.

주위에서 올 위로전화와 시선이 부담스러우니,

지리산 종주를 하며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버리고자 훌훌 떠나기로 하는데,

다행히 떠나는 날 아침 승진하였다는 통보를 받고 기분좋게 한잔을 하며 해프닝으로 끝난다.

 

몸과 마음이 지친 자여!

산이란 대자연에 의지하라고 나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언제나 삶이 나를 짓누르거나 힘들 때엔 산에다 그 조각을 묻으면 되는 것이다.

명예, 권력, 지위, 돈, 승진 등이 세월이 지나고 한 발짝 물러서서 보면 아무 것도 아닌데

왜 그리 집착하였나 우습기도 한 것이 인생이다.

 

까악 까악!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정적을 깨트린다.

꾸미지 않은 자연의 순수함을 잠시 잊었으니 잠시나마 내가 자연의 훼방꾼이었나 보다.


봉우리를 다섯 개를 넘으니 1165m봉이다.

멋진 들메나무의 빈속을 들여다 보며 허기진 뱃속에 초콜릿 한 알을 입에 넣는다.

 

책을 수만 권 겹겹이 쌓아놓은 형상인 부안 격포의 채석강보다 규모는 작지만,

여기도 수천 권 책을 쌓은 작은 채석강이 나온다.


이 기암괴석은 노송과 어우러져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부드러운 육산에 빼어난 암릉미까지 갖추고 있으니, 다듬어지지 않은 원시의 묘한 매력과

자연미를 함께 느낀다.

 

다져진 눈길이 미끄러워 아이젠을 찬다.

2km 남은 이정표 앞에서 문득 고개를 들고 법흥 계곡과 고산준령의 유장한 능선을 굽어본다.

백두대간길인 것 같은데 저 산이 태기산, 청태산일까?

 

나침반이 잘 안돌아간다.

고장일까, 아님 자석 성분을 가진 바위가 근처에 있을까?

 

작은 당재에 이르니 시장기를 느낀다.

경호가 싸온 삶은 계란으로 요기를 하고 능선으로 올라서니,

멋진 금강송 사이로 근육질을 자랑하는 설악산과 백두대간의 조망이 일품이다.

 

정상까지 1.2km 남은 '당재 삼거리' 이정표이다.

두 시간 반 만에 정상에 오른 종승이 기다리다 지쳐 마중을 나온다.

힘든 걸음으로 천천히 올라가니, 히말라야 고산등반 보법이라고 놀린다.

 

왼쪽으론 관음사와 5대 적멸보궁이 있는 법흥사 계곡길이다.

법흥리 계곡을 내려다보니 찌들었던 가슴이 확 트인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 있어서 일까?

 

적멸보궁은 우리나라에 5곳이 있는데,

오대산 상원사, 태백산 정암사, 영취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과 더불어 이곳 백덕산 법흥사이다.

법당에는 부처님을 모시지 않으며, 먼옛날 고승들이 인도에서 가져온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다.

 

지난번 법흥사 등산코스가 매우 힘들었다는 영재의 투덜거림에 오늘은 문재에서

출발하길 잘한 것 같다.

법흥사 코스로 왔으면 난 아마도 무지하게 힘들었을 거다.

 

썩은 나무 등걸에 운지버섯이 피어있고, 정상까지 0.5km 남은 삼거리이다.

 

나무로 만들어진 개선문은 기막힌 뷰~포인트이다.


사람이 만든 그 어느 작품보다도 위대하다.

위대한 생명력에 오히려 두렵기까지 하다.

 

13개의 봉우리를 넘고 넘어 이제 정상이다.

산 속의 산, 산 중의 산, 산 넘어 또 산, 저 산 넘어 또 산.

거대한 산군의 파노라마를 보노라니 소름이 끼칠 정도로 아름답다.


장쾌하고 장엄하게 근육질을 자랑하는 산군들,

잠시 정신이 몽롱해지고 가슴이 뛰며 오르가즘을 느낀다.

 

언제나 산 정상에 서면 두고 왔던 세상으로 돌아가는데 오늘은 더 머무르고 싶다.

삶이라는 여정은 등산과 같다.

쉬운 길~힘든 길~어려운 길~위험한 길~오르막 길~내리막 길~순한 길~너덜 길로 이어지는

산행 길은 영락없는 삶의 여정이지.

 

잠시 구름 속에 숨었던 태양은 나오고 바람은 거칠다.

왼쪽으로 용문산과 백운봉, 치악산 비로봉과 매화산이 보이고 구봉대산 뒤로 감악산이 보인다.

 

동쪽으로 중왕산, 가리왕산과 청옥산이 뚜렷하게 보이고, 가운데 두위봉과 함백, 태백산의

대간이 보인다.

 

남쪽으로 구름의 바다 위에 섬처럼 대미산, 월악산이 점점이 떠있다,

북쪽으로 문재 넘어 오봉산, 청태산과 청태산 넘어 더덕이 많이 생산되는 태기산이다.

북동쪽으로 십년 전 곰취와 두릅을 배낭에 가득 채웠던 중대가리봉이라고 하는 승두봉과

오대산, 계방산, 동대산이 조망된다.

 

오랜만에 보는 멋진 조망이다.

갈수 있는 데보다 갈 수 없는 곳이 더 많은데 저곳을 바람과 구름은 갈 수 있겠지.

 

카메라를 잘못 조작한 흑백사진에서 산 위치를 찾기가 힘들어 지도를 본다.


칼바람과 따사한 햇빛이 교차한다.

세찬 바람에 맞서지 않고 몸을 잔뜩 낮춘 나무들이다.

'캐나다 밴프 로키산맥' 빙원 근처의 30~40cm 되는 나무들의 수령은 300~500여 년

되었다 하는데 이 나무들의 나이는 얼마나 되었을까?

 

누군가는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고 하는데,

나는 저 나무들 같이 살아남은 자가 강한 자라고 말하고 싶다.

 

산의 깊은 숨소리가 들린다.

난 자연과 호흡하는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

삶의 무게를 더하며 자연과 함께하는 일은 너무 좋다.

 

이젠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야 하겠지.

저 계곡과 능선은 내기 지금까지 자연과 대화하며 걸어온 길이다.

 

사람의 손때가 소나무의 변신을 가져왔다.

작품일까 아님 찌들은 소나무의 비명이 들린다.

 

거대한 바위 옆에 죽어서도 꿋꿋하게 서있는 구상나무 고사목은 무엇을 원할까.

죽으면 쓰러져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의 이치련만,

아직도 무엇이 아쉬워 누굴 기다리는 걸까?

 

쓸모없다고 잘못 알려진 아카시나무만도 못하다.

아카시나무는 죽으면 넘어져 썩으며, 다른 식물에 뿌리혹박테리아라는 공생균을 나눠주고,

쓰러지기에 다른 식물이나 자기의 자손에게 햇볕과 영양분을 내어 주는데 말이다. 

 

한 시간 정도 눈길을 내려오니 거대한 바위에 추모동판이 있다.

누가 사망한 모양이다.

 

하산 길 한 시간 반,

먹골재인데 아직도 해발 1,000고지이다.

350m 고도를 낮추었어도 2km가 남았으니 꽤나 긴 거리이며, 계속 40도가 넘는 급경사이다.

등산화 앞쪽으로 발이 쏠리니 끈을 다시 조여야겠다.

 

오를 때보다 내리막길이 더 위험하다.

지난번 비 오던 날 축령산 하산 길에서 미끄러진 문성이의 레키 스틱도 부러졌고,

나 또한 검단산 하산 길에서 미끄러지며 내 레키스틱도 두 동강 나 팔이 부러질  듯 아픔이

있었는데, 조심하고 또 조심하자.

 

낙엽송 군락지의 곧추선 낙엽송의 기개에 숨이 막힌다.

귀한 노각나무도 보이고,

영하 10도의 추위에도 꽁꽁 언 계곡의 얼음 속에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니,

입춘이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다.

 

두 시간을 내려오니 먹골 종점이다.

문재길로 혼자 하산하며 차를 가지러 갔던 종승이는 아직 안 오고, 비가 내리더니 다시

눈발로 변한다.

 

우리네 인생도 종잡을 수 없이 변화무쌍한데 산의 날씨도 종잡을 수 없다.

조금 전까지도 파란 하늘을 자랑했는데 먹구름이 몰려와 눈을 마구 뿌려댄다.

 

눈발 날리는 양쪽 수 천 수 만 평 고랭지의 사방에 수확하지 않은 고추, 피망과 배추가

말랐다.

이 농민들의 가슴이 얼마나 아팠을까 가슴이 아프다.

 

그 무언가 사라져 가는 그리움 속에 밭에서 일하시던 어머니 얼굴이 나타난다.

이제 나도 며느리까지 보았으니,

어느덧 세월은 바람 따라 구름 따라 이만큼 흘렀나보다.

 

삶에 지친 초로의 한사람이 되었을까?

인생은 철저히 나 혼자만의 것인데, 앞만 보고 달려온 나의 뒷모습은 아름다울까.

앞으로의 여정은 미지의 세계인데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함박눈을 바라보며 편육과 함께 마시는 '봉평 메밀꽃 동동주'가 술술 들어간다.

막걸리 좋아하는 봉길 태영일 떼놓고 왔으니 이 죄를 어이 감당할꼬.

 

                                            2010.  1.  27.    함박눈 속의 백덕산에서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