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느림의 미학 89 용문 볼랫길

김흥만 2017. 3. 24. 21:08


2010.  2.  3.

영하 12도

입춘 전날치곤 매우 고약한 날씨이다.

새벽 5시에 날도 춥고 바람이 매우 차니 마스크를 지참하라고 문자를 띄우고도

정작 나는 깜박했으니 벌써 그럴 나이인가?

 

달리는 전철의 창밖으로 고즈넉한 우리 농촌의 모습이 보인다.

언제라도 기차여행은 마음이 설레며 푸근해진다.

 

볼랫길이라!

전날 양평군청 관광과에서 소개받은 트래킹코스인데 우선 낯선 이름에 마음이 끌린다.


전철종점인 용문역에서 내려,

역의 직원에게 볼랫길 안내도를 받아 시가지와 반대 방향인 오른편 광장으로 길을 나선다.

 

 

개통한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은 썰렁한 광장을 벗어나자 길가에 볼랫길 안내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표지판에는 볼랫길은 '보고 또 봐도 다시 가보고 싶은 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적혀 있다.

 

 

양평군 홈피에서는 용문역에서 10분 거리에 양묘사업장이 있고 다시 15분 후에 징검다리가

나온다고 하는데 도저히 방향을 잡을 수가 없다.

좌로? 우로? 

5분 정도 망설이다 마침 역에서 나오는 아주머니에게 물어보니 따라오라고 한다.

 

이런 왼쪽 1분 거리에 양묘사업장이 있는데 10분이 걸린다는 지도는 순 엉터리이다.

어느 누가 양평 군청홈피에 올렸는지 전형적인 탁상행정의 표본이다.

잊지 말고 시비를 걸어야지.

 

아주머니에게 고맙다고 하니 <괜찮아유>라고 답한다.

충청도 말은 재미난 부분이 많다.

어느 해인가 충청도 지방에 근무하는 후배지점장이 <됐유. 알았유> 하는데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하소연 한다.

 

<알았유>는 긍정의 대답이 아니다.

상식적으로 이해는 되지만 감정적으로 허락되지 않는 상황에서 하는 애매모호한

반응이자 상대를 시험하는 역질문이다.

따라서 이 대답을 긍정적인 yes로 인식하면 혼난다.

 

<괜찮아유>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두리뭉실한 대답이며,

<됐유>는 절대 부정이다.

'됐어유'라는 말을 진짜 된 것으로 알아들으면 100번 다 실패하기에,

 충청도에서는 <'그류'~'그려유'~ 즉 그렇게 해유의 준말>소리를 들어야만 긍정이다.

 

매서운 칼바람이다.

볼은 시리고 군밤장수모자로 바꿔 쓰니 비로소 머리가 따뜻해진다.

이렇게 매섭고 찬데 누가 바람을 여신이라고 사기를 쳤을까?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며 시멘트 포장길을 10여 분 걸으니 전나무 몇 그루가 서 있고,

승용차 한 대가 먼지를 뿌리며 지나간다.

 

볼랫길은 1코스와 2코스로 나뉘어져 있다.

어느 쪽을 선택하여야 할까?

1코스의 추읍산 코스는 4시간 반이고, 반대편인 용문산 코스는 2시간 반이며,

당초 인터넷에서 검색한 코스는 2시간이다.

 

볼랫길은 시작부터 헷갈린다.

볼랫길 출발지인 이곳에는 방향 표시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안내표지판으로 보았을 때는 표지판 앞에서 원덕역 방향인 오른편으로 가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처음부터 헷갈리니 계속 헷갈린다.

 

예상했던 방향과는 반대방향이다.

길은 자동차가 다닐 수 있을 만큼 제법 넓다. 

논바닥에는 추수할 때 사료용으로 갈무리 해놓은 둥그런 볏짚들이 눈길을 끈다. 

 

다문 8리' 마을입구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길가 한쪽은 텅 빈 논배미들이 을씨년스럽고,

다른 한쪽에 작고 어린 소나무 묘목들이 추위에 떨고 있는 모습이 안쓰럽기만 하다.

 

다문 8리 마을에 접어들자, 길은 마을 집과 집 사이 좁은 골목으로 이어져 있고, 

처마 밑에 놓여 있는 장독대의 옹기 항아리 몇 개가 정겹다.

마을길을 지나자 개울가에 마른 갈대밭이 있는 쓸쓸한 개울이 나타난다.

'흑천'이라고도 불리는 '삼성천'이라나.

 

문득 1980년도인가  30년 전 송파지점 근무 시 이 곳에서 쪽대로 민물고기를 잡으며,

천렵을 즐겼던 기억이 난다.

그때 같이 즐겼던 옛 동료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들 중 한 사람은 10여 년 전 폐암으로 작고했고, 또 한 사람은 취침 중 심장마비로

별세하였으며, 한 명은 자살을 했다.

나머지 동료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살까?

 

여기까지 15분이 걸렸는데, 지도상에선 25분으로 되어 있고,

얼음장 밑을 흐르는 물을 가로질러 커다란 돌로 놓은 징검다리가 있다.

 

꽁꽁 언 얼음 밑으로 조금씩 녹은 물은 흐르고 제법 물소리가 난다.

내일이 입춘인데 매서운 추위와 바람도 계절의 바뀜 앞에선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때론 산처럼 당기고 물처럼 부딪치며 살았는데, 얼음 속의 맑은 물이 잠시나마 내 발걸음을

잡으며 물처럼 살라고 한다.

 

징검다리를 건너자 본격적인 '볼랫길'로 접어든다.

 

처음부터 된비알이다.

트래킹 코스라 하여 쉽게 생각했는데 경사가 만만치 않다.

트래킹화를 신은 구로가 걱정이 된다.


문성이 자기 스틱 두 개를 선뜻 빌려줘 안심이 된다.

미끄러운 눈길에 아이젠을 착용하려니 얼은 손으로 찰 수가 없어 망설이는데, 

눈치챈 인영이가 얼른 채워준다.

 

오르막 산길에는 자그마한 쉼터가 만들어져 있고, 작은 골짜기에 놓은 나무다리를

피해 올라간다.

천천히 느긋하게 걸어 능선에 당도하니 '섬실고개' 쉼터가 나온다.

 

길은 세 갈래인데 어느 쪽으로 가야 제대로 된 '볼랫길'을 트래킹 할 수 있을까?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앞서 가는 구로와 봉길이 의견을 따라 헬리포트 쪽인 왼편 능선길을 타기로 한다.

숲은 참나무, 모간주나무, 물박달나무, 생강나무, 오리나무, 소나무 등이 혼재된 전형적인

혼효림이다. 

 

30여 분을 걸어 올라가도 헬기장은 나오지 않아 고갯길에서 경호가 가져온 굴부침으로 발렌타인을

한 잔하니 온몸에 온기가 돈다.

 

 

잘못 든 길에서 헤매고, 이정표도 제대로 되지 않은 내리막길엔 싸구려 동아줄을 쳐 놓았고,

워낙 추우니 카메라 배터리도 금방 방전이 된다.

 

175봉에서 바라보는 조망이 일품이다.

탁 트인 시야가 시원하다.

가까이 내려다보이는 용문시가지가 손바닥만큼 좁아 보인다.

 

용문산의 우람한 산줄기도 손에 잡힐 듯 가까워 보인다.

왼쪽부터 백운봉(940m)~함왕봉(1064m)~용문산(1,157m)~문례재~중원산~도일봉으로

이어지고 뒷쪽으론 소구니산, 유명산, 대부산으로 이어지는 장쾌한 능선이 펼쳐진다.

 

왼쪽으로 '추읍산(583m)'이 나뭇가지에 가려 잘 조망이 되지 않는다. 

추읍산이라는 이름은 산의 한 쪽을 날카로운 칼로 베어낸 모습이 용문산을 향해 읍하고 있는

모습과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추읍산의 또 다른 이름은 칠읍산, 정상에 올라서면 지평, 양근, 여주, 이천, 양주, 광주, 장호원 등

7개의 읍이 바라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양평해장국을 마다하고 운길산역의 장어집에서 하산주 겸 해단식을 한다.

한 마리에 만 원정도 하는 민물장어의 살이 통통하게 올랐다.

 

 

거기에는 특별한 무엇인가가 없었다.

단지 평범한 농로와 시멘트길 어쩌다 나타나는 엉성한 이정표,

그리고 매서운 칼바람만 있을 뿐.

 

                                            2010.  2.  3  용문의 '볼랫길'에서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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