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23. 08;59
춘천행 열차가 플랫폼(platform)으로 들어
오더니 추위로 웅성거리던 승객들을 다
쓸어 담는다.
소실점(消失點)을 향해 속도를 내던 기차는
어느 순간 사라지고,
군복 입은 연인을 배웅하던 한 젊은 여인이
사라지는 기차를 망연히 바라보다 돌아서는
모습이 쓸쓸해 보인다.
언제나 그랬듯이 기차는 만남과 이별이라는
숙명을 품었다.
성악가 '조수미'가 불러 익숙해진 노래,
'8시에 기차는 떠나가네'라는 곡이 생각
나는 장면을 보며 괜스레 안타깝기만 하다.
나치에 저항한 그리스의 젊은 레지탕스,
전쟁이 끝났어도 돌아올 줄 모르는 연인을
기다리는 '카테리니'역,
8시에 기차역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기다리는 연인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고,
그 연인은 멀리 숨어서 지켜보고만 있었다는
안타까운 노랫말 내용이 와닿는 아침,
사람들이 사라지고 아무도 없는 상봉역
춘천 방향 플랫폼은 썰렁하다.
09;00
나 홀로 덩그러니 남아 서성이다가 따뜻한
고객대기실로 들어가 손에 들었던 '도시형
아이젠' 23벌을 의자 위에 내려놓는다.
누가 올까,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찬바람이 불어도 하릴없이 기다린다는 것,
어쩌면 그것은 마중이 아닐까.
나타나는 방향으로 시선을 둔지 잠시 후에
반가운 친구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60년 이상의 학연(學緣)과 지연(地緣)을
이어가는 친구들의 얼굴을 보며 가슴에
훈훈한 온기가 퍼진다.
현대판 순애보(殉愛譜)로
얼마 전 아내와 사별(死別)한 친구도 보인다.
무려 21년 이상을 병석에 누워 아픔으로
고통받다가 저세상으로 떠나는 아내를 배웅
하며 얼마나 힘들었을까.
어쩌면 인생 팔고(八苦)중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애별리고(愛別離苦)가 가장
괴롭다는 생각이 든다.
영하로 떨어지게 한 찬공기를 품은 쪽빛하늘,
말없이 흐르는 한강물을 바라보며
기차는 지치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달려간다.
10;50
월남전 참전용사로 정보사령부에서 원사로
복무했던 친구가 홍천에서 왔다.
인생에서 마중과 배웅은 유위(有爲)이고,
만남과 이별은 무위(無爲)로 늘 있는 일이다.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이다.
지금(只今) 바로 이 시간은 30년을 살지 못하고
요절(夭折)한 천재 작가 김유정을 기린 문학촌
에서 고향 친구들과 함께 정담을 나누며 슬픔과
힘듦을 온전히 치유하는 시간이다.
2024. 11. 23.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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