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11. 11;00
동구릉 경내는 낙엽 떨어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친구들의 숨소리와 발자국 소리만 겨우 들릴뿐
숲은 침정(沈靜)에 빠졌다.
살아서 절대권력을 누렸던 왕과 왕비들의
사후 안식처이자 백성들의 침 삼키는 소리도
불경스러운 곳,
왕이나 고관대작들, 그리고 능참봉이나 들락
거렸던 동구릉에 힘없는 장삼이사(張三李四)가
들어섰다.
이곳 죽음의 세계에 누운 절대권력자들은 살아
생전 국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백성들을
위했을까.
아니면 본인과 가족, 권신들만을 위해 권력을
사용하고 백성들을 개돼지로 부렸을까.
조선 태조 이성계의 능(陵)인 건원릉을 비롯
하여 현릉, 목릉, 휘릉, 숭릉, 혜릉, 원릉, 경릉,
수릉 등 9개의 능이 있는 동구릉은 7명의 왕과
10명의 왕후가 안장된 능(陵)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우리나라 최대규모의
왕릉군이자 조선왕조 역사가 눌러앉은 길을
걷는다.
비상계엄 여파로 인간세상은 혼탁해졌고,
동귀어진(動歸於盡)은 못할망정 의(義)를 배반한
사람들의 타락한 소리로 눈과 귀가 더러워졌다.
국민을 개돼지로 아는 국회의원, 권력자들과
똥별을 단 사람들이 깽판을 치는 세상,
오늘만이라도 세속의 소리를 듣지 않으려
사랑하는 친구들 60명과 죽은 왕이 누워 잠든
능에서 상념에 잠겨본다.
신도(神道), 어도(御道)가 아닌데도 누군가 쓸어
놓은 길이 너무 정갈해 산 자들의 어지러운
발자국이 행여 남을까 조심스럽다.
가던 길 잠시 멈춰 서서 두 동강 난 소나무를
바라본다.
소나무, 잣나무 등 침엽수는 그런대로 초록을
유지하고 활엽수들은 나뭇잎을 다 떨궈냈다.
나뭇잎을 떨궈낸 나뭇가지엔 어느새 겨울눈
(冬芽)이 자리 잡았고 깊은 침묵에 빠진 숲 속의
겨울은 스산하기만 하다.
부드러운 흙 위로 떨어진 낙엽 아래엔 이름
모를 곤충의 알과 고치가 있겠지.
또 다른 큰 나무밑 둥치엔 어느 벌레가 숨을
죽이고 겨울나기를 하고 있을까.
되새와 붉은 털 뭉치 같은 뱁새가 반짝이는
햇살을 뚫고 날아간다.
기러기는 북쪽으로 사라졌고 제비는 남쪽으로
다 날아갔다.
조금 남은 텃새가 숲 속 여기저기에 도토리를
숨겼고 다람쥐와 청설모는 보이지 않는다.
거대한 소나무 위에서 직박구리가 노래를
하고 늙은 까마귀는 여전히 능청스럽게 울어
대며 숲 속의 침묵을 깬다.
까마귀 울음소리를 들으면 능청맞다는 생각이
들고,
직박구리나 휘파람새의 노랫소리는 천상의
클래식 음악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 이 또한
편견이 아닌가.
세상은 온갖 파장이 만들어낸 소리로 가득하다.
사람들은 많은 소리 중 가장 아름답게 조율된
소리에 음악(音樂)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나는 여러 장르의 음악 중 특히 국악과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는다.
요즘 들어 나의 반려 생활이었던 독서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눈과 관계없는 귀로 음악을
들으면서 국악과 클래식은 나에게 반려 음악이
되었다.
한(恨)이 맺힌 국악을 듣다 보면 가끔 눈가가
촉촉해지고,
아름다운 하모니로 이루어진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 불현듯 눈물이 나기도 하니 나의 뇌에서
프로락틴 호르몬(prolactin hormone)이 제법
나오는 모양이다.
기온이 조금 올라가자 새들이 각자의 템포로
노래를 한다.
어느 새는 느리게 또 어떤 새는 빠르게 노래를
하기에 손으로 속도를 재본다.
직박구리는 알레그로(Allegre 빠르게),
뱁새는 비바체(Vivace 아주 빠르게), 까마귀는
안단테(Andante 느리게) 속도로 숲 속의
소리를 조율한다.
또 어떤 새는 미묘한 비브라토(vibrato)
기법으로 시공(時公)을 초월해 살아있는
소리를 제각각 내며 템포 루바토(Tempo
rubato), 즉 시간을 훔치는 속도로 자연의
소리를 변주한다.
살아있는 사람의 속도와 죽은 사람의 시간은
제각기 다르다.
죽은 자에겐 시간이 쌓이고 산 자에겐 시간이
흘러가는 게 세상의 법칙이다.
70여 년의 시간이 빛의 속도로 사라지고 금년
달력도 마지막 장만 남았다.
이제 남은 내 인생의 속도는 안단테(Andante)
를 원하지만 곧 비바체(Vivace)가 되겠지.
꽁꽁 얼어붙은 추위가 닥쳐왔다.
열흘 전엔 40cm가 넘는 폭설도 내렸고,
이에 놀란 나무들은 더 깊이 뿌리를 내린다.
숲 속의 작은 존재들은 어딘가에 모여 어깨를
맞대 힘을 모으고,
나무와 풀, 작은 벌레까지 겨울을 온전히
견뎌내려 안간힘을 쓴다.
얼마 후면 나무줄기엔 세월의 나이테가 또
한 줄 그려지고 나는 한 살의 나이를 더 먹는다.
나이와 관계없이 숲 속의 생명체들은 시간이
눌러앉은 이곳에서 더 힘찬 봄을 맞게 되겠지.
자연의 속도를 내는 숲 속에서 나만의 속도인
템포 루바토(Tempo rubato)로 빠르게 달려온
올 한 해를 친구들과 함께하는 송년식으로 마감
하며 내년을 기약한다.
2024. 12. 11.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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