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5. 19.
밤새 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그치고 안개가 자욱하다.
인삼랜드 휴게소를 지나 터널을 빠져 나가니,
덕유산 자락의 거대한 백두대간이 용트림을 하며 안개비를 뿌린다.
오늘도 또 비를 맞으려나.
현재 고도 720m,
북동쪽으로 보이는 정상 암봉 지대가 장관이다.
첫눈에 우람하고 당차게 보이지만,
가파른 계단길만 빼곤 매우 부드러운 산행이 이어진다.
주봉의 암봉이 마치 할미꽃처럼 생겼다 해서 '할미산'으로 불리다가 황매산으로
바뀌었다고 전해지는데, 마고할미랑 무슨 사연이 있을까.
08;00
할미산이라 불렸던 황매산 들머리에 할미꽃이 나를 반긴다.
회백색의 잔잔한 털을 온몸에 감싸 두르고 고개를 숙인 할미꽃.
땅을 물끄러미 보며 삶의 상념에 젖어 적당히 구부러진 허리가 우리네 삶의 무게보다도
더 무거운가 보다.
살짝 만져보니 여인의 살촉감처럼 부드럽고 체온도 느껴진다.
맛이 쓰고 성질이 찬 할미꽃은 예전에 긴요하게 썼다고 한다 .
아이들은 못 만지게 하였으며 뿌리를 재래식 변기에 넣으면 벌레가 생기지 않을 정도로
독성이 강하다.
뿌리를 잘 법제하여 뇌종양이나 암을 치료하였고, 요즘은 질병에 도전하는 신물질로
부상하고 있으며, 두통, 복통, 이질, 심장병, 위염, 뇌질환 등 많은 곳에 활용이 되며
현대 과학으로 그 신비함을 하나, 둘씩 재발견하고 있다.
검은 보라색이 신비함을 더하며 무심히 들여다보니, 가슴을 뭉클하게 하며
꽃이라는 생각이 안들 정도로 무서운 생각이 든다.
<욕심 많은 손녀와 착한 손녀를 둔 할머니의 처절한 삶!
부양하지도 않고 재산을 다 뺏은 욕심 많은 손녀의 농간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던
할머니가 가난한 집으로 시집간 착한 손녀를 찾아가다 기진맥진해
"손녀야~손녀야~ 내 착한 작은 손녀야!"~부르다
할머니는 지팡이를 떨어뜨리고 그 자리에서 돌아 시고 만다.
다음 해 찾아간 할머니 무덤 위에는 지금까지 못 보던 꽃이~
할머니가 즐겨 입던 회색 치마저고리를 뒤집어 쓴 풀의 모습은 할머니가 밭일 하러
나갈 때의 꾸부정한 모습 그대로 닮았다.
작은 손녀가 흐르는 눈물을 막을 새도 없이 "할머니' 할머니" 하고 목 놓아 부르자,
할머니 묘지 위에 할머니 같이 생긴 그 풀 한 포기는 할미꽃이 되었다>라는 슬픈 전설이 있다.
합천사람들은 국내 담수량 제 5위 합천호수의 푸른 물속에 산자락을 담고 있는 형상이
마치 호수에 떠있는 매화와 같다해서 수중매(水中梅)라고도 하는데,
참으로 멋진 표현이다.
이산에 황매화가 많이 있을까.
매화나무는 드뭇재 오름길에 당국에서 조림한 몇 그루의 황매화만 보일뿐 실제로 황매산에
황매화는 없고, 철쭉만 전국 최고의 군락지로서 천상의 화원이다.
고즈넉했던 주차장은 축제의 영향인지 시장 통으로 변하였고,
5분여를 걸어 올라가니, 안개 속에 잘 정비된 등산로라기보다는 산책로 분위기다.
배우 최진실의 주연으로 5명의 사랑과 애증을 그렸던 '단적비연수'라는 무협영화의 촬영지인
영화주제공원 옆으로 본격적인 철쭉산행을 한다.
단체로 시끄러워 우리끼리의 조용한 산행은 포기하여야겠다.
목소리 큰 여인네들의 무 개념 웃음소리에 질려 급한 걸음으로 앞서 나간다.
끔찍하게 보기 싫은 마스크를 한 여인도 있고,
못생긴 여인들의 화장품 냄새가 진해 머리가 아프다.
진홍빛 철쭉에 잠시 넋이 나간다.
10;00
철쭉은 신라 최고의 미인 수로부인도 꺾어 달라던 꽃이다.
분홍빛 진달래와 복사꽃이 지자마자 아카시아 향과 함께 진홍빛으로 달려오니,
봄날의 산은 여전히 아름다운 꽃 세상이 된다.
덩치 큰 소나무나 참나무들과 경쟁하지 않고, 다른 나무들이 힘들어 하는 높은 산꼭대기에
하나 둘씩 모여 자기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버린다.
독성이 있어 산 짐승들도 함부로 뜯어먹지 못하는 철쭉,
그 영리함에 소백산, 지리산, 태백산 등 고산지에 군락지가 만들어졌고,
서울 인근엔 서리산이 대단하다.
꽃이 너무 아름다워 걸음을 멈추고 꽃에 취해 버린다.
꽃에는 마취성분이 있어 유독성분이다.
양이 잘못 먹으면 죽기 때문에 지리산 바래봉의 면양목장에선 방목한 양들이 다른 나무는
먹고 철쭉만 건드리지 않아 자연스럽게 철쭉 군락지가 된 거다.
진달래는 꽃이 핀 다음에 잎이 나오고 꽃자루 하나에 한 개씩 소박하게 피는데,
철쭉은 꽃과 잎이 같이 나오며 꽃자루 하나에 3~5개씩 피어 화려함을 자랑한다.
서기어린 안개가 산등성이를 타고 넘어온다.
물안개는 산으로 올라오고 산안개는 하늘로 올라간다.
하늘에 닿고자 함인가?
아님 우리 같은 선인(仙人)과 함께 하고자 함인가?
현재고도 900m.
안개 속에 베틀봉(946.3m)의 신비로운 풍광이 나타난다.
안개 속에 '삼봉'이 보이는데 합천 쪽에서 올라오면 매우 힘든 코스다.
끝 없이 이어지는 계단은 우리네 인생의 길이다.
세월의 뒤안길이 된 인생이지만,
훌훌 털치고 왔으니 모든 것 털어 버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오르자.
평탄한 길은 끝나고 이제 부턴 가팔라진다.
숨이 턱까지 차고 심장박동이 머릿속까지 전해진다.
앞만 보고 달린 인생에 정신없다가,
어느 날 머리칼이 희끗해진 걸 보니 불현 듯 가여워진다.
비 오는 날이 좋은가 아님 맑은 날이 좋으냐고 누가 물어 본다.
난 비 오는 날이면 한 폭의 수채화가 되어 우산도 없이 미친듯이 빗속의 어딘가를
향해서 간다.
무엇이 그리 급한지 가슴이 시린지도 모른 채 간다.
은퇴 후 나이를 말하고 싶지 않은 나이,
정확하게 말하면 확인하고 싶지 않은 나이지.
점점 무기력하게 되는 게 겁나 하던 일 접어두고 무작정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
미칠 때가많다.
하루하루 시간이 흐를수록 삶에 대한 느낌은 더욱 진하게 가슴에 와 머무르기에
나이를 먹으면 꿈과 추억을 먹고 사는 모양이다.
어느새 지천명(知天命)의 나이!
하늘의 뜻을 알아야 하는데 하늘엔 전혀 미치지 못하고 이렇게 인생은 가는구나.
이제 오십도 훌쩍 넘어 한 살 한 살 세월이 줄고 있다.
그래도 신의 은총을 받아 은퇴 후 인생의 최고 황금기를 누리고 있으니,
모든 이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11;20
드디어 정상(1,108m)이다.
온몸은 다 젖었고, 산의 거친 숨소리를 온 몸으로 느낀다.
안개가 거칠며 붉은 태양이 거대한 모습을 잠시 드러낸다.
지리산~웅석봉으로 이어지는 고산준령의 변화무쌍한 모습이다.
일망무제이다.
천하일품의 조망 속에 남쪽 아래 '베틀봉(943.6m')으로 초원능선이 이어지며.
웅석봉( 1,099.3m)과 지리산 천왕봉(1,915.4m)이 희미한 안개 속에 멋진 산수화를 그려낸다.
지난 산행시에는 산청군과 합천군이 각각 세운 정상석이 두 개 있어
많이 보기 싫었는데 하나만 서있다.
태백산맥의 장엄한 기운이 남으로 치달아 마지막으로 큰 흔적을 남긴 <황매산 1,108m>이라
하는데, 요즘은 일제의 잔재 용어라 해서 산맥이라는 말은 쓰질 않고 대간, 정맥, 기맥,
지맥이란 용어를 쓴다.
정상에 올라서면 주변의 풍광이 활짝 핀 매화꽃잎을 닮아 마치 매화꽃 속에 홀로 떠있는 듯
신비감을 주어 황매산이라 부른다고 한다.
황매산의 황(黃)은 부(富)를 매(梅)는 귀(貴)를 뜻하며 전체적으론 풍요를 상징하기에
그 영향으로 나는 이부자리도 항상 황금색을 쓰고 있다.
수십만 평의 고원에 철쭉과 억새, 부드러운 능선, 기암절벽 등이 또다른 환상을 준다.
봄 에는 수십만 평의 고원에 철쭉 향, 아카시아 향기와 희고 고운 조팝나무의 자태,
여름에는 시원한 솔바람과 고산지대 특유의 자연풍광,
가을엔 능선을 따라 출렁이는 억새의 노래와 춤, 그리고 형형색색의 단풍,
겨울은 기암과 능선을 따라 핀 눈꽃과 바람 그리고 햇살의 조화로 황매산 사계(四界)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황매산은 효(孝)의 산이며 삼무(三無)의 전설을 갖고 있다.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개국한 무학대사가 황매산에서 수도를 할 때 뒷바라지 하던
어머니가 산을 오르내릴 때 칡넝쿨과 땅가시에 긁혀 상처가 나는 바람에 놀라서
무학대사가 산신령에게 100일 기도를 한 이후 지금까지 뱀과 땅가시, 그리고 칡넝쿨이
자라지 않는 3무의 산이라 불리는데, 실제로 여러 번 황매산 등반을 하며 이 세 가지를
보지 못했다.
난 진홍색 철쭉의 향기와 고즈넉한 억새의 몸짓에 이끌려 해마다 두번씩 이곳을 찾아
청군 차황면이 고향인 은행 친구의 동생 양돈장에서 흑돼지를 잡아 여러 친구들과
즐기기도 했다.
정상 1,108고지에서 한잔을 할까.
사랑하는 벗들과 막걸리 한잔에 온갖 시름을 떨치니 좋기만 하다.
이 맛을 어디에 비할까.
철쭉만 있는 산에 둥글레가 신비롭게 흰 꽃을 피우고 있다.
진홍빛 세상에서 유일한 흰 꽃을 보니 너무나 반갑다.
예전엔 아름다운 풀이라 하여 '려초(麗草)'라고도 했는데,
아름다운 대칭과 선이 사군자의 대나무를 닮아 덕과 품위를 자랑하는 듯 바람에 살짝 흔들린다,
백합과 여러해살이 풀인데 혈압, 당뇨, 동맥경화, 지방간, 폐결핵등에 쓰인다,
술을 담가서 마시기도 하고 차재료로도 쓰인다,
암탉과 함께 요리하여 허약한 몸을 다스리기도 하는 훌륭한 약재이다,
12;50
1,000 고지에서 내려다 보는 황매평전이다,
신들의 정원인가, 여긴 천상의 화원이다.
드넓은 산의 평원을 물들인 진홍빛 철쭉에 잠시 넋을 잃는다,
왼쪽 목장 부근~
관람 인원이 천만 명을 넘었던 '극기 휘날리고' 촬영지에도 진홍빛이
물들었고, 멀리 안개 속에 웅석봉'이 웅장하게 보인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 활동 근거지이며 격전지로 왜적의 침략에 항거하여
구국의 일념으로 피흘리며 싸웠던 곳이다.
천안함 사건 주범이 북한으로 밝혀졌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헛소리하는
강기갑, 유시민, 정세균이 같은 놈들을 이곳에 데려와 잠시라도 정신수양을 시키고 싶다.
신들의 정원을 거닐어 보자.
지난달 가리산의 눈꽃과 영취산의 진달래도 만끽하였으니
금년 봄 산행은 제대로 타이밍을 맞추는 거 같다.
문성인 군대생활을 정석으로 잘 했나 보다.
'서 쏴 자세!'로 카메라를 철쭉에 들이댄다.
좀 전에 올랐던 정상을 뒤돌아보며 산행을 마친다.
16;00
네 시간 여의 산행을 마치고 내일 산행 예정지인 비슬산 자연 휴양림 숙소에서
한잔 술로 피로를 달랜다.
19;00
해는 기울고 어둠이 찾아들며,
높이 흘러가는 쪽빛 구름사이로 상현달이 가지런하게 떠오른다.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가 청아하다.
오늘의 고단했던 몸을 쉬자.
얼마나 코를 골아댈까?
2010. 5. 19 황매산 산행을 마치고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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