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느림의 미학 183 진달래가 불 타는 강화 고려산<436.3m>

김흥만 2017. 3. 25. 20:02


2012.  4.  25.  09;00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더니,

우산이 뒤집어질 정도의 세찬 강풍과 함께 쏟아진다.

 

매화가 뜰에서 겨울의 끝을 알린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백목련, 자목련꽃이 비바람에 떨어져 까맣게 시들어 가며 처참한 모습을 보인다.

 

한꺼번에 들이닥치듯이 만개하여 꽃 잔치를 만들어 준 벚꽃이 꽃비가 되어 흩날린다.

세찬 비바람에 실려 미련 없이 훌훌 몸을 날린다.

 

나른한 봄에 잠시 실눈을 감고 졸았더니 벚꽃은 한꺼번에 사라지고, 버스정류장 옆에

서 있는 벚꽃 한 그루만 정신없이 쏟아지는 빗줄기에 꽃을 감싸며 처연하게 비를 맞고 있다.

 

며칠 전 '수덕사 황하정루' 담벼락에 소담스레 피었던 동백꽃잎이 섬찍한 핏빛으로 땅에 

떨어져 아픔을 주었는데, 꽃 보라의 풍경으로 스러진다.

 

벚꽃이 떨어짐은 낙화(落花)일까?

비바람을 타고 하늘 높게 오르니 차라리 비장한 산화(散花)가 아닐까?

처연한 아름다움을 뒤로 하고 버스에 오른다.

 

유난히 길었던 겨울 끝에 매화, 목련, 개나리, 벚꽃, 진달래가 동시에 피는 진기한

풍경이 연출된 봄이다.

 

2012.  4.  26.  05;00

아직도 비가 내린다.

하늘의 소리인가?

주차장 지붕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빗방울이 지붕 위를 두드리는 소리는 내가 지금 깊은 산 속에 조용히 누워있는 것

같은 생각을 들게 하니,

비가 오더라도 산속에 들어가 삶의 때를 벗기라는 하늘의 선물이겠지.

 

07;00 

밤새 불어대던 바람은 하늘의 먹구름을 다 밀어낸다.

먹구름이 가신 하늘은 오월의 하늘보다 찬란하다.

멀리 바다 건너 고려산의 장쾌한 능선과 아름다운 산들이 하늘 금을 그리며

햇살을 머금어 마음에 담는다.

 

동서로 길게 이어진 능선에 납작 엎드렸다가 살짝 고개를 든 저 산에 진달래 꽃밭이

있을까.

설혹 있다 한들 얼마나 대단하고, 제대로 볼거나 있을까.

산 정상에서 오만했던 내 마음은 반성을 하게 된다.



10;00

어디로 갈까?

청련사~정상~진달래 군락지 코스를 택한다.

등산지도에 청련사, 백련사, 적석사가 보인다. 



파릇파릇한 새싹들은 자연이 주는 봄의 빛깔이다.

연둣빛은 모진 겨울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주며 의욕을 생기게 해주고,

남산제비꽃은 봄의 교향악을 연출한다.

 

높지 않은 이 작은 산에도 이런 절이 깃들 수 있구나.

청련사(靑蓮寺)의 고요 속에,

311년이 넘는 느티나무가 금방이라도 하늘로 올라갈 듯 거친 기세로 꿈틀거린다.

 

고구려 장수왕 4년 인도의 '천축조사'가  이곳 고려산에 이르러 절터를 찾고 있던 중

정상의 연못에 피어있는 5가지 색깔의 연꽃을 따서 불심(佛心)으로 날린다.

꽃이 떨어진 장소에 꽃 색깔에 따라 백색연꽃이 떨어진 곳에는 '백련사',

흑색은 '흑련사(적석사)', 황색은 '황련사' 청색은 '청련사'라 칭하였는데,

 

'청련사'만은 조사가 원하는 장소가 아니라서 '원통암'이라는 절을 지어 천 년이 넘는

세월을 지키고 있다.

현재는 청, 백, 적련사(적석사 積石寺) 3개 사찰만 남아 있다.

 

이 연못을 오련지(五蓮池), 이 산을 오련산(五蓮山)으로, 5개의 사찰을 묶어 오련사(五蓮寺)로

불리다가 고려가 몽고의 난을 피해 강화로 임시천도하면서 고려산(高麗山)으로 개명이 된다. 

 

연꽃이 원하는 곳에 떨어지지 않아 원통암(寃痛庵)이라? 아님 원통암(圓通庵)인가.

 圓通이라 함은 '불교에서 지혜로 진여(眞如)의 이치를 깨닫는다'라는 말이다.

이는 그 본질이 원만하여 널리 모든 존재에게 두루 통하고, 그 작용은 자재(自在)하여 거리낌이

없어 널리 모든 존재에 작용한다라는 말인데~진짜로 억울한 원통인지, 지혜의 이치인지 나는

모르겠다.

 

암튼 불심깊은 조사도 욕심 앞엔 별 수 없는 모양이다.

절 이름으로 봐선 천축조사의 욕심이 110년이 넘는 은행나무보다도 하늘로 더 뻗쳤구나.

 

태고의 기억을 머금은 숲속으로 들어간다.

세속보다 더딘 시간을 지닌 세상이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새소리는 천상의 소리인가.

 

예전에는 가을의 단풍 든 산을 바라보면 마음이 차분해졌는데,

언제부터인가 연두색으로 변하는 산과 나무, 새싹들을 보면 왠지 모를 설렘을 느낀다.

 

설렘이라!

설렘은 나의 활력소가 되지.

태어날 때 받은 선천지기(先天之氣)는 가을이 좋지만, 세월이 흘러

세월의 무게에 짓눌린 내 나이에는 연두색 새싹을 보면 내 안의 욕망이 꿈틀거린다.

 

바빴던 몸과 마음을 던져놓고 온몸으로 봄의 기운을 받아보자.

오를수록 또 다른 풍경들이 이어진다.

 

봄 처녀는 어디에 있을까.

여린 풀이 올라오고 있을까.

봄빛 가득한 이곳에서 나는 무엇을 보고 느낄까.

그냥 터덜터덜 산길을 올라간다. 

 

              [     연둣빛의 설렘 

                

                 연둣빛이 차오르는 설레임은

                 눈이 부셔 차마 눈뜰 수 없는

                 아름다운 그리움이 남았나 보다.

 

                 찬란한 봄 하늘의 눈부심 속에

                 내 작은 웃음 짓게 하던

                 슬픈 그리움은 어디로 갔나.

 

                 세차게 내리던 봄비에

                 진달래 꽃잎이 날아갈세라

                 맘 졸이며 향기로운 그리움을 가슴에 담았지만,

 

                 순간순간 떠오르는 기억들 속의 따뜻한 그리움은

                 내 인생 아직 다 살지 않았으니

                 내가 살아 숨 쉬는 이유가 된다.                              석천  ]

 

어제는 세찬 비바람이 건드렸을 텐데 오늘은 부드러운 봄바람이 꽃잎을 건드린다.

굽이진 산 길가에 진달래가 막아선다.

막아선 길 다가가니 연분홍 진달래꽃길이 다시 훤히 열리며 산등성이로 이어진다.

 

참나무가 울창한 숲속에 양지꽃이 한창이다.

산비탈엔 양지 바른 곳마다 두세 개씩 누운 무덤들이 나오고 울창한 송림이 나온다.

 

태초 자연이 빚은 풍경들 앞엔 산도 사람도 세월과 함께 깊어간다. 

숲이 잠시 틈을 내어준다.

저기가 낙조봉(落照峰)이구나.

낙조봉(350m)이 분홍빛 진달래로 붉게 타오른다.


이름이 예사롭지 않다.

낙조를 보기에 최고봉이라 떨어지는 석양빛을 보기엔 최고인 모양이다.

붉게 물든 진달래꽃밭 위로 떨어지는 석양빛은 어떨까.  

 

소금기를 머금은 바닷바람이 살짝 분다.

먼저 핀 꽃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꽃 보라 속에 있으니 나는 분명 봄 풍경의 일부가 된다.

 

여의화장(如意花杖)이란 말이 있지.

탐스럽게 핀 진달래 가지로 꽃다발을 만들어서 앞서가는 여자의 등을 치면 사랑에 빠지고,

남성의 머리를 치면 장원급제한다니 과거를 봐야겠다.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했던 숲속에 한줄기 바람이 불어온다.

바다 냄새가 밴 비릿한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처럼 가벼운 걸음으로 왔다가 바람처럼 잠시 머물다 가라는 모양이다.

 

정상에 군사기지가 외롭다.

'청룡부대'면 월남전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해병부대가 아닌가?

 

정상까지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고려산(高麗山436.3m)은 높지 않다.

하지만 나라 이름을 가진 산은 내가 알기론 고려산이 우리나라에선 유일한 산이 아닌가?

전국을 돌면서도 신라산, 백제산, 고구려산, 조선산, 한국산을 보지 못했다.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던 1232년~1270년까지 피란 임시수도의 아픔으로 이름을 얻은 

'고려산'은 고구려 연개소문이 이 산의 북쪽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치마대(馳馬臺)에선 말을

달리며 군사를 훈련시켰고, 오련지(五蓮池)에서 말에게 물을 먹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산길을 벗어나

임도를 따라 차를 타고 올라 온 수많은 인파 속으로 흘러 들어간다.

우리끼리 담소를 하며 잠시나마 사색에 잠겼던 나는 당혹감을 느낀다.


탁발을 하는 스님의 염불소리도 크게 들리고, 막걸리를 팔며 진달래축제를 여는 부녀회의

시끄러움이 진달래의 품위를 떨어지게 한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라디오를 크게 틀고 지나는 추한 늙은이,

도깨비 같은 마스크를 쓴 여자, 악을 쓰며 크게 웃는 여자, 서로 고성으로 부르는 사람들,

버드나무가지 껍질로 '호드기'를 만들어 부는 사람들 각양각색이며

반바지를 입은 외국인, 카메라를 연실 들이대는 사진작가들은 또 하나의 풍경이다.  

 

내가 모르는 어떠한 존재가 나를 진달래 밭의 내밀한 곳으로 이끈다.

울긋불긋한 꽃 대궐 속에 들어가 막걸리 한잔을 마시는 호사를 누릴 수 있을까?

 

 

잠시 잠잠하더니 또 다시 바닷바람이 불어온다. 

세상을 혹독하게 몰아치던 바람이 아니다.


말라 비틀어진 나뭇잎을 떨어 뜨리려 애쓰던 바람도 아니다.

진달래에게 곧 파란 이파리들을 나게 할 습기찬 바람이다.

 

           [    바람이 불어도

 

              바람이 불어도

              어차피 바람 같은 인생인데

              공허하지 말자.

             

              봄바람이 불어도

              쓸쓸한 바람이 불어도

              가슴 한구석은 공허한 삶이라도 

              애써 잡히지 않는 바람에 집착하지 말자.

 

              그냥 소중한건 눈에 담고

              가슴에 담아

              꽃향기 속에 삶의 소중함을 간직하자.    석천  ]

 

11;30

세상이 이곳을 중심으로 나뉘어져 있다.

산의 크기를 높이로만 표현하는 어리석은 중생들도 산은 넓은 품으로 모두를 감싸 안는다.

 

          [    한순간

 

            부드러운 산들바람이 불어온다.

            내가 서 있는 이 산에서 바라만 보아도 좋다.

 

            바람의 품에 안기면 더 좋겠지.

            한참이던 길이 뒤돌아보니

            한순간이 되어버린다.

 

            세월도 인생도 모든 것이 한순간이다.

            나는 진달래 밭에 서서

            돌아오지 않는 세월의 강물을 물끄러미 바라다본다.   석천  ]

 

분홍빛 불이 타 오른다.

강화도의 낮고 조그만 산에 이렇게도 넓고 풍성하고 아름다운 진달래 밭이 있을 줄이야.

 

난 남쪽으로만,

그것도 영취산, 황매산, 비슬산, 화왕산, 진례산, 무학산에나 가야 볼 수 있는 줄 알았는데

나의 짧은 상식과 통념은 한순간에 깨져 버린다.


그동안 이곳을 왜 몰랐을까.

흘러버린 시간에 진즉 찾아오지 못한 자괴감이 생긴다.   

 

붉은 햇빛과 진달래꽃이 너무 찬란해 눈을 뜨기 어려울 정도의 환상적인 풍경이 이어진다.

마음속으로 더 바랄 것이 무엇일까.

산자락 여기저기 펼쳐져 있는 진달래는 이 산을 내려가도 한참 그리워질 것이다.


 

진달래뿐만이 아니다.

조망이 장대하고 시원한 속에 바다가 시원스레 펼쳐진다.

역시 섬 산이다.

산과 산, 숲과 숲에 둘러싸인 내륙의 산과는 다르다. 

 

 

산도 사람도 세월과 함께 깊어간다.

태초 자연이 빚은 풍경들,

남쪽의 산들은 연둣빛 속에 붉게 물들어 가는데, 북한 지역의 나무가 없는 민둥산은 부러운

눈초리로 우릴 쳐다만 보고 있다.

 

흰 구름이 흘러간다.

자연의 품속에 들어가 한없는 행복을 누리다가 하산을 한다. 

 

13;00

아침에 읽지 못한 조간신문을 펼치니~ 

 

승영시식(蠅營豕息)이라!

국회의원 선거가 끝나자마자 대통령의 형, 4P의 법칙을 말하던 전 방통위원장, 왕 차관으로

불리던 대통령의 최측근들과 선의로 돈을 받았다며 깨끗함을 주장하던 전북교육감 등이

검찰에 불려 다니며 감옥 문을 두드린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

십 년은커녕 고작 5년도 누리지 못한 절대 권력을 뒤로 하고 교도소에 들어가야 하니

얼마나 억울할까?

 

파리(승영蠅營)처럼 분주하고, 돼지(시식豕息)처럼 씩씩대며 권력의 탐욕을 누렸으니

말로가 비참하다.

어느 정권이던지 임기가 끝나는 정권의 말기가 되면 늘 벌어지는 일이니 이젠 구역질하기도

싫어진다.

 

4P란

사람이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목표로 지위(position), 명예(pride), 재산(property)이 있는데

이를 다 가지려고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면 결국 감옥(prison)에 가게 된다는 뜻이다.

 

돈과 권력의 관계는 항상 지저분하다.

돈에는 눈이 없는 대신 아주 예민한 코가 숨겨져 있다.

즉 권력의 냄새, 이권의 냄새를 기막히게 맡는 코이다.

 

권력의 길을 걸을수록 항상 마음을 깨끗하게 갈고 닦는 내명(內明),

생각이 원만하여 어떤 것도 들으면 바로 이해되는 이순(耳順),

자신을 낮추는 하심(下心)이 필요한 것은 수천만 년 만고의 주옥같은 진리이다.

 

다산 정약용은 간리론(奸吏論)에서 간사함이 일어나는 여러가지를 꼽는다.

직책이 낮으면서 재주가 넘치면 간사해지고,

적은 노력을 들이고도 효과가 신속하면 간사해진다.

윗사람이 바르지 않으면 간사해지고,

밑의 패거리가 많은데 윗사람이 혼자 어두우면 간사해진다.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나보다 약해 두려워 고발하지 못하면 간사해지고,

형벌에 원칙이 없고 염치가 서지 않으면 간사해진다.

어떤 이는 간사해서 망하고, 어떤 이는 간사해도 망하지 않으며,

어떤 이는 간사하지 않은데도 간사하다 하여 망하게 되면 간사해진다.

 

대체로 간사한자일수록 혼자 깨끗한척하며 남까지 깨끗하라고 닦달한다.

지금 정부와 국회 등 권력기관이나 대통령 등 권력자의 옆에는 '파리'나 '돼지'같은

존재들이 너무 많다.

 

역대 대통령의 아들, 형, 동생, 동서, 처남, 처삼촌, 처조카 중 누군가는 반드시 감옥에 간다.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불혹(不惑)을 지나, 하늘의 뜻을 알았다는 지천명(知天命)이 지난

사람들도,

어떠한 말을 들어도 마음이 와 닿는 이순(耳順)이 지난 노인들도,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종심소욕 불유구(從心所慾 不踰矩)'에 해당되는 

일흔이 넘어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노인들이 되고도 대통령이나 권력의 옆에 있는

사람들은 나이에 관계없이 선후의 구분이 없이 교도소에 들어간다.

 

하긴 대통령을 지낸 이도 투신자살로 세계와 나라전체를 당혹하게 만든 나라이다.

이 나라 권력자들의 비극은 언제까지 되풀이 될 것인가.

비켜갈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인가?

최소한의 생명유지에만 필요한 음식을 먹는 저 갈매기만도 못한 사람들이 사방에 널려 있다.  

 

14;00

밀물이 노도처럼 밀려 들어온다.

한없이 달리고픈 마음이 드는 외포리 해안길을 달린다.  

 

삶의 무대에서 언제나 주연이었던 내가

언젠가, 언제부터인가 삶의 언저리를 맴돌고 헤매는 찌질한 삶이 되어간다.

 

슬픔을 갈무리하려는 모양인지 스치는 바닷가의 풍경들을 보며 돌아올 수 없는그 시절이

그리워지고 애잔한 생각이 든다. 

 

서랍을 정리하다 10년이 넘는 뉴질랜드산 태반 얼굴크림이 나온다.

누가 준걸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모르겠다.

뚜껑을 열어보니 크림은 옛날 그대로 변하지 않았는데, 크림통속의 거울에 비치는

내 얼굴은 많이도 변했구나.

 

대부분의 남자들은 강하고 의연한 척하지만,

거울 앞에 서면 약하고 상처받고 외로움을 겁내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본다.

 

                             2012.  4.  26.

                                            강화도 고려산에서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