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느림의 미학 295 단풍이 불 타는 <순창 강천산 583m>

김흥만 2017. 3. 26. 16:33


2015. 10월 가을비 쏟아지던 어느 날.

잠을 며칠째 자지 못하니 참으로 지독한 불면증(不眠症)이다.

1987년 주택은행 인사부에 근무할 때도 상사로 인한 스트레스로 지독한 불면증이

왔었지.


커피를 즐기는 것도 아닌데, 잠자리에만 들면 눈은 더 초롱초롱해지고, 뒤척이며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서재에 나와 책을 펴면 눈이 금세 피곤해지기에 소리 죽여 Tv를 켜기도 한다.


몸의 상태가 나쁜 것도 아닌데 기혈(氣穴)의 쇠약으로 순행이 원활하지 않아 생기는

자연스러운 노쇠현상으로 보기엔 설명이 약하다.

육체적 과로가 없었으니 심한 정신적 과로가 심장을 허(噓)하게 하였는지 이 생각

저 생각에 잠기다가 마음(心)과 지라(脾臟)가 많이 상한 모양이다.


그렇다고 두통이나 식욕부진 변비가 수반되지 않고 식사를 못하는 거도 아닌데,

매사에 불안하고 잠을 못자니 정신적 피로에 의한 기(氣)가 막혀 담(痰)이 생겼는지

가슴이 답답하고 소리를 크게라도 지르고 싶다.

 

나에게 정신적 상처가 있는가.

나의 트라우마는 무엇인가.

나 자신의 상실된 자아(自我)가 충돌하는 건가,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이런 경우에는 상실된 자존감 회복이 급선무라,

자존감과 자신감 회복을 위해서는 나 자신의 본성을 돌아보며 변화하는 몸과 마음을

냉철히 관찰하고 본래의 성품을 찾아야겠지.

 

한바탕 가을비가 쏟아진다.

빗방울이 들여칠까 서재 창문을 닫으려 일어나니 한강에서 떠오른 무지개가 환상을

그리고 아기들이 창가에 매달려 환성을 지른다.

 

일곱 빛깔의 무지개가 떴다.

무지개의 색깔은 사랑의 빛깔이지.

창문 너머로 무지개를 바라보는 아기들의 눈에 사랑이 깃들었다.

사랑하지 않으면 빛도 머물지 않고 어둠뿐이지.

 

잠시 후 예봉산 자락을 세로로 질렀던 무지개는 산산조각이 되어 시야에서 사라진다.

 

2015.  10.  22. 11;40

인생은 미완성이다, 또한 여행도 미완성이라 했다.

총사령부가 있어 빨치산의 근거지라던 순창 '회문산'의 다소 싱거웠던 산행에 대해

아쉬움을 가졌기에 같은 지역에 있는 순천의 명산 '강천산'이 늘 눈에 아른거렸지.

 

회문산에 올랐던 날 현지 중식당에서 단풍이 좋다는 추천을 받고 항상 궁금하고

그리워했던 강천산.

강천산의 하늘도 나무도 미세먼지에 몸살을 떨고, 내 머리 위로 떨어지는 낙엽을

주워 코에 대고 냄새를 맡는다.

 

                  <                   가을 냄새

 

                                   남쪽나라 가을 냄새는 무슨 냄새일까.

                       능금이 익는 냄새?

                       감이 익는 냄새?

                       노을이 타는 냄새일까?

 

                       아니면 노을빛에 갈대가 타는 냄새?

                       길가의 억새가 하늘거리며 타는 냄새인가.

                       담장에 철 모르게 핀 장미냄새를 맡으며

                       길을 떠났지.

 

                       가을이 떠나는 향기는

                       내게는 눈물 같은 술 향기라오.

 

                       세월이 더 흘러도 

                       높고 깊은 하늘의 냄새를 맡을 수 있을까.

                       시드는 육체라도 마음이 온전하니

                       산(山)의 세상은 아름답기만 하다.                석천   >

 

몰려든 차량과 사람들로 주차장은 어수선하다.

그래도 강천산은 화사하게 빛나고 하늘은 미세먼지를 뚫고 약한 햇볕을 내려 보낸다.

 

호남의 소금강으로 불리는 강천산(583m)은 1981년 우리나라 최초의 군립공원이 되었다.

 

단풍명산으로 알려졌기에

수천수만의 인파와 관광버스가 주차장을 빼곡히 메우고,

산행 들머리에 들어선 내 귀는 목청 큰 아낙네들의 고함치는 소리에 고문을 당한다.

 

12;00

도선교를 지나 물소리가 들리기에 하늘을 바라본다.

 

호랑이가 새끼를 낳으면 절벽 위에서 떨어뜨려 살아남는 놈만 키웠다는 병풍바위가

수직절벽을 이뤄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절벽 아래 너른 마당바위에선 신선이 놀았다는데, 신선이 깜박 놓아둔 갓이 바위로

변했다 하여 갓바위, 선관(仙冠)으로 불리는 바위 위로 물이 떨어진다. 

 

단풍과 어우러진 모습의 병풍폭포는 신비스러우리만치 절경을 연출하는데,

병풍바위를 비단처럼 휘감는 폭포는 높이 40m, 물 폭이 15m, 낙수량이 분당 5톤이며,

작은 폭포는 높이 30m, 물 폭이 5m 정도로 이 병풍바위 밑을 지나온 사람은 죄진 사람도

깨끗해진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소란스런 인파를 헤치고 도선교에 기대 잠시 신선(神仙)이 된다.

극심한 가뭄에도 흐르는 옥빛 물 위에는 단풍진 낙엽이 함께 흐르며 가을을 슬퍼한다.

 

계곡의 물줄기에도 햇살이 스며들었다.

도토리가 계곡물로 뛰어들며 공중으로 튀어 오르는 물방울에도 가을 햇살이 녹아들고,

견디지 못한 물이 동그란 파문(派紋)을 그린다.

 

숲으로 이어지는 길가 옆 계곡 물소리가 졸졸거리고, 아직도 무더위가 남아있어 매미가

한바탕 울어댈 만도 한데, 선탈(蟬脫)의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다 사라진 모양이다.

 

인생이 참 무겁다.

나만 그런가.

긴장과 불안도 없는데 왜 이리 허무(虛無)할까.

 

다른 친구들은 노후에 대한 걱정과 미래가 불안하다고 한다.

이 나이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허무, 긴장, 불안으로 중병에 걸리지 않으면 다행이기에

전문가들은 이 고비를 넘기려면 걷는 게 좋다고 한다.

 

난 다행이 걷는 게 생활화 되어있다.

사무실에 갈 때도 5정거장 전에서 미리 내려 걷고,

당구장에서도 가급적 의자에 앉지 않고 서있으면 한 시간당 천보(千步) 가까이 나온다.

 

파도치는 해변 길과 고즈넉한 산길도 좋지만, 사람들이 살기 위해 악다구니 쓰는

시장 통도 좋고 고택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시간이 멈춘 골목길을 걸을 때도 좋다.

이곳저곳 기웃거려도 보고 지나가는 천진난만한 아기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더 좋다.

 

미세먼지로 가득 찬 하늘이 숨었더니, 그 사이를 뚫고 내려 쏘는 햇살 아래 숨 쉬는

것만으로도 기가 충만해진다.

눈이 부셔 고개를 숙이니 문득 가슴속으로 저며 오는 슬픔에 슬그머니 한숨을 쉰다.

 

조금씩 짧아지는 가을 낮.

기나긴 이야기가 산길에서 펼쳐질까.

내일 아침엔 하얗게 서리가 내릴까.

텅 빈 공간에서 할 말 잊은 채 이파리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하루하루의 낡은 반복으로부터 떠난 날, 나는 강천산의 단풍으로 스며든다.

 

숨을 몰아쉬며 산속으로 스며들었을 때 숨이 딱 멎는 순간이 있다.

바로 이 순간인가.

 

대자연이 만든 걸작 앞에서 감탄을 하기 보다는 경이로움을 느낀다.

나같이 종교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런 풍경 앞에선 신(神)을 느끼는 순간이다.

 

나도 아등바등 살았지만 나무들도 찌는 더위와 극심한 가뭄에 힘들게 살았지.

이제는 시간의 묵은 때를 벗기려 빨갛게 물들었다가 이파리를 떨구기 시작하고,

나뭇잎이 다 떨어지면 비로소 시간의 묵은 때가 소멸(燒滅)되는 순간이다.

 

거라시 바위를 지난다.

문전걸식을 하며 구걸하는 걸인들이 이 굴 앞에 자리 잡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동냥을 받아 강천산 스님에게 시주를 하고 복을 빌었다는 이 바위는 걸인 바위라고도

하는데 전라도에서는 걸인을 거라시라고 하는가보다.

 

푸름을 자랑하던 온갖 수목이 빨갛고 노랗게 활활 타다가 생의 고통이 소멸하기

직전의 단풍 터널에서 신비로운 느낌을 받는다.

 

푸근한 메타쉐콰이어 나무들이 숲의 기운을 차분하게 가라앉힌다.

심은 지 30여 년이 되었다는 아름드리나무는 양옆 기암절벽을 넘어설 듯 당당하게

곧추서 있다.

 

쭉쭉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은 메타세콰이어 나무 사이를 걷는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열린다.

어떤 마음의 병이라도, 육체의 병이라도 고쳐 줄 것만 같은 큼직한 나무들을 손으로

만지며 숲길을 오른다.

 

숲의 짙은 향기가 기분 좋게 내 몸통아리를 덮치고, 잘 정리된 숲에선 공작고사리가

넓은 날개를 펼친다.

거창한 풍경은 아니지만 꾸밈없는 산길의 모습은 고요와 어우러져 둔중한 분위기를

만든다.

 

가을이 깊어진다.

붉은 낙엽이 떨어지는 산길은 눈이 하얗게 쌓이는 날 다시 찾고 싶은 산길이다.

단풍 위로 솟구친 거대한 부처바위를 보며 걱정 근심을 잊는다.

 

인생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 했다.

빈손으로 왔으니 무엇을 비우고 무엇을 버릴지는 나도 모르기에,

오늘만큼은 그냥 마음 가는대로 생각하고 발길 가는대로 산을 오르리라.

 

한 발 한 발 오르니 목탁소리와 염불소리가 강천문(剛泉門)안을 은은하게 울리고,

햇살을 받은 노랗고 붉은 단풍이 파스텔 톤의 선경을 만든다.


묵직하고 떨림이 있는 종소리를 들으며 템플스테이를 생각한다.

이곳에서 여운을 남기는 종소리를 들으며 안개와 붉은 노을을 보고 싶다.

그러면 산사(山寺)의 맑은 기운이 내 마음을 안정시켜주겠지.

 

생을 마감했는지 매미 울음소리 들리지 않는 낙엽 쌓인 강천사 담장 길.

어디선가 들려오던 딱다구리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딱다구리가 아니고

목탁소리였구나.

나의 가슴을 애잔하게 만드는 목탁소리는 진중한 범종과 법고소리보다 더 둔중하게

나를 울린다.

 

이 세상 어이 살아갈까 흔들리던 나의 심사가 편안해지니 눈이 쌓여 세상과

단절되는 날 다시 이곳을 찾아야겠지.

 

신라 진성여왕 때 도선국사가 창건한 이 절은 한때 1,000여 명의 승려가 있던

큰절인데, 절 뒤로 치솟은 암벽과 암봉이 한데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그린다.

 

살다 보면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희망을 준다.

나이가 들었어도 아직 내 인생 최고의 날은 오지 않았다.

최고의 날은 언제일까, 비운다 버린다 하면서도 욕심 많은 삶을 살려고 하니

언제나 철이 들까. 

 

산(山)은 사람을 만든다.

그래서 나는 산을 배워간다.

자연에 깃든 오묘한 철학은 법정스님이 가르쳐 주지 않아도 그것은 바로

무소유(無所有)의 삶이다.

 

가을은 버림의 미학이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버림의 미학을 생각한다.

버림의 미학이라,

소유하지 않고 계획하지 않고 무위(無爲)의 삶을 사는 방법은 무엇일까.

버림의 미학은 분명 게으름의 미학과는 다르다.

 

삼인대(三印臺)가 비밀스런 땅에 숨었다.

1515년 폐비 윤씨 복위를 주청하는 상소를 올린 순창군수 김정, 담양부사 박상,

무안현감 류옥의 행적을 기념하는데, 그들이 관인(官印)을 소나무에  걸어놓고

사직을 하며 소(訴)를 올렸다 하여 도장 인(印)자를 쓴다고 한다.

 

12;30

시간이 늦어 구장군폭포와 구름다리가 있는 코스로 오르지 않고 강천산의 정상인

왕자봉을 향해 곧장 오르기로 한다.

완만했던 길이 계단부터 허리를 숙이게 한다.

 

고요한 숲의 여백을 소슬바람이 메꿔주며 건강한 마음을 되찾아 주지만,

오늘도 나는 어떤 존재인가 끊임없이 묻고 답을 하며 번뇌에 쌓이겠지.

 

무성한 숲은 그늘을 만들고 바람을 만든다.

골짜기에서 올라오던 박무(薄霧)가 산자락을 살짝 덮다가 사라지고,

소나무와 단풍나무가 환상적인 궁합을 이루며 멋진 풍경을 보여준다.

 

며칠 전 식사자리에서 이풍원 박사가 나에게 종교를 묻는다.

난 예수, 부처는 존경하고 사랑하지만 교회나 절은 싫어한다고 말했지.

 

나는 내세(來世)를 앞세운 종교보다는

오히려 내세를 앞세우지 않아 종교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유(儒)와 도(道)에

더 관심이 간다.

 

왜 그럴까?

궁극적 행복은 어디에서 찾을까, 어디에서 얻을까,

나이 든 백수로서 늘 화두(話頭)를 찾으며 유(儒)와 도(道)에 관한 글을 읽는다.

 

궁극적 행복은 가벼움인가.

돈과 재물, 유명세, 권력은 행복을 대체할 수 있는 건가.

늘 궁금하고 답을 구하지만 오늘은 제대로 찾을 수 있을 거 같기에

바람소리 들리는 산길의 단풍을 보며 내 마음속에 든 삶의 찌꺼기를 비운다.

 

유가(儒家)와 도가(道家)의 차이는 무엇일까.

공자, 맹자로 대표되는 유가는 유위(有爲) 즉 '하고자 함이 있음'이라,

공자의 인(仁), 맹자의 인의예지(仁義禮智)가 그 개념이다.

 

노자, 장자로 대표되는 도가(道家)는 무위(無爲)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하되 단지 하고자 함이 없을 뿐'이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고 얼마 후에 겨울이 오는 건 자연의 순리(順理)지.

도가에서는 이를 무위에 따른 우주자연의 원리인 천도(天道)로 규정하고,

천도에 따라 사람의 도리인 인도(人道)와 사회운영의 원리인 치도(治道)를 전개한다.

 

이 생각 저 생각하다 보니 머리만 복잡해진다.

그냥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마음을 비우자.

무념무상(無念無想)이 되어야 공자, 맹자, 노자, 장자를 이해할 수 있겠지. 

 

살다 보면 때로는 마음이 힘들고 지쳐 고단할 때가 있다.

이럴 때는 매사에 의욕이 사라지며 삶의 의미조차 불투명해진다.

 

도대체 삶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인가.

무엇이 선(善)이고 무엇이 악(惡)인가.

나의 전생은 무엇이고 후생엔 무엇이 될까.

전생(前生)은 있고, 종교인들이 말하는 천당과 극락이라는 후생(後生)도 진짜로

있는 건가.

 

이렇게 답답할 땐 신(神)을 믿어야 하나?

신을 믿기만 하면 잘 살고 잘 죽어 그들이 말하는 천당이나 극락에 가는 걸까.

 

장자는 마음을 비우기 위해서는 오상아(吾喪我) 즉 내가 나를 죽여야 한다고 했다.

여기에서 오(吾)는 태어날 때 지녔던 본래의 '나'이고 아(我)는 살면서 만들어진

'나'를 말한다.

 

불가에서는 이를 무아(無我) 또는 몰아(沒我), 유가에선 무기(無己)로 표현하기도 한다.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나(我)를 버리면 내 몸은 가벼워지고 삶의 궁극적인 행복에

이른다고 한다.

이젠 오상아의 상태에서 마음의 찌꺼기를 덜어내고, 무위에 따른 삶을 살면

홀가분해지겠지.

 

자연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않으며, 천재지변은 종교의 유무(有無)를 가리지 않는다.

사람 포함 우주의 만물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과정을 거치며 언젠가는 소멸하고,

다시 다른 생명이 태어나 그 자리를 메꾼다.

 

눈앞의 변화와 삶의 변화에 급급하지 않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에서 벗어나면

생사(生死)의 고통에서 해탈할 수 있다는데,

자연의 이치인 천도(天道)에서 내가 가야 할 길을 찾을 수 있을까.

명에 속박되지 않으려면 그 운명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아야겠지.

 

13;20

거대한 벼랑 끝에 선 등 굽은 소나무가 이 산의 풍경을 더한다.

거북이 등처럼 갈라진 껍질 속에 인고의 세월이 마디마디 쌓여있다.


누군가는 산다는 것은 견디는 것이라 했다.

견딤은 살아있는 모든 목숨의 의무요, 존재의 조건이라,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면 허무 공포 불안 우울 절망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하늘의 영역을 침범하며 낭떠러지 위에 서니 절벽은 높이 오를수록 조심하라고

자연의 경고를 한다.


산은 사람에게 많은 것을 주기도 하고 가져가기도 한다.

산은 건강을 주고 욕심을 가져가고 울화도 가져가기에 더위에 치친 몸이 어느새

원기를 회복한다.

 

물 한잔으로 목을 축이고 또다시 고요의 숲으로 스며든다.

이 길에선 마음 급한 사람도 시간이 급한 사람도 없으니 몸을 곧추세워 천천히

걷는다.

산객도 우리뿐이니 노추산에서와 같이 이 산을 독차지한 듯 조용히 걷는다.

 

빽빽한 나무숲을 뚫고 들어온 바람 한 자락이 이마에 흐른 땀을 씻어준다.

능선마루에 올라서니 제법 큰 바람이 인사를 해 온몸이 상쾌해진다.

수더분하게 이어지는 산길은 화려하지 않고 화장기 없는 민낯의 숲 속에선

누구나 속내를 부담 없이 털어내게 한다.

 

                        <             낙엽


                                나무가

                                나무가 말이다.

                                제 한 몸 살려고

 

                                제자식인 나뭇잎을

                                낙엽 만들어

                                바람을 핑계 대고

                                마구 마구 떨군다.

 

                                빗물 머금은 이파리가 낙엽이 되고

                                이슬 묻어 눈물 흘리는 이파리가

                                힘없이 어미 발밑에 나뒹군다.

 

                                바람이

                                바람이 말이다.

                                가여워하지도 않고

                                버려진 낙엽을 또다시 나동댕이 친다.

 

                                버려진 낙엽은

                                어느 날 갈기갈기 바스러져

                                제 어미인 뿌리로 돌아가

                                다음 생(生)을 그리워하려나.                     석천   >

 

벼랑 위에서 보는 천상의 풍경은 장엄하고, 몽환적인 풍경에 잠시 말을 잊었다.

 

거친 숨소리가 내 곁을 따른다.

허리를 꾸부리게 하는 거친 오름길에서 머리를 숙이고 무엇을 빌고 무엇을 구하는가.

 

언제가 되어야 있던 것이 없어지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마음으로 보는 경지에

이를 것인가.

답은 명상(冥想)이다.

잠시 서서 조그만 너럭바위를 조용히 응시를 하니 내가 보인다.

 

진짜 산(山) 공부는 몸으로 하는 것이다.

보이는 것만이 산이 아니다.

나에게 산행이란 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 그냥 하게 하는 유위(有爲)의 삶일 뿐이다.

 

굴참나무와 바위가 어우러진 모습은 평화롭다.


13;30

경사가 심한 1km의 길을 올라 하늘과 땅이 맛 닿은 곳 정상(583m)에 선다.

거의 바닥부터 된비알을 올라왔으니 장딴지가 뻐근하다.

 

미세먼지가 조금 가셨는지 하늘이 살짝 보이고 구름도 손을 뻗으면 달려올 기세다.



소나무 그늘 아래 앉는다.

등 굽은 소나무와 곁의 곧은 소나무 사이로 어치가 날아든다.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부지런히 오가는 곤줄박이가 겨울을 준비하는가 보다.

검단산 정상에서 손바닥에 땅콩을 올려놓으면 슬그머니 날아와 입에 물고 가던

곤줄박이와 동박새가 생각난다.

 

요즘 새들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악함이나 사기(邪氣)가 없으니 새의 눈에도 사람이 선하게 보이는

모양이다. 

 

정적(靜寂)이 쌓인 정상에 잠시 고단한 몸을 내려놓는다.

산은 높이만 가지고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전라도의 산은 겉과 속이 다르다.

높이는 583m에 불과한 야산이지만 바닥에서부터 계단을 올라 1km 이상 가파른 길을

올라왔더니 숨이 가쁘다.

온도계는 섭시 25도를 표시하는데 더위의 마지막 몸부림인지 온몸이 다 젖었다.

 

조릿대가 무성한 산길을 걷는다.

막걸리 한잔이 뱃속에 들어가니 내 사유(思惟)는 실타래 풀어지듯 술술 풀린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인생길 어디에서 머물지는 모르지만,

길이 끝났다고 하는 길이 바로 시작의 길이라는 걸 왜 몰랐을까.

이제야 삶의 길을 깨닫는 것인가.

맞다 이 나이가 될 때까지 몰랐던 길이 바로 여기 있구나.

 

느린 걸음을 배우는 시간이다.

시간이 머무는 곳에서 서로 보폭을 맞추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느림의 속도란 내 주변의 속도에 신경 쓰지 않고 나의 내면에 집중하는 거겠지.

 

14;10

머리 위로 잘 익은 산밤 하나가 툭 떨어지고, 구릿빛 도토리가 또르르 굴러와 발을

미끄럽게 한다.

도토리가 익는다는 것, 산밤이 영글어 떨어진다는 것.

가을 산에서 모든 존재는 스스로 익어 자기 자신의 존재를 입증한다.

 

저절로 익는 시간성일까 아니면 익어야 한다는 자각성일까를 따지는 나의 모습이

우습다.

자신의 정체성을 갖고 그 자체로 익어가며 자기다움을 확보하는 자연을 바라보며

경외감을 느낀다.

 

깃대봉은 평범하다.

깃대 같지도 않고 깃대를 꼽을만한 곳도 아니기에 깃대봉이라는 봉우리의 이름을 보며

참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을이 속삭이듯 깊어간다.

가을 단풍에 취해 시간은 흐르고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깃대봉의 고갯마루에서 숨을 몰아쉬며 세월의 조각들 그리고 스쳐가는 삶의 풍경들과

평범하면서도 소중한 풍경을 눈에 담는다.

 

몰려온 두툼한 구름이 하늘을 덮는다.

 

14;30

평화롭던 순한 길은 끝났다.

능선 길을 오르내리며 느림의 여유를 찾았지만 지도를 보니 매우 급한 내리막길이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

돈 권력 명예인가, 아님 사랑 행복 건강인가?

 

이 모든 것이 필수 조건에 포함되어야 하겠지만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내가 존재하고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 자신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굵은 안전로프에 매달려 가파른 숲길을 내려간다.

서둘러 카메라로 잡으나 위에서 촬영하니 위험한 현장감이 떨어진다.

 

순했던 길이 몸을 잔뜩 긴장하게 만든다.

곧추세웠던 몸을 잔뜩 숙여 밧줄을 잡고 안전한 곳으로 내려선다.

겉으로는 순한 산인데 곳곳에 험한 길을 감췄다.

 

두둥실 떠가는 구름 한 조각은 조그만 바람이 불어도 흘러간다.

오늘 밤은 소쩍새 소쩍 대는 소리 들어가며 잠이 들려나.

 

삶이란 게 기쁨보다는 슬픔이 많게 마련이다.

비바람을 거친 나무가 단단해지는 가을, 혼자가 아닌 함께하는 산행엔 향기가 있다.

 

15;05

조금이라도 빠른 길을 찾지 않고 비탈진 길을 내려와 산행을 마무리 한다.

 

산행을 마치니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몸과 마음이 홀가분하다.

 

이 시간만큼은 나에게 주어진 행복의 시간이니 찰나의 시간으로 만들지 말고

길게 여운을 즐기자. 

 

초행길이라 하더라도 강천산에 대해 충분한 예습을 하고 왔더라면 마한시대

아홉 장수의 전설이 흐르는 '구장군폭포'와 출렁다리를 건넜을 텐데, 시간이 늦었다는

핑계로 짧은 코스를 택하고, 다시 이곳에 올 명분을 만들지만 아쉽다.

 

두 시간 후면 화려한 하루를 남기고 이미 불타버린 노을 잔재가 하늘 귀퉁이에

매달리겠지.

가을의 하늘가에 때가 되면 날아가야 한다는 것을 아는 철새들이 편대비행을 한다.

 

15;30

강천산 입구는 산행 시작할 때보다 더 소란스럽다.

 

이제는 내 자리로 돌아가자.

잠시 후면 어둠이 늘 그렇게 깔리듯이 털썩 주저앉겠지.

 

16;00

                     <    빈 술잔

 

                         여기에 빈 잔이 놓이면 술이 가득 차겠지.

                         서서히 채워지는 빈 잔을 바라보며

                         내 눈가에 괜히 눈물이 고일 거 같은 빈 술잔.

 

                         빈 잔에 가득찬 술이

                         이슬 같은 술방울이

                         목구멍으로 흘러 들어가면

                         또 빈 잔을 채우고

                         슬픔도 채워서 마시고,                        

                        

                         인생이란 어차피 빈 술잔 채우고

                         허전한 가슴을 채우고

                         빈 술잔이 취하면

                         나도 취하는 게 인생이라

 

                         가득 넘치도록 빈 잔을 채워

                         대취할까나.                                       석천   >

 

22;00

깊은 밤,

산새도 떠나고 풀벌레도 잠들었는지 사위는 고요하다.

어둠이 내리자 이슬 내리는 소리가 모든 소리를 잠재운다.

 

별을 가린 구름이 움직이는 소리도, 밤바람에 흔들리던 나뭇가지도 모두 침묵 속에

빠진 듯 조용하다

이따금 잠 못 이룬 참새들이 잠에 빠진 동료를 부르며 짹짹거린다.

으스름달이 산등성이를 올라타고 부엉이도 잠든 산중의 밤은 깊어간다.

 

새벽 03;00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없는데, 오늘도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한다.

잠이 오질 않아 배낭을 뒤지니 책을 가져오지 않았다.

분명히 서재 책상 위에 올려놓았는데 서두르다 보니 빠진 모양이다.

 

인터넷을 열고 닥치는 대로 읽는다.

책장을 넘기던 소리는 추억의 소리로 남기고, 화면을 손가락으로 넘기며,

책을 가져오지 못한 아쉬움과 나의 옛이야기가 까만 밤중의 창문가에 쌓인다.

 

가을밤 서리 내리는 소리가 들릴까 창문을 슬그머니 여니 낙엽 떨어지는 소리 들리고,

부엉이도 소쩍새도 없다.

 

이젠 내 남은 그리움을 창가에 띄우고 잠을 청해야겠다.

공허한 가슴 부여안고 한바탕 꿈을 꾸고 나면 밤새 창문 앞에 수북히 쌓인 낙엽이

화려하게 지나간 세월을 조용히 마무리하겠지.

 

                                      2015.  10.  22.  강천산 산행 후

                                                           회문산 휴양림에서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