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0. 23. 08;30
희문산 휴양림의 아침은 상쾌하다.
겨우 두 시간을 잤는데도 머리가 맑으니 '작살나무'의 보랏빛 열매가 내 마음을
밝게 해줬나 보다.
내장산엔 얼마나 많은 사람과 차량이 몰릴까.
차량과 사람에 밀리더라도 당초 계획했던 내장산 트래킹으로 결정한다.
몇 해나 내장산을 두드리다 입구에서 포기했는데, 오늘은 일찍 서두르면 인파를
피하겠지.
산 아래를 보니 가을이 깊었구나.
때죽나무 열매들이 떼를 지어 거꾸로 매달렸다.
열매가 반들거리기에 머리 깎은 스님들이 떼를 지어있다 해서 이름이 붙은
때죽나무의 열매가 가을을 서서히 밀어낸다.
마취제 성분이 있어 지금도 이 나무로 마취제를 만든다고 한다.
여름내내 초록이 난무했던 들판이 황금들판으로 바뀌고, 군데군데 가을걷이를
끝낸 논이 머리를 깍은 듯 듬성듬성 바닥을 보인다.
미처 거두지 못한 벼이삭이 머리를 숙이고, 탱글탱글 잘 익은 나락이 황금물결을 치는
들판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는 사이에 행복한 미소가 절로 난다.
저 나락이 곳간으로 들어가면 자신의 할 일을 마친 이파리와 줄기들이 스스로 죽어
누군가의 사료가 되고 밑거름이 되겠지
때가 되어 아무 미련 없이 갈 길을 가는 그 빛이 아름답다.
벼이삭 한 포기가 익어 그 모든 것을 내려놓는 가을들녘의 아름다움은 황혼 문턱에
들어선 나를 사색에 빠지게 한다.
스치는 동네마다 거대한 느티나무가 당산목으로 마을을 지키고,
붉은 단풍이 든 느티나무 낙엽이 쌓인 곳에선 시간조차 속도를 내지 않는다.
10;00
내장산도 미세먼지와 엷은 박무(薄霧)로 덮였다.
은밀하고 깊다는 뜻의 내장산(內藏山) 서래봉(622m)이 겨우 자취를 보이고, 나머지
봉우리들은 숨었다.
1592년 4월 왜적이 전주로 압박하자 전주사고(全州史庫)의 왕조실록을 내장산
은봉암으로 옮기고, 조선 태조의 영정을 내장산 용굴암에 봉안하였다.
각설이 타령이 스피커를 통해 국립공원 입구를 진동시킨다.
오늘도 조용히 트래킹을 즐기긴 그른 모양이다.
상인들의 호객하는 목소리가 역동적인 삶을 말하는 건지, 여느 시장 통과 비슷하다.
시끄러운 저자거리를 벗어나 내장산 입구로 들어선다.
곱게 물들어 발산하는 가을의 빛.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色)은 무엇일까.
나무는 천목천색(千木千色)이요 사람은 만인만색(萬人萬色)이다.
가을은 온갖 색을 만들어내는데 그중 붉은색이 단연 압권이다.
내장산 국립공원은 내장산(763m)과 백암산(741m), 입암산(687m)을 합쳐서
1971년 지정되었다.
그 중에서 2011년 2월 23일 백암산을 다녀왔고, 입암산은 백암산에서 먼발치로
바라보았지.
내장산 단풍은 산홍(山紅), 수홍(水紅), 인홍(人紅)을 이뤄 남한 제일의 단풍이라
하는데 사람들은 백양사가 있는 백암산은 봄이 좋고, 가을은 내장산이 좋다며
'춘백양 추내장(春白羊 秋內藏)'이라 말한다.
봄엔 백암산이 좋다기에 2011. 2. 23일 너무 이르게 찾았는지 허벅지까지 쌓인 눈을
헤치고 정상까지 올랐다가 그 유명한 백양사 고매(古梅)를 놓치는 우(愚)를 범해
한동안은 아쉬웠지.
노란색 붉은색 주황색으로 물든 각양각색의 단풍나무와 활엽수림이 빚어내는
현란한 색에 취한다.
늙은 단풍나무를 제친 감나무가 홍시를 주렁주렁 달고 다홍 점묘화를 그린다.
바닥에 떨어진 홍시의 과육을 후루룩 마시고 싶다.
굳이 따지 않고 까치밥으로 남긴 홍시는 겨우내 얼었다 녹았다 하며 주린 겨울새의
먹이가 되겠지.
단풍나무 노거수가 즐비한 곳에 뒤틀리고 이끼 낀 감나무고목의 머리에 인 감(枾)은
내장산 풍경의 으뜸이다.
순간들이 켜켜이 쌓여 오래된 것이 대접받는 곳.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마음이 선해진다.
단풍에도 순위가 있을까?
언론에선 설악산과 금강산을 꼽지만 학자들은 남한은 소요산이요, 북한은 묘향산이라 했다.
그러나 산꾼들은 강천산을 꼽는다.
나는 몇 년 전 기대에 못미치는 소요산 단풍에 실망을 하고, 강천산과 내장산을 찾는다.
매스컴에선 가을에 단풍이 시작되면 설악산 단풍을 생중계한다.
장엄한 설악산의 단풍이 완성도로 절대군주라면 강천산과 내장산의 순위는 얼마나 될까.
강천산은 체구와 높이는 약하지만 100대 명산 중 21위를 차지한 당당한 산이요,
내장산은 단풍이 기암괴석과 어우러져 36위를 차지한 욕심 많은 산이다.
당단풍, 청단풍, 애기단풍, 고로쇠, 복자기, 산겨릅, 적피단풍도 구석에 자리 잡았으니
사람 손을 많이 탄 숲이라도 많은 것을 보듬고 품어주는구나.
신나무, 중국단풍도 보이고 한반도에 자생하는 단풍나무 15종 가운데 11종이
분포한다고 하는데 백암산엔 13종이 있다고 기억이 되니 내 기억이 맞다면 내장산이
2종 적다.
키가 작은 복자기나무에는 태양이 햇볕을 듬뿍 주지 않았는지 진초록이 그대로 남았다.
숲의 아름다움은 어떻게 설명할까.
나는 사람 손에 의해 획일적으로 만든 숲보다는 자연 그대로 얼키설키 조화를 간직한
숲을 좋아한다.
낙엽 위에 그려진 소박한 삶.
이 길엔 어떤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을까.
서두를 것도 없고 급할 거도 없으니 그냥 터벅터벅 걷는다.
머리 위로 낙엽은 떨어지고 벗들과 눈높이를 맞추며 걷는다.
내 주변의 소중함은 무엇일까.
그동안 잊고 지나쳤던 것들은 무엇일까 머릿속에서 떠올려본다.
잠시 멈춰 서서 아무 말이나 생각 없이 단풍나무를 그냥 바라만 본다.
삶이 힘들거나 피곤할 땐 아무데나 서있는 나무를 한참 바라보면 나 자신도 모르게
힐링(Healing)이 된다.
나에겐 그냥 무심히 바라만 보는 나무가 있다.
사당역의 자주 가는 카페에서 내려다보이는 마로니에가 문득 생각난다.
그 나무에 꽃이 피면 여름이 온 거고 이파리가 떨어지면 어느새 계절이 흘러 가을이
온 거다.
여름 내내 초록으로 치장했던 단풍은 수줍은 듯 노랗고 붉은색으로 물들어 농염(濃艶)을
뿜어낸다.
박무사이로 숨었던 햇볕이 살짝 들어오자 세상은 찬란하게 빛난다.
나뭇잎이 삶을 마감 하기 앞서 장렬하게 뿜어내는 불꽃은 옆에서 걷는 사람,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몸도 붉게 타오르게 한다.
다람쥐 한 마리가 산책로를 가로질러 숲 속으로 들어가니 홍콩에서 왔다는 관광객들이
탄성을 지른다.
맑은 계곡물에 하늘이 내려앉고 구름이 흘러간다.
거센 물결이 굽이치는 여울목이 어디 있을까 목을 길게 빼고 찾아보지만 극심한
가을 가뭄에 있을 리가 없다.
졸졸거리며 험한 길 돌아온 계곡물에 낙엽이 맴돌다 돌멩이에 걸린다.
낙엽이 떨어진 날, 나는 낙엽을 밟으며 걷고 내 삶은 느린 속도로 흘러간다.
눈에 보이는 풍경이 믿기지 않는다.
사람이 느낀다는 희로애락(喜怒愛樂) 중에서 희(喜)와 낙(樂)만 느끼는 이곳은
신(神)의 은총을 받은 곳이다.
자연의 목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오기에 긴 호흡을 한다.
단풍에 취해 걷다보니 작은 호수가 나온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어도 관리가 엉성했을 때 여기에서 낚시를 하였는데, 37년 세월이
어디로 사라졌지?
< 종점(終點)
가을이 떠나려 하네.
네 덕분에 첫사랑 떠올렸는데,
너 땜에 술도 마구 마셨는데,
가을이 떠나려 하네.
가을은 정체 모를 외로움이고,
나에겐 종점(終點)이 없는 그리움인 모양이다.
흘렸던 눈물이 가슴속에 남았는데
아름다운 나의 가을이
발자취를 겨우 남기고 소리 없이 흘러간다.
눈부신 가을아,
계곡까지 내려와 운무(雲霧)와 나랑 거닐어 보자.
내 사랑 가을아. 석천 >
세상 물들지 않는 것이 없는 가을의 산속.
여름이 뜨거웠던 만큼 단풍은 아름답다.
이 가을 나는 무엇으로 물들까.
무슨 색으로 물들고, 내 황혼의 목숨을 곱게 채색할까.
낙엽을 곱게 뒤집어 쓴 호수가 길게 찬 숨을 내쉰다.
얼마 후면 새하얀 눈을 곱게 쓰고 무시로 표정을 바꾸겠지.
빨갛고 노랗게 물든 단풍 길에서 웅장한 느티나무 고목(古木)을 만난다.
이 나무에 켜켜이 쌓인 세월은 몇 년이나 될까.
박무와 미세먼지로 가득한 하늘을 뚫고 한줄기 햇빛이 스며든다.
하늘이 활짝 열리면 단풍 빛깔이 더 선명하고 처연할 텐데, 그래도 눈 시린 단풍을
볼 수 있어 좋다.
구비구비 넓은 산길을 붉게 채색한 나뭇잎을 술잔에 띄워 술에 취하고 싶다.
< 취(醉)
술에 취할까
경치에 취할까
사람에 취할까.
서리 맞아 붉어진 이파리
빛깔 모여 단풍 되었구나.
마른 잎사귀 흔드는
바람 소리 들려오고
나는 술에 취할까.
경치에 취할까.
아마도 만인만색(萬人萬色)에 취하리다. 석천 >
11;00
나에게 행복은 무엇일까.
내 인생의 최종 열매는 무엇일까.
나는 더 완전한 행복을 원하는 걸까.
행복은 사랑이라는 씨앗의 결실이기에 사랑없는 행복은 불가능하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숨을 쉬고 마시고 먹고 자고 머무르는 게 행복이겠지.
저물어가는 가을 들녘은 아름답고 황홀하지만 산도 황홀하다.
가을의 황홀한 빛은 곧 저녁 노을로 이어지겠지.
이제 가을이 저물어간다.
대자연은 가을이 되면 모든 것을 내어주고 스스로 비우고 버린다
이제 곧 겨울이 온다.
나 또한 나 스스로 비우고 버려야 살 수 있겠지.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이곳의 내장산, 구례의 지리산, 영암의 월출산, 장흥의 천관산,
부안의 변산을 호남의 5대 명산으로 꼽는다.
호남의 4대 명산은 정상까지 다 올랐지만 오늘 내장산 산행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에
산행의 여백(餘白)으로 남긴다.
13;40
이름 모를 저수지 제방(堤防)의 풀숲에 늙은 호박 하나가 뒹굴며 엷은 햇살에
누런 배를 내놓고, 요염하다 못해 농염한 나팔꽃이 활짝 웃으며 초록으로 눈부셨던
여름이 지나간 자리에서 마지막 열정을 태운다.
어느 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꽃이 없건만 사람들은 흔하게 핀 나팔꽃을 무심히 지나친다.
무심한 찬바람이 목덜미를 스치면 그렇게 스러져갈 나팔꽃이 내 곁에 슬그머니 다가왔다.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채송화도~~아빠가 매어놓은 새끼줄 따라 나팔꽃도
어울리게 피었습니다♬♪♩~
사무실 컴퓨터 앞에 앉자마자 하모니카로 부는 첫 곡.
누가 일부로 심지 않는 나팔꽃,
내 고향 내 아버지의 추억이 담긴 나팔꽃이 나를 바라본다.
둥근잎나팔꽃은 해뜨기 전에 피어나서 수줍은 하루해를 보내고, 또 해가 뜨면 꽃의 삶을
내려놓는다.
꽃말이 '그리움'의 나팔꽃은 어느새 내 아버지의 얼굴을 그렸다.
논두렁엔 하얗게 핀 개망초와 갈대가 하늘거리고 달맞이꽃들은 달 맞을 준비에 부산하다.
하늘과 바다, 산과 나무, 들꽃인 나팔꽃과 새, 그리고 벌레들과 트고 살면 고독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다.
여행은 나에게 삶의 고단함을 예방하고 아픔을 치료하고 회복시키는 최고의 명약이다.
나팔꽃을 보며 감정을 억지로 감추기 보다는 억지로 만드는 게 훨신 더 어렵고 힘들다는 걸
느끼니 나도 철이 드는가 보다.
2015. 10. 23. 내장산을 다녀와서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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