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느림의 미학 305 해탈의 길<무주 덕유산 1,614m>

김흥만 2017. 3. 26. 17:04


2016.  2. 25.  04;00

창문으로 달그림자가 스며든다.

유난히 맑은 밤하늘에 대보름을 갓 넘긴 달이 처연한 빛을 내뿜고, 올망졸망한 별들이

그 곁을 지킨다.


창문을 열고 심호흡을 한다.

영하 5도의 싸늘한 기운에 한기(寒氣)를 느끼며 서둘러 문을 닫는다.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으레 껏 창문을 열고 심호흡을 하는 습관은 오늘도 여전하고

서둘러 백팔 배를 시작한다.


05;30

나는 새벽이 좋다.

어둠이 미처 가시지 않은 새벽이 좋다.

새벽의 어둠은 세상의 더러움과 추접함을 가려줘서 좋다.


골목길은 아직 어둠을 걷어내지 않았다.

내 발자국소리가 골목길에서 작은 반향(反響)을 일으킨다.

사물이 깰세라 조용히 걸어도 어김없이 들리는 발자국소리를 하나둘씩 세기 시작한다.

 

11;10

감기 등의 사유로 5명이나 갑자기 줄어든 9명의 일행은 설천봉에 오르는 곤돌라를

서둘러 탄다.


산 정상부에 핀 상고대를 줌으로 당기지만 망원렌즈가 아니라서 선명하게 잡히질 않는다.

상고대가 얼마나 예쁘게 피었을까?


붉은 태양은 온 누리를 비추는데 눈꽃은 남아 있을까, 빙화(氷花)도 있을까?

온갖 상상을 하니 스무 살 청년처럼 가슴이 설렌다.


잠시 후 내 몸은 두둥실 창공(蒼空)을 나른다.

오르면 오를수록 하늘은 푸르고 스키어들이 하얀 설원을 질주한다.


겨우살이를 머리에 잔뜩 인 거제수나무 자작나무가 푸른 하늘에 몸을 던졌다.

설천봉 정상이 가까워질수록 아래 세상이 아스라하게 펼쳐진다. 



11;40

바람이 초속 4m로 예보되었지만, 설천봉 정상(1,470m)은 초속 20m 가 넘을 정도의

강풍이 불어 몸이 흔들린다.


오늘 산행은 강풍으로 얼마나 고전할까,

한겨울보다도 겨울이 끝날 무렵에 찾아오는 강풍을 이겨낼 수 있을까?


피할 필요가 없지.

바람이 불면 맞으면 되는 거고, 추우면 떨면 되는 거고, 배가 고프면 먹으면 되는 게 아닌가.


창공에 뜬 흰 구름이 눈 속에 묻힌 상제루를 외롭게 한다.


거대한 산의 눈은 깊이 내린다.

눈은 쌓이고 또 쌓이며 온 세상의 적막과 함께 또 쌓였다.


일상이 무의미하고 지루해질 때 내가 만나는 눈(雪)은 사위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산속의 눈(雪)은 눈(眼)을 시리게 하고 숲 속으로 들어갈수록 눈은 고독으로 푸르고 깊어진다.

지워졌던 숲 속의 눈길을 누군가 만들고 나는 그 길을 터덜터덜 오른다.


5~6세로 보이는 어린이가 눈 절벽을 오르다 미끄러진다.

아기는 피터 팬이 되어 나를까, 아니면 스파이더맨이 되어 눈 절벽을 오르려 하는 걸까?


숲으로 들어서자 한겨울 산객을 반겨주는 까마귀가 까악 댄다.

곤줄박이가 밤새 산객을 기다렸는지 숲에서 조르르 날라 와 허공을 맴돈다.


내 손바닥에 땅콩이나 건과류를 올려놓기를 바라는지 조그만 눈으로 우리를 바라본다.

손바닥에 올려놓으면 잽싸게 물고 사라질 텐데 손이 얼어 실행을 하지 못한다. 

 

겨울은 강한 것이 빛나는 계절이다.

북풍한설을 이겨낸 나무들이 의연하게 도열을 하고 있다.

진달래는 새로운 봄을 맞으려는 듯 잎눈과 꽃눈이 부풀기 시작한다.


된비알 능선 따라 향적봉으로 다가서는 사이 바람은 더욱 강해지고, 눈앞의 풍경을 가렸다

열었다 하는 구름안개도 없이 하늘은 찬란하게 빛난다.


찬바람이 품속으로 파고들어 옷깃을 여미게 한다.

한겨울에도 공격적인 바람을 맞은 적이 별로 없었는데 오늘은 제대로 칼바람을 맞는다.

 

칼바람이라는 말이 있던가?

모진 바람 된바람을 요즘은 칼바람으로 표현한다.

암튼 칼바람 소리가 나오면 겨울이 제대로 익은 거고 봄이 머지않았다는 예고겠지.


산봉과 산릉은 하얗게 눈이 쌓이고 나무들은 바람에 날아온 습기를 잡아 희고 예쁜

상고대를 피웠다.


내가 좋아서 오르는 덕유산.

이 거대한 자연에서 아무리 매서운 바람이라도 바람을 칼로 여기지 말고 다가올 봄의

전령으로 맞아들여야겠지.

 

해발 1,000m 가 넘는 능선에 몰아치는 바람은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묘한 쾌감을 주며,

바람을 맞는 이 순간만큼은 내가 살아 있다는 강렬한 느낌을 받는다.


덕유산에 산신(山神)이 있다면 이곳에 머무르겠지.

덕유산엘 네 번째 오르지만 이 바위를 바라볼 때마다 덕유산의 산신이 늘 머무르는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비단 덕유산에만 산신이 있는 게 아니라 전국의 어느 산이던지 산신이 있는데

가장 인기 있는 최고의 산신으로는 최영 장군을 친다.

설악산은 눈신(雪神)이요, 한라산엔 하늘을 잡아당기는 천신(天神)이 있고,

지리산은 어머니의 산이니 모신(母神)이요, 또한 태을산신(太乙山神)이 있는 곳이고,

태백산은 민족의 영산(靈山)이니 단군신(檀君神)과 단종신(丹宗神)이 있다.


태을은 천지만물의 출현 또는 성립의 원인인 우주의 본체를 인격화한 천제(天帝)를 말하며,

태을성은 북극성으로 병란 재화 생사 따위를 맡아 다스린다는 신령한 별이다.

또한 태을성신(太乙星神)은 인간의 길흉화복과 수명을 관장하는 칠성신이기도 하다.


덕유산은 무슨 신이 있을까.

덕(德)이 넉넉히 쌓인 향적봉(香積峰)이 있으니 덕유산의 신은 바로 덕신(德神)이 아닐까.

나도 죽으면 산신(山神)이 되어 사람의 발길이 닿을 수 없는 곳곳을 다녀보고 싶다.


12;03

산허리를 오르니 덕유산 정상이 살며시 고개를 내민다.

산행을 시작한지 20여 분도 걸리지 않은 향적봉 정상(1,614m).

땀도 흘리지 않고 얻은 정상에서 솜씨 좋은 화가가 그려놓은 풍경에 눈이 호강을 한다.

 

고산준령에 안개구름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거대한 덕유산에서 가장 높은 향적봉은 역시 당당하다.

몸이 휘청거릴 만큼 불어대는 강풍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으니 고고하고 도도하다.

 

눈부신 자연의 사진을 찍으려 장갑을 벗으니 금세 손이 얼어붙는다.

정상석을 향해 밀려드는 산객들로 인해 잠시라도 머뭇댈 여유가 없다.


거대한 대자연을 거느린 덕유산.

쳇바퀴 같은 하루의 일상에서 벗어나 먼 길을 달려 도착한 정상에서 잠시 달콤한 휴식을

즐긴다.


정상의 돌탑이 조금 무너져 내렸다.

많은 사람들의 소원에 짓눌려 돌탑이 감당을 못한 모양이다.

오를수록 작아지고 많은 소원이 쌓일수록 가벼워지는 게 돌탑의 미학이겠지. 


겨울의 덕유산은 눈의 산이기도 하지만 바람의 산이기도 하다.

바람이 모질게 불어댄다.

추위에 구름안개까지 휘몰아쳐 내 눈을 어지럽힌다.

 

몰려오던 구름안개는 산을 험악스런 표정으로 만들었다가 밀려가며 신비스런 선계(仙界)로

만들어준다.

구름이 흩어지면서 드러난 산야(山野)는 장대하고 광활하다. 


지금 체감온도는 몇 도일까.

손이 시려 셔터가 잘 눌러지지 않는다.


백두대간의 산릉은 끝없이 이어지고, 산들이 산을 타고 산을 넘는다.

사방의 산이 파도처럼 밀려들고 나는 그 파도 속에 몸을 담는다.


저 산이 무슨 산이고 이 산이 무슨 산인들 무엇이 중요할까.

산 위에서 산이라는 파도를 타면 그만 아닌가.


크고 작은 산봉과 산릉이 잔잔히 물결치듯 눈에 들어오니 이곳이야말로 천하의 조망 명산이다. 


태양빛이 세상을 밝히고 두발로 구름 위를 걸으며 펼쳐지는 풍경에 마음이 머문다.

향적봉 대피소가 산객들의 작은 소란 속에 침묵을 지킨다.


12;15

동엽령을 향해 눈 쌓인 길을 걷는다.

이 길을 언제 걸었지?

기억의 창고로 들어가 추억을 찾는다.


1996년 주막산악회 시절은 안성에서 동엽령과 중봉을 거쳐 향적봉을 오른 후 백년사로

하산했고, 2009년 2월 21일과 2014년 2월 13일은 오늘과 똑같은 코스로 걸었지.

20년 청춘과 은퇴 후 7년이란 세월이 순식간에 흘렀구나. 



주목나무가 의연하게 서있다.

이곳에 얼마나 서있었을까.

천 년이란 세월을 서있는 주목나무는 정녕 나무의 신(神)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 후에도 천 년 넘게 더 이곳을 지키겠지.

 

조용한 시선으로 주목나무를 바라본다.

주목나무를 보니 마음이 맑고 고요해진다.


나무에서 향기로운 말소리가 들리기에 귀를 기울인다.

주목나무는 내가 지나가도 흔들리거니 흐트러지지 않고 오랜 세월을 지켜온 것처럼

또 지켜갈 것이다.

 

나는 오늘 나무처럼 무행(無行)의 걸음을 걷는다.

한 걸음 한 걸음 무행과 무상(無常)의 길을 걸으며 세상을 바라본다.


깨달음이야 선각자나 선인(仙人)이 되어야 얻겠지만 그래도 그냥 걷는다.

그러나 단 일각이라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누군가를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아갈 힘을 얻었으면 좋겠다.


주목나무와 산릉을 점령한 구상나무, 전나무, 소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죄다 거목이다.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인 주목나무, 거대한 참나무, 거제수나무, 자작나무 그리고 번갈아

나타나는 황벽나무와 노각나무가 눈을 즐겁게 해준다.


찬바람에 내 손발은 이렇게 얼어오는데, 눈 속 깊숙이 뿌리 내린 채 겨울을 이겨내는

나무들이 대단하다.


바위에 뿌리를 박은 거대한 소나무가 상고대를 피웠다.


상고대 핀 소나무의 굵은 밑둥치와 벗겨진 몸체를 보며 수령을 판단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른다.

이백 살이면 어떻고 오백 살을 먹었으면 어떤가.

쓸데없이 나무의 나이를 생각하는 우(愚)를 범한다.


먼 옛날 직상 상사가 나보고 약우(若愚)가 되라고 했지.

잔머리를 굴리지 않고 항상 정도(正道)를 걸으려 했는데, 그 사람은 한 술 더 떠 아예

어리석게 살라고 했다.

만약에 내가 어리석고 세상일에 타협을 하며 약우가 되었더라면,

약육강식(弱肉强食)이 난무하는 조직에서 정년퇴직할 때까지 버틸 수가 있었을까.


이젠 남은 생을 세상일에서 벗어나 어리석게 살고 싶다.

남에게 바보소리 듣지 않을 정도로만 살고 싶다.


구름이 몰려들며 그림자 없이 산이 통째로 숨어버리더니 모진 바람이 불어 다시 토해낸다.

이 길에선 저 나목(裸木)처럼 아픔과 그리움을 내려놓으면 신선이 되겠지.


12;30

산길에 서있는 나목(裸木)이 발목을 잡는다.


                  <         나목(裸木)


                      깊은 눈과 매서운 추위

                      세상을 날려버리는 강풍에도

                      푸르게 도도히 산 천 년 세월.

 

                      가지가 벌어지고 꺾어지고 

                      죽어가도 또 천 년을 살 것이요,

                     

                      죽으면서도 슬퍼하지 않음은

                      제 그늘아래 새 생명이 눈을 뚫고

                      솟아오르기에

                     

                      자기의 죽음은

                      새 생명의 탄생이라는 걸 아니까.               석천   > 


천 년을 살다 죽어 나목이 된 주목(朱木)을 바라보며 쓸쓸한 마음이 든다.

시린 겨울 거센 바람을 타고 어제가 가더니 오늘이 간다.


또 내일이 오겠지만 세월이란 지금 몰아치는 바람과 같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게 자연의

법칙이니 오늘도 내일도 바람과 같이 왔다가 보이지 않는 시공간(時空間)으로 사라지겠지.


                     <          오고 가는 인생


                           시간 따라 세월 따라

                           인생도 오고 가고

                           사랑도 오고 가고 사람도 오고 간다.


                           오고 가는 세월 속에

                           요란스럽게 귓가를 스치는 모진 바람을 맞으며

                           고독(孤獨)속에 한 자락의 욕심을 비우려

                           험한 산길을 걸어왔는데

                           스쳐 지나간 세월이 나를 힘에 부치게 만든다.


                           시간을 잘라 먹을 수도

                           엿가락처럼 늘릴 수도 없지만

                           그냥 주저앉을 수도 없는 게 인생이라,

                          

                           오는 세월 가는 세월속에

                           그냥 이렇게 살다 나목(裸木)처럼 가는 게 

                           인생인가 보다.                                       석천   >


숲 구간을 벗어나자 남덕유산이 제 모습을 보여준다.

강풍에 하늘이 벗겨지고 파란하늘이 나타나자 꿈틀거리는 능선이 나를 압도한다.

 

다시 바람이 몰고 온 구름안개가 백두대간의 당당한 모습을 가둬 버린다.

자연의 변화무상함을 나에게 자랑이라도 하려는가 보다.

 

또다시 구름이 벗겨지고 햇살이 내리쬔다.

따뜻한 햇살이 아닌 차가운 햇살이라도 오늘 같은 날엔 매우 반갑다.


요즘 인간세상은 다가올 국회의원 선거로 떠들썩하다.

누구를 택해도 그 사람이 그 사람이라 찍긴 찍지만, 찍어도 또 4년을 고통 속에서 저들의

재수 없는 얼굴을 봐야하는 숙명을 우리는 피하진 못한다.


세속의 삶 자체가 전쟁이 된 세상이라지만 겨울바람마저 다툼의 대상으로 보여

칼바람이라는 이름을 붙였구나.  


순간적인 몽환상태는 먼 기억 속으로 나를 빠져들게 한다.

양구의 모진 눈보라 속에 손과 발을 동동 구르며 보초를 서던 40년 전의 추억으로

나를 데려간다.


그해 영하 28도였던가?

군 막사, 초소와 철조망에도 거대한 고드름이 열리고 바람이 닿는 살갗마다 빨갛게 변하며

동상 초기에 이르게 했던 강추위였지.

그래도 오늘은 차가운 바람이 살갗에 닿는 차가움 이상으로 마음은 따뜻하다. 


동엽령으로 향하는 산길이 곡선으로 꿈틀거리고 눈부신 금빛햇살이 왕창 쏟아져 내린다.

번뇌와 망상을 끊어 버리기라도 하듯이 쏟아지는 햇살에 잠시 눈을 감는다.

 

무(無)란 무엇인가.

나에게 무(無)란 어떤 존재인가.

스스로 묻고 답하지만 여전히 답을 할 수가 없다.


산봉우리를 서둘러 빠져나가는 구름도 무(無)요,

와서 부딪치지만 모습을 보이지 않는 바람도 무(無)로 바뀐다.

흰 눈 속에 꿈틀거리는 산릉을 눈앞에 두고 한순간이나마 마음을 바로 세우며 궁극(窮極)

세계로 들어간다.

 

                    <          무상(無常)


                         멀건 대낮에 달이 걸렸어도

                         덕유산에 서리꽃 피고 눈꽃이 피었다 져도

                         달이 가고 해가 간다.


                         이 겨울 지나며 거친 바람 사라지면

                         꽃이 피고 꽃이 지겠지.

                         또한 시간이 오고 세월이 지나면

                         나한테 왔던 목숨도 칠성신에게 가리라.        석천  >  


13;00

시장기가 몰려오고 콧김과 입김이 나와 안경을 뿌옇게 만든다.

찬 공기가 폐 속으로 들어가며 온몸이 신선해지길래 심호흡을 하며 몸속에 남았던

더럽고 탁해진 공기를 뱉어낸다.

 

대기 중의 산소농도는 평균 21%이며 사람에게 가장 이상적인 산소 농도는 23%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산소가 23%인 곳에서 살면 뇌기능이 좋아져서 건강과 질병에도 걸리지 않는다고 하며

힘도 좋아지며 천재가 된다고 한다.

 

참고로 서울시내의 산소 농도가 20.5%인데 강원도 산간지역의 산소 농도는 21%로

불과 0.5%의 차이에도 우리가 느끼는 쾌적감과 신선도의 차이는 매우 크다.


농도가 15~19.5%까지 낮아지면 집중력이 떨어져 두통과 구토를 일으키고 심폐 등

질병이 악화되며, 8%로 낮아지면 7분 만에 죽고, 산소공급이 중단되면 단 4분 만에

죽는다고 심폐소생술에서 강의를 맡았던 강동소방서 김윤수 소방관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산길은 하늘과 이어지는 통로인지 시간을 뛰어넘어 멋진 풍경을 보여주고,

능선에는 따스함이 스며든다.

 

조난사건이 일어났던 곳은 어디일까.

12월 양산 천성산을 오르던 날 이곳 덕유산에 1m 이상의 폭설이 내려 등산객 1명이 죽는

비극이 발생했다는데, 길은 시간을 뛰어넘어 멋진 풍경을 보여준다.


산이 다르면 그 세계도 다른 법인가?

그동안 다녔던 여느 산과는 조금 다른 풍경이 이어진다.

시원한 화각으로 세상을 펼쳐주니 나도 카메라의 화각을 넓혀 파노라마로 셔터를 누른다.

 


꿈틀거리는 산릉의 세상은 무엇인가 내가 표현할 수 없는 질서와 규칙이 있는 거 같다.

저쪽 봉우리에서 빛이 반짝이더니 어느 순간 유성처럼 내 가슴을 관통한다.


구상나무의 녹색이 흰 눈 위에 처연하게 빛난다.

멀리서 보면 산의 질서와 체계가 확고하다.


새해가 된지 두 달이 후딱 지나간다.

좋은 일 궂은일도 없이 무위의 삶은 지나간다.

세상만사가 다 그렇듯이 어느 한 곳을 향하여 시간은 흐른다.


희로애락(喜怒哀樂)과 애경사, 세상의 인심도 한 때의 감정일 뿐 또 이렇게 지나간다.

내가 스스로 판 함정도 세상이 만든 덫도 없는 무위미한 삶이 그냥 이렇게 연장되는가 보다.

  

그냥 이렇게 사는 게 내 인생이지.

종교인도 철학자도 아닌 내가 숱한 시간을 걷고 또 걸으며 깨달음을 생각하고 헤맨 게

어리석은 내 모습이겠지.


맞다.

고행하고 참선을 하는 건 내 목표가 아니다.

나머지 삶은 그냥 낮춤과 베풂, 그리고 조금이라도 더 진실에 가깝게 살면 되는 게 아닌가.

나를 괴롭히고 남을 괴롭히며 아만과 독선에 빠져서도 안 되겠지만 게을러 아무 것도

하려들지 않은 삶도 피해야겠지.


2015. 4. 23 장수 삿갓봉 산행 시 이리저리 구불거리던 오계치를 걸으며 많은 생각을 했었지.

그때 생각했다가 망각(忘覺)의 창고로 들어갔던 생각들이 실타래가 풀리듯이 술술 생각난다.

 

깨달음을 찾기 위해 출가를 할 거도 아니면 집을 나설 필요도 없지.

또 깨달아서 내가 무엇을 할 건가.


매순간 평범한 일상이야말로 나에겐 축복이고 극락인데 긴 세월 긴 시간을 먼 곳에서

깨달음을 생각하느라 나서고 시간을 낭비하였구나.

문득 내가 마음의 문을 걸어놓고 두툼한 벽을 만들었으니 깨달음은 늘 나의 밖에서 맴돌고

있었던 거다.

 

덕유평전의 아고산대에 눈이 녹으면 슬그머니 머리를 내밀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를 

생각하니 얼고 굳어버렸던 마음이 슬그머니 열린다.

그동안 내 마음은 얼마나 닫혀있었던 걸까.


이젠 세상의 만물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코로 냄새를 맡는다.

덕유산의 산길은 내가 그동안 지켜왔던 가치관 인생관 고정관념을 스스로 허물라고 한다.

허물면 마음의 문이 열리는 걸까.

 

이제껏 괜히 고상한척하며 깨달으려했지만, 이젠 깨달음을 찾아가지 말고

매순간 찾아오는 깨달음을 받아들이자.

지갑 속에 들어있는 로또복권을 생각하며 해탈(解脫)의 길로 들어선다.



13;20

송계삼거리에서 동엽령까지 2.2km가 남았고, 동엽령에서 안성탐방센터까지 4.2km가

남았으니 아직도 세 시간은 넘게 걸어야 목적지에 도착하겠다.



내리막길에 속도가 붙는다.

휘파람소리를 내며 나뭇가지를 스치는 바람소리는 제주 먼 바다에서 달려오던 파도소리와

닮았다.


능선을 조금 벗어나니 바람이 자는 곳이 있어 잠시 서서 아늑함을 즐긴다.

건너편 산마루로 비껴드는 햇살이 시야에 가득하다.

눈앞의 소나무에도 꽃처럼 햇살이 매달렸고 산마루 위 눈에도 빛이 소복이 내려앉는다.

 

지금 내 눈 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겨울 산의 풍경이다.

산등성이를 걸으며 쌓인 눈은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해준다.


백암봉(1,503m)이 묘한 웃음을 짓고 있다.

눈이 녹아 질퍽거리는 산길을 걷는 나에게 차가운 웃음을 보낸다.



14;00

어쩌다 산행을 하지 않으면 몸이 근질거리고, 동네에 있는 작은 산이라도 다녀오면

몸이 개운하다.


나에게 산행은 중병이라 이를 고칠 수가 없다.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장담을 할 수는 없지만 느림의 미학을 1,000회는 채워야겠지.


14;20

고갯마루에 또 바람이 몰아친다.

산과 신(神)이 다른 건가?

산에 심취하고 산에 묻어 산이 되면 신이 아닌가.


나는 오늘 신(神)을 찾아 산에 올랐지만,

산에 신이 있다면 내 안에도 산이 있고 신이 있다.



걸어온 길 아득하다.

중봉과 백암봉을 거쳐 이곳까지 4.3km를 걸어왔구나.

여기서 안성지원센터까지는 내리막길로 4.2km이다.


겨울은 매서운 추위로 우리를 웅크리게 하지만 흰 눈이 있어 쓸쓸한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주기도 한다.


텅 빈 숲을 메꾼 눈은 세상을 밝게 만든다.

시간이 지나면 녹아들어 새 생명을 만들어주는 생명수가 되겠지.


이젠 얼어붙었던 대지를 뚫고 돋아나는 아기 새싹들의 연약하지만 놀라운 힘을 보고 싶다.

힘들고 시끄러운 세상이지만 새싹을 보면 다시 세상을 살 수 있는 힘을 얻겠지.


14;40

산모퉁이를 돌아 무심히 귀를 기울인다.

어디선가 졸졸거리며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겨울이라는 시간이 멈춘 줄 알았더니 얼어붙었던 동토(涷土)에서도 시간이 멈추지 않고

물이 흐른다.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겨울이 떠나려한다.

봄이 오려하니 무위(無爲)의 자연이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오는 사계(四季)의 움직임과 변화는 누가

만드는 것도 아니라 때가 되면 순리대로 계절이 온다.

누가 하고자 함이 없어도 봄이 오고 있는 건 무위에 따른 우주자연의 원리인 천도(天道)이다.


웬만한 사람도 계절의 변화를 느끼면 시인이 되고 철학자가 된다.

계절의 변화는 신과 대자연이 우리에게 준 축복 중 가장 큰 축복이다.


세상의 흐름은 무위(無爲)다.

눈 녹아 흐르는 계곡물을 바라보며 세월의 뒤안길로 들어간다.  


15;50

큰바람이 지나는 덕유산의 능선에서 하루를 살았다.

칼바람을 맞은 얼굴에 열이 나면서 붉어지지만 산의 기(氣)를 받아 외면과 내면이

충만해진 하루였다.


오래간만에 큰 산을 종주하며 칼바람 덕분에 산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았다.

나무에 꽃눈과 잎눈이 부풀기 시작하고 아랫녘에선 심심치 않게 매화소식을 들려준다.

  

2.  26.  08;00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송이엔 애틋한 그리움이 스며들었다.

눈길로 스며드니 찬바람이 얼굴에 와 닿으며 그리움이 묻어온다.


누군가 그랬지.

그리움은 나이만큼 오는 거라고,

내 그리움은 청춘인가 아니면 지나간 추억일까.

내 사랑하는 이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그리움의 나이테는 오늘도 만들어진다.


무장도 없이 빈 몸으로 눈길을 걸으며 상념에 젖는다.

사람들은 아침에 눈을 뜨고 잠들 때까지 몇 가지 생각을 할까.


학자들은 자그마치 6만에서 8만 개라고 한다.

그래서 몸은 한가한데 마음은 바쁜 걸까.

 

총명했던 기억력이 많이 떨어짐을 느낀다.

늘 독서를 즐겨도 책장을 덮자마자 무엇을 읽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

 

휴대폰을 손에 들고도 찾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고, 생각나는 걸 기억했다가 메모를

하려하면 생각나지 않을 때가 비일비재하다.

다시 옛날식으로 지나가는 자동차 번호를 보고 기억하려 애쓰다 슬그머니 기억의

꼬리를 내린다.

 

이젠 기억력의 편견에 사로잡히지 말자.

기억을 하면 다행이고 못하면 말자고 편하게 생각하니 몸도 편해진다.


2016.  2.  28. 15;00

당구장으로 호출하는 친구의 전화를 받으며 무심코 창밖을 보니 세상이 설국으로 바뀌었다.

가뭄으로 먼지가 풀풀 날리던 곳에 함박눈이 하염없이 내리고 나무에 눈꽃이 피었다.


지나는 사람들도 넘어질세라 엉금엉금 걷는다.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리던 날이 언제였지.

하늘이 뚫린 듯 눈이 펑펑 쏟아지고 나는 십대의 동심으로 돌아간다.


흰눈은 빈 마음으로 자연을 바라보게 한다.

눈은 한없이 아름답다.


인생이란 정말 살만한 가치가 있다.

눈은 마음 가득했던 욕심과 미움을 깨끗하게 씻어준다.

빈 마음으로 눈을 바라보며 행복이란 누가, 신이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2016.  2.  28.  덕유산을 다녀와서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