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3. 24. 05;30
나는 봄을 기다렸을까.
며칠간 따뜻하다가 오늘은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린다.
봄을 기다리던 아이들이 힘껏 달려 나와 뛰어 놀던 골목길.
겨울의 황량함이 좋고 스산한 골목길에 낙엽 구르는 소리가 좋았는데,
작년에 비실대던 매화는 소식이 없고 옆의 매화는 꽃이 활짝 피었다.
발걸음 소리가 반향(反響)을 일으키는 막다른 골목길에 핀 또 다른 매화가 희미한
가로등 아래에서 암향(暗香)을 뿌린다.
09;40
김천 시내를 지나며 황악산이 머리에 흰 눈을 이고 우람한 체격을 자랑한다.
백두대간 줄기를 형성하는 저 황악산을 언제 오를까 상상을 하며 잠시 눈을 감는다.
세상이 시끄럽다.
4년마다 되풀이되는 소란(騷亂)을 피할 수는 없는 걸까.
신문, TV 등 온갖 매스컴에선 국회의원 선거로 세상을 도배한다.
여당이건 야당이건 국민은 안중에도 없고 서로의 권력을 위해 옥새파동이라는
희한한 방식으로 이전투구(泥田鬪狗)를 하는 저 사람들을 국민들은 어떻게 심판을 할 것인가.
10;50
꽃샘추위를 뚫고 올라온 제비꽃이 아우성친다.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 자연에서 새싹들의 함성소리는 진하고 아름다운데,
정치권 사람들의 시끄러움은 천박하기 짝이 없다.
봄은 늘 그렇듯 꽃들의 함성과 함께 찾아온다.
새싹들이 힘을 모아 땅을 뚫으려 안간힘을 쓰고 겨울잠에서 깬 개구리가 뛰쳐나온다.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싹을 틔운 '제비꽃'은 언제 보아도 신기하다.
새싹을 보며 생명의 신비로움과 경이로움에 감탄을 하는 내 마음속에도 한동안 사라졌던
사랑의 새싹이 어두운 겨울을 이겨내고 살포시 돋아나온다.
10;30
사무실 창가에 둔 난(蘭)의 이파리가 풀이 죽었다.
뿌리가 너무 왕성해 분갈이를 해줬는데 방법이 틀린 건지 아님 화가 났는지 활기를 보여주지
않고 시름시름 죽어간다.
비실대도 꽃대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떠나기 전 흠뻑 물을 주고 화분을 씻으며 여유로
남겨두었던 흙을 조금 더 덮었다.
난의 생명이 살아있는 한 흙이 마르지 않도록 물을 주며 나는 기다릴 것이다.
난(蘭)이 나의 어설픈 분갈이 실력으로 상처를 입었다.
나 스스로를 다그치는 조급함으로 나뿐만이 아니라 주변사람들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았는지 난(蘭)은 나를 되돌아보게 한다.
이번 산행이 끝날 때까지 잘살아 있을까 제비꽃을 보며 문득 생각이 난다.
10;50
지난번 덕유산에 이어 이번 팔공산 산행도 신선봉까지는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기로 한다.
나이가 들어서가 아니라, 산행시간을 단축시키기도 하거니와 무리한 산행을 하지 않기로
무언(無言)의 묵시적(默示的)인 행동을 하는 거다.
11;00
산을 오르는 여인들이 강한 억양의 경상도 사투리로 쉴 새 없이 재잘거리며 산의
적막을 깬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데 저렇게도 수다를 떨 수 있을까.
전문 산악인들이 산에서는 말을 적게 하고 침을 뱉지 말라고 했다.
노년에는 양생(養生)을 위한 7가지 비결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말을 적게 해서 진기(眞氣)를 길러야 내면에 참다운 기운이 길러진다.
쉴 새 없이 떠들면 폐의 기운이 소모되어 내면에 쌓여야할 기운이 밖으로 흩어지고
그 틈을 타 나쁜 기운이 밀려든다.
둘째는 색욕(色慾)을 경계하여 정기를 기른다는 것인데, 정욕을 함부로 하면 목숨은
아침 이슬과도 같다며 과도한 음양의 접촉을 경계한다.
셋째는 맛을 담박하게 해서 혈기를 길러야 한다는데,
이는 기름진 음식은 피를 탁하게 해서 혈관을 막기에 가급적 채식 위주의 식단으로
피를 맑게 하고 정신을 상쾌하게 하라는 메시지다.
넷째는 침을 삼켜 내장의 기운을 기른다는데 산에서 여기저기에 침을 뱉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침은 보약 중의 보약이라며 퇴계 선생은 맨손체조 중에도 입천장 위로 혀끝을 천천히
돌리면 진액이 혀뿌리로 고이는데 이를 뱉지 말고 삼키라는 것이다.
침은 소화액을 분비시켜 장의 활동을 활성화한다.
다섯째는 성을 내지 않아 간의 기운을 기른다.
놀라면 간이 철렁하고 겁이 없으면 간이 부었다고 할 정도로 간은 감정과 긴밀하게
작용을 한다.
따라서 분노의 감정은 간의 기운을 나쁘게 해 생체 리듬에 심각한 해를 끼치기에
화를 내지 말라는 거다.
여섯째는 음식을 알맞게 먹어 위장의 기운을 기른다.
좋은 음식을 많이 먹는 게 아니라 조화로운 균형을 취하기 위하여
건강에 필요한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해서 위장에 부담을 덜어주라는 것이다.
일곱째는 생각을 적게 해서 심장의 기운을 기른다.
쓸데없는 생각, 허황된 생각 등 몸을 짓누르는 지나친 생각은 건강을 해친다는 것이다.
나이가 벌써 육십 대 중반이다.
건강은 생각과 운동, 음식의 균형과 조화에서 나온다.
말은 줄이고, 감정은 가라앉히고, 욕망은 억제하고 생각을 아끼라는 뜻인데
과연 잘 지켜질지가 문제로다.
어쩌면 치우침 없이 균형을 잡고, 넘치는 것보다 조금은 부족한 듯이 살라는
옛 현인의 교훈이라 생각하며 산길을 걷는다.
11;10
오른쪽 능선에 팔공산을 망친 골프장이 흉물스럽다.
어림잡아 8부 능선까지 치고 올라온 골프장이 팔공산의 기(氣)를 잘랐다.
전두환 때 허가가 났고 노태우 때 산허리를 파헤쳐 순환도로를 만들었다니 아이러니하게도
대통령의 기가 서린 팔공산이 대통령들 덕분에 망가졌구나.
산을 송두리째 망가뜨리는 골프장이 비단 이곳에만 흉물스런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만
유감스럽게도 전국 대부분의 명산이 골프장으로 망가지고 멍이 들었다.
팔공산은 풍수지리학으로 봉황이 알을 품은 봉황포란(鳳凰包卵)형이라 한다.
그중 이곳 신림봉(神臨峰)의 세 봉우리는 봉황의 자궁부에 위치하고 세 개의 바위는
봉황의 알을 상징한다고 하며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란 영화 촬영지로
유명하다고 안내판에서 설명한다.
지금 해발고도 820m,
정상인 비로봉까지는 이곳에서 373m만 고도를 높이면 된다.
나에게 산(山)은 자연의 환유(換喩)다.
산에 들어서면 어느 순간 나도 산이 되는 거다.
비록 백수의 삶이지만 가끔은 이렇게 세상사에서 벗어나 자연을 벗 삼은 산사람이 되면
뱃속이 편안해진다.
이상향(理想鄕)이 산속에 있건 없건 따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나의 로망(Roman)은 무엇인가.
남자는 로망으로 산다는데, 청춘이 사라진 황혼이라도 꿈이 없으면 남자가 아니겠지.
얼마 전 버스정류장에 구직 포스터가 붙어있기에 자세히 읽는다.
모집 직종은 주차관리 환경 위생 보안인데, 실제로 환경과 위생은 청소원이고,
보안은 젊은 청년의 몫이라 나이 든 사람들에게는 경비와 주차관리 직종뿐이다.
가끔은 남자들이 가장 힘들어 했던 군대에 입대하는 꿈을 꾸기도 하지만,
넥타이를 맨 정장차림으로 현관을 나서는 꿈을 꾸기도 하기에 과감히 도전을 할까
생각하다가 슬며시 그 꿈을 접는다.
2010년 5월 20일 비슬산을 오르며 팔공산(1,193m)이 궁금했었지.
대구지역의 3대 명산은 팔공산 비슬산 보현산이라 했다.
비슬산에서 아스라이 이어지는 팔공산은 늘 그리움의 대상이었지.
임금 왕(王)자가 네 개인 비슬산(琵瑟山)의 정기를 받아 임금 즉 대통령이 네 명이
태어난다는 전설이 실현된 지역의 팔공산을 마음에 둔지 8년이나 지나 오늘 오른다.
동봉(東峰)과 서봉(西峰)의 양 날개에 쌓인 비로봉(1,193m)이 외롭다.
지도를 보니 남동쪽의 초례봉(648m)에서 시작하여 환성산(811m)과 인봉(887m)을
거쳐 팔공산에 이르고 이어 가산(架山 902m)에 이르는 팔공산맥이 환상(環上)의
산지를 이뤘다.
꽃샘추위가 한겨울 추위보다 맵다.
바람이 생강나무의 노란 꽃망울을 흔든다.
이 무렵 봄바람은 심술궂게 꽃망울을 흔들고 가슴을 파고들어 꽃샘추위라는 말을
붙였나 보다.
우수 경칩이 지나 겨울이 갔다는 방심(放心)을 뚫고 들어오는 꽃샘추위가 몸을
웅크리게 한다.
봄이 봄 같지 않으면 진달래를 볼 수 있을까?
숲 속에서 청아한 새소리를 들을 수 없을까봐 괜히 마음을 졸인다.
< 기다림
기다림이란
기다림은 성급한 욕심이다.
이 순간 내가 기다리던 복수초가
봄바람과 함께 왔다.
복수초를 보기 위해
나는 긴 겨울 내내 기다렸지.
삶에서 기다림은
가슴 아리는 일이지.
기다리는 일은
세상 어떤 일보다 더 가슴 아프지.
순결하고 아름다운 꽃
노란 복수초는 내 마음을 씻었는지
씻긴 내 가슴속에 담겼던 탁한 기운이
허공(虛空)으로 슬며시 사라진다. 석천>
나는 노란색이 이렇게 강렬하고 화려한줄 몰랐다.
노란빛이 유난히 더 나는 것은 복수초 꽃잎이 형광 빛을 띠어서인 모양이다.
풍선이 부풀어 오르듯 화려한 꽃망울을 터뜨린 복수초,
복수초는 정녕 초봄의 화신(花神)이다.
밝고 선명한 노란색 꽃잎과 가득 모인 수술, 수술 속에는 연둣빛 암술이 돌기가
난 듯 돋았다.
복수초는 스스로 많은 열을 내 눈(雪)을 녹이며 꽃이 핀다.
이 꽃은 비록 눈과 얼음 속에 핀 꽃은 아니지만 따뜻한 원색의 노란 꽃 복수초를 바라보니
마음속에 쌓였던 근심 걱정이 사르르 녹아 사라진다.
얼음새꽃, 눈색이꽃으로도 불리는 복수초.
어둡고 춥고 힘들었던 동토(凍土)를 뚫고 강인한 생명력의 모습으로 다가와
생명의 존귀함을 보여주는 복수초(福壽草)는 눈 속에 피어 설연화(雪蓮花)라고도 하지.
이른 봄에 노랑의 열정으로 자신을 불태우는 복수초는 한여름이 오기 전에 푸른 대지를
양보하고 땅 속으로 숨어드는 하고현상의 대표 식물이다.
녹음이 우거진 한여름에는 풍성한 숲을 양보하고 푹 잠을 자다가 이듬해 제일 먼저
일어나서 부지런을 떠는 복수초는 묘한 자연의 원리를 지키며 생존전략을 짜서 실행하기에
얼마 후면 이곳에서 모습을 감추겠지.
11;20
동봉이 2.2km 남았다는 이정표를 보며 오솔길을 오른다.
이 숲길에선 세상의 시끄러움을 피하려는 내 일행의 발걸음소리만 들린다.
또한 세상을 피한 내가 숨 쉴 길이기도 하다.
요즘 같으면 힐링(Healing)이 정말 필요한 것 같다.
나 자신에게 스스로 묻는다.
왜 숲길을 걷는가,
숨을 헐떡이며 힘들여 산에 왜 오르는가,
치유를 위해서인가,
내 마음속에도 감춰지고 방치된 아픔이 있는 건가?
치유(Healing)가 아니라면 아프기 위해서일까?
맞다 나는 숱한 세월 담아두었던 아픔을 꺼내기 위해 이 숲길을 걷는 거다.
진한 솔 향을 담은 봄바람이 폐부 깊이 들어오니 비로소 심란(心亂)이 다스려지며
나의 내면(內面)이 바라보인다.
그동안 나는 허물덩어리였던 모양이다.
11;40
내게 가족과 평생 우산이 돼준 직장이 있었고, 공무원처럼 풍족한 연금은 아니지만
국민연금과 집이 있다면 노후는 보장되는 것인가.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을 받고 먹거리 놀거리 볼거리에 문제가 없다면 백세인생을 살려나.
며칠간 스트레스에 의한 위염으로 시달리다 헛것을 보는 악몽을 꾼다.
머리 수술 후 처음 겪는 몸 상태이다.
귀신들이 상복(喪服) 차림으로 제사상을 들고 시골집 사립문을 열고 들어오려 하기에
못 들어오게 몸으로 막는다.
어느새 귀신 하나는 사랑방에 들어가 돌아가신 어머니 아버지 고모와 사촌누나까지
술을 마셔 취하게 하고 씩 웃으며 방에서 나온다.
온몸이 섬뜩해 잠에서 깨니 꿈이었고 몸이 다 젖었다.
오한이 들어 체온을 재니 39.4도까지 열이 올랐구나.
침대에서 천장을 바라보며 내 인생은 뭐였나, 참으로 열심히 살아온 인생이었는데,
문득 인생이 허무(虛無)하다는 생각이 들었지.
11;40
낙타봉에 도끼로 반드시 쪼갠 듯한 바위가 나온다.
신라시대 공산(公山), 부악(父岳), 중악(中岳)으로 불렸던 팔공산 능선이 춤을 춘다.
팔공산의 옛 이름은 공산 부악(父岳)이라 했는데 삼각산의 아기를 업은 부아악(負兒嶽)과는
다른 뜻이다.
후삼국시대 고려 태조가 5,000명의 군사로 후백제군을 정벌하러 나섰다가 공산(公山)
동수(桐藪)에서 견훤에게 포위를 당한다.
그때 신숭겸이 태조로 가장하여 수레를 타고 적진으로 돌진 장렬히 전사하며 태조 왕건의
목숨을 구했다.
당시에 신숭겸과 김락 등 8명의 장수가 모두 전사하여 팔공산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하는데,
몇 년 전 배우 최수종이 열연하였던 태조 왕건의 드라마에서 공산 전투장면을 생생하게
연출한 적이 있다.
신숭겸 장군의 묘는 춘천 서면에 있다.
신숭겸이 왕건의 옷을 바꿔 입고 적진에 돌진하여 목이 잘려 죽는다.
훗날 왕건이 이를 비통해 하며 황금으로 머리를 만들어 도선국사가 자기를 위해 점지해둔
춘천 명당에 그를 묻었는데 황금 머리를 도굴 당할까 걱정해 묘를 세 개나 썼다.
실제로 신숭겸의 묘는 봉분이 왕릉처럼 큰 묘 세 개가 앉아 있다.
또 다른 전설(傳說)로는 양산의 천성산에서 원효대사의 제자 1,000명 중 8명이
팔공산의 동화사에서 깨달음을 얻어 팔공산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설(說)도 전해진다.
정상인 비로봉과 동봉 서봉의 모습이 주변의 구릉지와는 달리 종상의 산형으로 상부의
퇴적암이 제거되고 그 밑의 화강암이 돌출되어 멋진 형상을 보여준다.
비로봉이 0.9km 남았다는 이정표를 뒤로 하고 다시 오른다.
바람이 일더니 산이 통째로 숨었다가 다시 나타나 묵중한 근육을 자랑한다.
그림자도 숨어버린 산길을 걷는다.
이런 길에서 아픔과 그리움을 내려놓으면 신선(神仙)이 되겠지.
편안했던 흙길은 아기자기한 바윗길로 변하고,
험로는 아니지만 가파른 바윗길이 산행의 묘미를 준다.
차츰 고도를 높이며 산길도 가팔라진다.
나무 밑에 얼레지가 피었을까 노루귀라도 피었을까 기웃거려도 꽃은 보이질 않는데,
눈밭에서 꽃을 구하니 연목구어(緣木求魚)를 하는 어리석은 내 모습이 우습기만 하다.
12;20
가파른 산길을 올라 바위군을 만난다.
기기묘묘한 바위와 벼랑에 뿌리를 내린 고고한 소나무가 멋진 풍경을 보여준다.
팔공산엔 아직 겨울이 남은 걸까, 아님 봄이 오지 않은 걸까?
바람이 온유한데도 해발고도 1,000m를 넘어서니 잔설이 남았다.
< 봄
산 위에서 봄을 찾았지만
봄은 보이지 않네.
구름 덮인 산마루를 올라와도
봄이 없으니
내려가 산동백향을 맡을까.
봄은 소나무 가지에
이미 무르익었는데
나만 겨울이라 하는구나. 석천 >
우리나라 대부분의 산은 불교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지만,
이곳 팔공산이야말로 부처의 산이다.
정상에 올랐다가 하산 길에 만날 신라 천년고찰 동화사(桐華寺)는 조계종 제9교구 본사요,
동쪽의 은해사(銀海寺)는 제10교구 본사로서 8개 암자와 50여 말사를 거느린 대찰(大刹)이다.
뿐만 아니라 수도사와 진불암, 파계사와 군위삼존석굴의 석굴암이 있어, 온 산에 부처의
기운이 깃들지 않은 곳이 없는 팔공산인데,
지금 오르고 있는 산길의 기기묘묘한 바위 밑에는 다행스럽게도 촛농과 그을음으로 검게
변한 곳이 없다.
사람들은 이 코스에서 치성과 기도를 별로 드리지 않은 모양이다.
12;40
정상인 비로봉까지는 0.4km가 남았기에 서봉을 거치지 않고 비로봉으로 곧장 오른다.
방향을 틀고 높이 오를수록 산은 새로운 모습으로 나를 들뜨게 한다.
녹지 않은 눈과 텅 빈 산길의 변화는 진달래나무의 꽃눈부터 시작된다.
검은 구름이 산 위를 덥고 멀리 금오산으로 짐작되는 능선이 꿈틀거리고
사람이 사는 아래 세상을 바라본다.
동화사 지붕이 아스라이 보이고 능선에는 아지랑이 피어오른다.
구름이 오락가락하며 그늘을 드리웠다 밝게 하니 산과 아래 세상은 그 때마다
새로운 빛과 모습으로 변한다.
신라는 오악 중의 하나인 팔공산 비로봉에 제천단(祭天壇)을 두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제천단표지석을 읽으며 나는 잠시 신라인(新羅人)이 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오악(五岳)을 동악은 토함산, 서악은 계룡산, 남악은 지리산,
북악은 태백산, 중악은 지금 내가 밟고 있는 공산 즉 팔공산이라고 한다.
13;00
두시간만에 팔공산 비로봉 정상(1,193m)에 선다.
작년 4월 23일 장수 삿갓봉을 오르며 오계치 4거리에서 '천성데미'라는 멋진 이정표를
만난다.
그 이정표에 있던 팔공산이 이곳인줄만 알았는데 오르며 지도를 보니
전라도 진안에 있는 팔공산(八空山 1,151m)과는 이름만 같은 뿐 전혀 다른 산이다.
어느 산에 오르던지 나는 정상의 적막이 좋았다.
정상에서 몸에 부딪치는 바람에 흔들리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게 좋았다.
정상에 나무 한 그루만 있어도 좋았다.
그런데 이 모습은 어떤가.
군사시설과 통신시설로 볼썽사나운 정상의 모습에 실망을 하지만,
그래도 동봉~서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한 점도 흐트러지지 않고 당당한 기세로 뻗어나갔다.
고목나무에 앉아있던 까마귀가 멋진 비상을 한다.
살짝 날리는 눈발에 놀랐는지 다소 성급한 모습을 보이기에 땅콩을 몇 개 밑으로
던져준다.
사나운 산 정상의 적막 속에서 작은 몸을 웅크려 떨다가 비상을 마치고 비록 연분홍 꽃이
핀 나뭇가지는 아니지만 나목(裸木)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봄기운이 아직 정상까지 올라오지는 않았지만 까마귀는 봄이 지척에 다가왔음을 안다.
앞으로 날아와 눈인사를 나누려는 까마귀를 주목하며 한잔 술로 노고를 달랜다.
까마귀는 뽀르릉 날아가고, 나는 앉았다 날아간 고목의 나뭇가지를 바라보다가
날아 내려간 길을 조용히 따라간다.
산 아랫길은 간간이 날리는 눈발사이로 신비로운 매력을 지닌 봄의 길을 만들려고 소리 없이
아지랑이가 선다.
< 까마귀
적막한 팔공산 정상
북풍에 시달리던 고목에
작은 까마귀 하나 찾아와 무심히 앉았구나.
작은 깃 접어 다리 오그리고
죽어 꽃 피지 않을 나무에 앉아
거친 산길 올라 온 나를 문안하는구나.
까마귀 앉았다 떠난 가지
꽃샘바람에 쉴 사이 없이 한들거리는데,
까마귀는 여운을 남기지 않고
산 아래 봄 길을 찾아 떠났다. 석천 >
13;40
시간이 흘러간다.
세월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잠시 머무는 듯 했던 세월은 눈 한번 깜짝하는 사이에 지나가며 얼굴에 흔적을 남긴다.
세상사의 모든 존재는 흔적을 남기며 변하고 흘러간다.
그래서 인생무상(人生無常)이 아닌가.
눈발을 날리게 하는 짙은 구름이 산을 찍어 누르는 기세로 갈리면서 태양은 숨어 버렸고
산은 깊고 둔중한 고요 속으로 빠져들었다.
시린 바람이 분다.
바람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데 하늘에 뜬구름은 흔적을 남기며 빠르게 흘러간다.
불다간 시린 바람이 귓가에 머물고 산길엔 바스락대며 낙엽 밟는 소리가 고요를 깬다.
햇볕을 감춘 숲 어디선가 종다리 울어 메아리친다.
14;18
염불암엔 인적이 끊겼다.
염불소리 풍경소리 들리지 않고 봄바람이 귓가를 스치며 서둘러 내려가라 한다.
동화사까지 1.9km가 남아 둘은 케이블카 방향으로, 나는 동화사로 내려가 합류하기로
하고 헤어진다.
14;20
인적이 끊어진 산길에 선 염불암 당간지주가 외롭다.
당간(幢竿)은 본래 사찰의 입구에 꽂는 기당(旗幢)의 일종으로 사찰에서 기도와 법회 등
행사가 있을 때 당간의 꼭대기에 깃발을 달아 귀신이 접근을 하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겨울이 깊어질수록 길어질수록 나는 침묵을 지킬 수 있었지.
이젠 길었던 겨울과 안녕할까.
봄은 세상의 만물과 나를 침묵에서 깨어나게 해 아우성을 치게 한다.
여기저기서 튀어 나오는 풀과 꽃,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함성을 지른다.
동화사가 가까워지며 소나무가 숲을 메꿨다.
소나무 송(松)은 나무(木)와 공(公)자가 합쳐진 합성어로 지체 높은 나무라는 뜻이다.
소나무를 스친 바람이 솔 향을 품고 내 가슴속으로 들어온다.
우리나라의 삼림은 646만 4천ha로 국토면적의 약 65%라는데 1970년대까지는 소나무가
전체 산림의 50%를 차지하다가 자연환경의 변화에 따라 지금은 23%인 150만 ha로 줄었다고
한다.
소나무가 이 땅에서 사라지는 원인은 병충해, 산불, 지구온난화 등을 꼽는데,
특히 겨울철 이상 고온이 지속되면 땅에 수분이 빠져 나가 고사하게 된다.
소나무는 양수(陽樹)라 많은 햇빛이 있어야 잘 자라는데 요즘은 숲이 우거지고,
활엽수 잎들이 바닥에 쌓이면서 소나무의 자연발아를 차단하는 것도 감소의 원인이 되는데,
특히 소나무 재선충병이 전국에 퍼지면서 많은 소나무를 말라죽게 한다.
허리를 구부려 솔잎을 줍는다.
소나무를 잎으로 구분하면 두 갈래 잎으로 적송, 해송, 반송이 있고,
세 갈래 잎으로 백송, 리기다소나무, 테다소나무와 우리나라에서 개발하고 미국의
교과서에도 수록된 리기테다소나무가 있다.
이밖에도 다섯 갈래 잎인 오엽송의 대표로 잣나무가 있다.
종별로 따지면 붉은 수피를 가진 적송(赤松)이 있는데 나이가 먹으면 껍질이 거북등처럼
갈라지며 하늘을 향해 매끈하게 쭉 벋는 육송(陸松)과 바닷가에서 자라는 해송(海松)이 있다.
육송으로는 줄기기 밋밋하고 곧게 자라는 금강송, 미인처럼 쭉 벋은 미인송, 강원도
춘양에서 자라는 황장목의 대표인 춘양목과 잎에 흰색 또는 황금색의 가는 선이 세로로 있는
은송이 있다.
이밖에도 처진 소나무인 반송(盤松)으로 가는 가지를 길게 아래로 늘어지는 운문사의 처진
소나무가 유명하고 우리학교 교정의 반송도 유명하다.
바닷가에 서식하는 해송(海松)은 바닷바람을 많이 맞아 껍질이 거칠고 강한 잎을 가지고
있는데 곰솔 흑송으로도 불린다.
14;40
소나무 숲 속에 스님의 부도가 홀로 있다.
대부분의 사찰에선 부도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이 부도는 외로이 떨어져 있다.
부도(浮屠)는 승려의 유골이나 사리를 모신 것이다.
이 부도는 바닥돌 몸돌 지붕돌을 갖춘 팔각원당형으로 임진왜란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이 된다고 안내판에서 설명을 한다.
앙상하고 메말랐던 나뭇가지에 물이 오르기 시작한다.
나는 돌틈가에 바람이 무서운듯 오들오들 떠는 '노루귀'를 만난 거다.
1cm도 되지 않는 가녀린 꽃 노루귀는 겁이 많은지 덤불속에 숨었다가 내가 다가가자
몸을 웅크리고 떤다.
솜털이 뽀송뽀송 달리고 옆에 피지 않은 꽃망울은 천상 노루의 귀다.
꽃에 앵글을 가까이 대며 꽃망울에서 비쳐지는 애수(哀粹)를 본다.
가녀린 목에 나있는 하얀 솜털은 노루의 슬픈 모가지이다.
하늘을 우러러 활짝 핀 한 송이의 노루귀는 당당함보다는 애상한 생각을 연상하게 한다.
노루귀가 피었으니 정녕 봄은 온 거다.
노루귀의 귓바퀴에 달린 꽃망울은 부드러운 봄 햇빛과 온화한 남풍을 받으면 금세라도
터뜨릴 준비를 마쳤다.
심신(心身)이 시름겨운 겨울의 버거움에 내 몸은 천근만근 가라앉았지.
죽었던 나뭇가지, 사라졌던 절망의 꽃이 새희망으로 부활하는 걸 바라보니
15;00
동화사로 들어선다.
가장 먼저 봉서루(鳳棲樓)를 만난다.
봉서루는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동화사에 영남승군사령부를 두어
전설속의 봉황새는 오동나무에만 둥지를 튼다고 한다.
경내를 한 바퀴 돌아 고목(古木)을 만난다.
인악대사(仁嶽大師)의 나무라 불리는 거대한 느티나무에 푸른 기운이 돈다.
수령이 500년이나 되는 나무뿌리에서 줄기를 거쳐 가지까지 물이 오르나 보다.
지난 가을 화려했던 생을 마치고, 겨울의 파괴적 과정과 숱한 역경을 이겨내고 드디어
새싹을 틔우려 하니 자연의 법칙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인간도 자연의 한부분이다.
태어나서 성장하고 노쇠의 과정을 거쳐 생을 마감해야 하니 풀에 맺힌 한 방울의
이슬과 다름없다.
느티나무 너머로 꿈틀거리는 능선은 어느 산일까.
보현산인가 아님 금오산일까.
부도군(浮屠群) 아래 저수지에는 내 걸음만큼이나 봄이 급히 다가오고 있다.
유난히 짧고 잿빛이었던 하늘이 파래지며 태양의 꼬리가 길어진다.
이 시간이면 사위에 어둠이 내려앉아 적막이 쌓이는데, 춘분이 지나니 아직도 산 능선에
태양의 긴꼬리가 걸렸다.
21;00
둥근 보름달이 능선을 타고 중천으로 오르기 시작하더니 어둠이 지배하던
산속의 주인이 순식간에 바뀐다.
달빛 참 시원하다.
밤하늘엔 별이 흐르고 구름이 사각 댄다.
평화가 머무는 깊은 숲 속에서 나는 지금 무엇을 하는 걸까.
혹시라도 불멸(不滅)의 시간을 기대하는 걸까?
세월의 긴 시간 앞에서 기억과 추억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창밖의 밤하늘을 바라보며 메모를 하던 내 손은 슬그머니 떨린다.
한잔 술에 취기가 오르니 모든 게 번거롭고 귀찮다.
감정도 애매한데 메모를 하지 말까?
그러면 나 스스로가 정한 약속을 스스로 깨는 건데, 문득 약속을 깨고 싶은 유혹을
강하게 느낀다.
이제까지 우매한 졸필이라도 끄적거리며 삶의 흔적을 남겼는데,
외로움을 마주하고 겨울을 견디면서도 흔들리지 않았는데 이젠 자꾸만 흔들린다.
많이도 지쳤나 보다.
누구나 한번은 걷는 인생길에서 지치기도 한다.
삶이라는 거대한 인생길에서 벌써 지치면 안 되는데 마음이 어두워진다.
삶이라는 여행길이 아직은 끝이 아닌데, 어둡고 흐릿했던 계절이 끝나가는 환희를
느끼기에는 마음이 점점 멀어진다.
이 산행이 끝나면 이곳이 미치도록 궁금해질까.
가진 것이라곤 평범함밖에는 없는데 애써 비범한 척을 하기도 힘들다.
저 달빛 너머 숨어있는 진리를 추구할 수도 없는 평범함이 나의 민낯인데
이제 그만 둘까 별별 생각이 다 든다.
나는 그동안 세월이 흘러가며 잊혀져가는 사람이 돼가도 당당하게 나의 라이프
스타일을 강조하고 부정적인 현실을 이겨내려고만 했다.
출세나 물질적 풍요, 명예에 집착하지 않고 쓸데없는 욕망에 휘둘리지 않는
삶의 방식을 추구한지 이미 오래되었다.
이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겠지.
평범한 것이 오래가고 힘이 세다는 것을 요즘에 와서 느낀다.
2016. 3. 25. 대구 팔공산에서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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