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느림의 미학 307 삶에서 잃어버린 것과 잊은 것 <완주 대둔산 878.9m>

김흥만 2017. 3. 27. 11:08


2016.  4.  2.  05;50

집을 나서며 활짝 핀 청매화 홍매화에 가까이 코를 대고 심호흡을 했었지.

매화의 그윽한 암향이 가슴속으로 스며들기에 가던 길 멈추고 음미를 하다가 잠실행

직행 좌석버스를 놓친다. 


목적지까지 삼십분이면 충분한데, 다시 올 버스를 기다리기 싫어 시내를 통과하는

버스에 올라탄다.


07;00 

찬 서리 북풍한설 칼바람을 이겨낸 운동장역 공원의 목련과 살구나무 꽃망울이 터진다.

출발시간이 다가오자 친구들의 경쾌한 모습과 발소리가 들린다.


사월의 첫 주말 봄바람이 그리워 남녘으로 달린다.


나이를 생각하다 갑자기 답답해진다.

이 나이가 되도록 내가 해 놓은 것이 무엇일까.

내가 잊어버린 것은 무엇일까.


연두색으로 변하는 차창 밖 들판을 바라보며 잠시 상념에 젖는다.


내가 잃은 것은 무엇일까?

청춘과 명예인가 아님 자존심인가?


건강과 우정인가,

버스에 앉은 친구들의 얼굴을 바라본다.



인간관계에서 특히 우정은 유리와 같아 쉽게 깨질 수가 있다.

우리 나이에 우정이 깨지면 회복이 매우 어렵다.

어쩌면 황혼의 나머지 삶에서도 치유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


작은 충격에도 깨지는 사람의 마음은

서운한 말 한 마디에도 수십 년간 쌓았던 우정의 탑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다.


10;15

고개를 돌자 날카로운 암봉(巖峰)이 대둔산을 수(繡) 놓는다.

급히 촬영을 하지만 순식간에 지나가고 나는 다시 상념에 젖는다.


우정도 쉽게 깨지지 않으려면 서로의 사랑과 믿음, 그리고 서로의 눈이 마주칠 때마다

부드러운 미소가 필요하다.


즉 서로간의 신뢰와 관심 그리고 배려에 의해 유지되는데 여기에서 배려란 깊고 큰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큰 것이 아닌 사소한 배려에도 친구는 고마워하니 같이 산행을 하며 나의 주변을 둘러보며

자기성찰의 시간을 갖는 것도 좋겠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고 마음을 연다는 게 점점 어려워진다.

오늘만은 마음의 문을 열고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 세상이 밝게 보이고 그동안 잃었던 것과 

잊었던 것들이 튀어 나오겠지. 


대둔산엘 언제 올랐지?

주택은행 인사부에서 나와 둔촌동지점에서 근무할 때구나.

1988년 서울 올림픽이 끝나자마자 추계 체육행사로 대둔산 산행을 하는데

전세버스에서 새벽부터 술을 많이 마셔 조금 오르다 다 토하고 산행을 포기한다.


당시엔 젊고 평소 운동을 많이 해 가슴의 복근이 임금 왕(王)자를 그릴 때라 겁 없이

버스에서 술을 많이 마시는 오기를 부려 망신을 당한 거다.

같이 마시고 토했던 중학교 대선배이자 상사였던 형님은 얼마 전 뇌출혈로 불귀의 객이

되었지.


시인들은 그리움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통이라 했지.

헤어지면 만나고 싶어 그리워하고, 만나면 더 같이 있고 싶어서 그리워한다.

나이가 들면서 누군가에게 그리운 사람이 되기를 원하기도 하지만, 젊었던 시절의 청춘은

생각만 해도 그리움으로 가슴이 떨린다.


10;40

산의 기(氣)는 무엇일까

여기는 전형적인 골산이다.

시멘트 포장길이 끝나자 본격적인 오름이 시작된다.



사람은 산을 만들지 못하지만 산은 사람을 만든다.

사람을 만드는 산의 계단을 오르며 숨을 헐떡인다.


산과 자연은 내 인생의 스승이라 산에 들어올 때마다 산은 나의 존재를 깨우치게 하지.

오를수록 경사는 심해진다.


겨우내 창백했던 대지가 제빛을 찾기 시작한다.

지나면 찰라와 같이 짧은 봄이지만 그래도 그 안에 머무는 게 좋지.


해설사와 같이 올라오는 학생들로 산길이 소란스럽다.

일제유심조(一切唯心造)라 세상일은 마음 먹기에 달렸다.


팔공산에서 시끄럽던 여인들은 보기 싫었으나 오늘 대둔산에서 재잘거리는 학생들은

귀엽고 예쁘다.


어쩌면 산다는 거 별거 아니라고 학생들이 해맑은 웃음으로 교훈을 주며

따지지 말고 그냥 있는 대로 보고, 들리면 들리는 대로 들으며 보통으로 사는 게 최고라고

가르쳐 준다.


잘났다고 으스대지 말고,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둥글둥글 사는 게 제대로

살아가는 인생의 모습 아니겠는가.


허리를 펼 수 있는 공간이 없어 고개를 푹 숙이고 숨을 헐떡인다.


11;20

신라 문무왕 때 국사(國師)인 원효대사가 처음 이 바위를 보고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3일을 이 바위 아래에서 지냈다는 전설속의 동심바위가 금방이라도 굴러 떨어질듯

아슬아슬하게 허공에 달려있다.


기암괴석이 금강산을 방불케한다하여 금강 계곡으로 불리는 협곡을 오르며

허공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구름다리를 바라본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이 금산을 점령하였을 때 영규 대사가 의병과 함께 싸우기 위해

금강문을 통과하였고 권율 장군의 전승지이기도 하다.


이 길은 삶이 버거울 때 땀을 흘리며 올라야 제격인 길이다.

모자 밑으로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눈 속으로 들어와 눈이 따갑다.

한걸음씩 오르며 인생살이의 고단과 고뇌가 떠오른다.


잠시라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돌길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오른다.


여기는 바위세상이다.

된비알이라 허리를 잔뜩 구부리고 오른다.

대둔산은 낮게 천천히 삶을 살아가라는 지혜를 준다.


기기묘묘한 바위 사이로 인생에서 고맙고 감사한 존재인 친구들과 하염없이 오른다.


해빙기라 낙석(落石)의 위험을 이야기 하다가 예전 지독히 운이 나빴던 선배 지점장

생각이 난다.


참 오래 전이었지.

미국의 경제학자 R. 넉시가 저개발국의 자본형성에서 '빈곤의 악순환'을 주장했는데,

고교 2학년 때 정재탁 선생님이 경제 시간에 빈곤의 악순환에 대해 열강을 했지.


악순환이라,

삶에서도 나쁜 일만 악순환 되는 선배 지점장이 있었지.

주택은행 모 지점에서 내가 떠난 얼마 후 숙직자가 2층 여직원 탈의실에서 추락사를 하고,

군대에 입대한 소속직원이 해일에 밀려 순직을 한다.

몇 개월 후 또 한 직원이 영등포지점 숙직실에서 잠을 자다 병원으로 이송 중 사망을

하는 등 사고가 그치질 않는다.


그 선배가 성남지역 지점장으로 부임하어 춘계 체육대회 행사로 등산 중

낙석이 굴러 여직원이 불구가 되고, 다시 수원지역 지점장으로 재직을 하며 1억 원이라는

어음교환 사고가 난다.

지금도 1억 원은 엄청 큰 금액이지만 당시엔 놀랄만한 큰 금액으로 사고가 난 거다.


문제는 그 분의 불행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는 거다.

은퇴 후 2개월 정도 되었을 때 과음으로 곁방에서 자다가 손 한번 쓰지 못하고 돌연사로

불귀의 객이 된다.

술을 마셨더라도 부부가 같은 방에서 취침을 하였더라면 빠른 조치가 가능했을 텐데,

그분의 장례식장에서 개탄의 목소리가 많이 들렸지.


그분으로 인해 은퇴 후 마(魔)의 2개월이라는 말이 유행이 되기도 했지만,

실제로 은퇴 후 2개월에서 2년 사이에 은퇴 선배나 여러 동료들이 불귀(不歸)의 객이

되었다. 


참으로 묘하다.

경제나 사람이나 뒤웅박 팔자가 되면 악순환이 반복되어 헤어나기가 힘든 게

자연의 법칙인 모양이다.


돌이 있으면 있는 대로 힘들면 힘이 든 대로 받아들이자.

아무리 힘든 길이라도 끝이 있고, 길이 끝나는 지점엔 어김없이 또 길이 있겠지.

누구도 거부하지 않는 산길에서 나는 또 하나의 배움을 얻고 돌아가겠지.


바윗길을 오르며 잠시 긴장을 한다. 


홍혜걸 박사의 의학정보에 의하면,
산으로 가는 길엔 등산(登山)이 있고 입산(入山)이 있다고 한다.

등산은 땀 흘리며 운동을 하는 거고, 입산은 세상살이를 하다가 궁지에 몰렸을 때
답을 구하고 구원(求援)을 강구하는 길이다.

영기(靈氣)를 맞으려면 흙으로 덮힌 육산(肉山)에 등산을 하고,
정기(正氣)를 얻으려면 바위로 덮힌 골산(骨山)에 입산수도를 하라고 한다.
말 그대로 통즉등산(通卽登山)이요, 궁즉입산(窮卽入山)인 것이다.

나이 60대에 제대로 걷지 못하면 인생 끝장이고, 비참한 인생이 된다.
따라서 산을 걷고 오르고 내려가는 건 생명유지의 중요한 기능이다.

친구들을 만났을 때,
적절하게 건강관리를 한 친구는 잘 걷고 말을 할 때도 조리 있게 잘하지만,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하거나 앉았다 일어날 때 힘들어 하는 친구는 말을 할 때도
약간은 어눌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오늘 대둔산이라는 골산(骨山)을 오르며 산의 정기(正氣)를 제대로 받으려나.


11;40

출렁다리를 건너기 전 잠시 휴식을 한다.

누가 피우는지 담배연기가 심하게 날라 온다.


10m정도 떨어진 의자에서 몰상식한 젊은이가 담배연기를 허공에 뿜는다.

쫓아가서 제지를 하고 싶지만 산림보호원 신분증 유효기간이 지나서 잔소리를 하기도

쉽지 않아 그쪽으로 눈총을 보내니 슬그머니 담뱃불을 비벼 끈다.


요즘 같은 건조기에 담뱃불이 수많은 생명을 앗아갈 수가 있는데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일이 조금만 잘되어도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뻐하고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실망하고 좌절하기 일쑤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일이 성취되길 바란다.

따라서 목표하는 일이 조금만 잘되어도 기뻐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으면 실망하고

좌절을 한다.


어떤 사람은 작은 재물과 명예와 권력을 가지게 되면 교만해지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한없이 비굴해지기도 한다.

행복을 추구하는 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라 늘 부족함과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허공에 뜬 구름다리를 밑에서 올려다 보며,

언젠가 팔정도(八正道)라는 글을 읽고 휴대폰에 메모를 한 기억이 난다.


정견(正見), 바른 견해란 진리를 바로 보는 지혜로 바른 세계관과 인생관을 갖는 것을 말하며,

 

정사유(正思惟), 번뇌와 망상을 멀리하고 성냄과 원한이 없는 생각으로 말이나 행동을

하기 전에 바른 생각을 하며,

 

정언(正言)은 거짓말과 악담, 이간질 등 허언(虛言)을 하지 말고, 도리에 맞는 바른 말과

고운 말 부드러운 말을 하라는 뜻이며,

 

정업(正業)은 살생 도둑질 부당한 거래와 성적인 방종을 삼가고, 올바른 생활규범을 지키며

온화한 행동을 하라는 것이다.

 

정명(正命)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부도덕한 행위를 멀리하며 정당한 방법으로 의식주를

얻어 바른 생활을 하라는 말이며,

 

정정진(正精進), 아직 일어나지 않은 나쁜 생각을 멀리하고 이미 일어난 나쁜 생각을 없애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착한 생각을 일게 하고 이미 일어난 착한 생각을 원만히 키워 나가도록

바른 노력을 해야 하며,



정념(正念), 바른 생각이란 생각을 한곳에 집중하며 몸과 마음의 진리를 바로 관찰하고

탐욕에서 일어나는 번뇌를 없애는 것이다.

 

정정(正定), 즉 바른 명상이란 온갖 욕심과 산란한 생각을 가라앉혀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며

선정에 들어감을 말하는 것이다.

 

팔정도를 쓰며 매우 간결하고 평범한 내용이지만 세속인들이 어느 하나라도 지킬 수 있을까,

도(道)를 닦지 않은 일반인들은 이를 실천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일면스님이 쓴 글을 읽으며

마음에 와 닿았기에 메모를 풀어쓴다.


11;44

구름다리를 오르기 전 나오는 계단을 아기가 힘이 드는지 네 발로 기어오른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독야청청(獨也靑靑)하는

영객송(迎客松)을 줌(Zoom)으로 당긴다.


               <             길


                   내가 밟는 절벽 길

                   길이 끝나는 곳에 푸른 생명이 있었네.


                   그곳으로 가는 길이 없어도

                   마음의 길이 있었네.


                   마음의 길을 따라 그곳으로 가네.

                   하늘과 땅이 맛 닿은 곳.

                   어느 멋진 봄날에

                   영객송이 있는 그곳으로 내가 간다네 .                석천   >



길이 50m 높이 80m로 대둔산의 명물인 구름다리로 올라선다.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 고소공포증으로 울상을 짓는 사람이 손을 잡고 천천히 건넌다.

            

구름다리를 건너며 에드워드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을 흥얼댄다.



마냥 멀게만 느껴졌던 정상 오름길을 줌으로 당긴다.

정상이 손안에 잡히고 사람들이 꾸물거리며 오른다.


정상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삼선 철사다리를 오르는 사람들이 개미와 같이 붙어 바위 길을

수놓는다.


산은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따라서 높이와 숫자로만 어림하기엔 매우 어려운 존재다.


산악인들과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우리나라에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빼닮은 수많은 소금강(小金剛) 중에 가장 금강산 같은

산으로 대둔산을 꼽는다.


영암 월출산의 기암괴벽과는 또 다른 모습을 연출하는 마천대의 절경을 바라보며

정상에 오를까 말까 갈등이 생긴다.

오르면 집합시간에 늦을 거 같고, 안오르면 서운할 거 같아 줌으로 당겨본다.


이보다 덩치가 작은 주왕산도 국립공원인데 대둔산은 도립공원이다.

나같이 어쩌다 들리는 뜨내기 산객이야 도립(道立)이면 어떻고 국립(國立)이면 어떤가.

그렇지만 대둔산에 산신령이라도 계신다면 서운하지 않을까.  


시간을 다시 체크하며 이곳에서 바로 하산하기로 결정하고

지도상에 있는 장군봉 칠성봉 쌍갈바위 등 수많은 기암봉은 포기를 한다.


설(說)에 의하면 원효대사는 대둔산을 사흘을 둘러보고도 발이 떨어지지 않았고,

만해 한용운도, 우암 송시열도 이 산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글귀를 남겼다는데,


정작 나는 케이블카를 기대했다가 바위협곡을 오르는 바람에 시간이 빠듯해 정상에 오르지

못하는 우(愚)를 범하며 후일을 기약하지만 이런 골산(骨山)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질색이니

언제 다시 오를지 모르겠다.


다만 먼 훗날 마음이 바뀌고, 이 산이 그리워지면 나 홀로 오르리라.


구름다리에서 보는 대둔산의 암릉미가 뛰어나다.

전체가 아닌 일부의 암릉미가 이렇게도 탁월하니 전체를 보지 못하는 아쉬움이 크기만 하다.


작은 금강이라 불리는 대둔산, 20년 전 다녀온 금강산과 견주어도 지지 않을 정도의

암릉미는 나같이 평범한 사람이 평(評)하기에는 미안하다.

급경사의 삼선구름다리가 아찔한 고도감을 주고 뒤편으로 정상인 마천대의 개척탑이 보인다.


수석전시장 같은 기암의 곳곳에 뿌리를 박은 소나무들이 독야청청을 자랑하고

구름다리 위에 선 내 눈은 호사를 충분히 누린다. 


조금 전 내가 올라온 금강협곡의 길게 이어진 길로 사람들이 개미처럼 움직인다.


홍백창은 유산보인(遊山譜引)에서 유산오계(遊山五戒)를 꼽는다.

그는 관원은 욕심 사납게 높은 곳까지 말을 타고 오르니까 관원과 다니지 말라고 하며,


또한 동반자가 많으면 안 된다며 마음과 체력이 서로 달라 혼자 마음대로 가고 쉬는 것만

못하니 가급적이면 혼자 다니라고 한다.



또한 바쁜 마음을 버려야 한다며 일정에 너무 욕심만 내면 주마간산(走馬看山)이 되니

시일을 한정하지 말고, 멀고 가까움도 따지지 말며 마음으로 감상하고 흥취를 얻는 것으로

기쁨을 삼으라 한다.


사람을 함부로 부리지 말고,

힘을 헤아려 3분해서 1분은 오를 때, 2분은 돌아오는데 쓰며,


오르는데 힘을 다 쓰면 돌아올 때 반드시 큰 근심이 생긴다며 근력을 헤아려 노정을

따져가며 가고 머묾을 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산행뿐만 아니라 세상을 사는 마음까지도 말하는 거다.


12;00

낙석이 심해 길이 일부 폐쇄되었다.

무릎보호대를 차지 않았으니 급경사를 내려가며 평소보다 속도를 반 이하로 줄인다.

무릎은 10여 개의 관절 중에서 가장 많은 체중의 영향을 받는데 평지를 걸을 때 보다
4~7배의 하중이 가해지며 무릎에 부담을 주기에 스틱을 의지하며 천천히 하산을 한다.

지난겨울 수십 년 간 해오던 새벽운동을 뇌졸증이 두려워 쉬었더니 체중이 무려 4kg이나
늘었다.
물론 그동안 빠진 체중에 안심을 하며 술과 고기, 아이스크림을 대책 없이 먹었더니
체중이 꽤 많이 는 거다.



고개를 숙인 채 내려가다 느낌이 이상해 뒤를 돌아본다.

작은 생명인 '흰제비꽃'이 바위틈에서 내 발걸음을 붙잡으며 그윽한 눈길로 나의 노곤한

몸을 다독인다.


바위 아래 아기현호색이 신비로운 색깔로 피었다.

때가 되니 찬란히 살아난 새싹들이 나에게 시심(詩心)을 불어준다.


                 <                  새싹


                      땅속에 묻혀 썩은들 어찌 사라지겠는가.

                      죽은 풀 씨앗 되어

                      새싹으로 다시 살아난다.


                      내 몸 죽어 묻혀도 다시 살아날까.

                      때 되면 다시 살아날까.

                     

                      따스한 바람, 따스한 햇볕

                      맑은 물 한방에 새싹은 다시 살아나기에

                      엉뚱하게 새싹도 아닌 나도

                      허황된 일장춘몽을 꾸는구나.            석천>


봄은 이렇게 다가왔다.

무채색의 대지에 녹색이 슬그머니 나타나더니 아기현호색의 연보라색 꽃이 세상의

색을 바꾼다.


점점이 돋아나는 연두와 땅속에서 꽃들이 올라와 겨울의 칙칙함을 덮고 새 세상을

펼치기 시작한다.


환경도 산길도 험한 곳.

발걸음이 경쾌해지고 오늘의 여정은 여기가 끝이다.


언젠가 내 삶에 시린 바람 불어올 때 이곳을 떠올리리다.


13;00

1894년 10월 10일 부터 전봉준의 동학농민군 천여 명이 3개월간 항쟁하였다는

전적비를 읽으며 오늘 산행은 끝이 난다.



목련꽃잎이 햇살을 받아 반짝거린다.

가는 바람에 가지들은 몸을 살짝 떨고 목련꽃잎 한두 개가 나풀거리며 땅으로 떨어진다.


            <             목련꽃


               피었다 지는 것이 비단 목련꽃 만인가,

               우리네 인생도 늘 푸를 수만 없는 

               세상살이라오.


               내 인생살이 늘 그러한 것처럼

               세상의 꽃도 피었다 지고

               열매를 맺고 꽃은 떨어져도

               뭇 생명의 거름이 되니

               어찌 허무하다 하리오.

 

               저무는 세월 빛도 처량한 슬픔을 주는데

               흰 목련 마저 꽃잎이 떨어지며 서글픔을 주는구려.

               목련꽃이 떨어지며 외로움을 주니 

               나는 어디서 새 생명의 활력을 찾으리까.                            석천   >


하얀 목련을 바라보며 스트레스가 사라지고, 몸속에 찬 자신감과 즐거움으로
콧노래가 나온다.


13;20

행 후 술 한 잔을 나누며 초심(初心)과 순수(純粹)라는 말이 생각난다.

처음 시작할 때 먹었던 마음가짐을 초심이라 하는데 초심은 바로 빈 마음이다.


지금 이 얼굴들은 1967년에 만나 50년 세월을 같이하는 친구들이다.

순한 얼굴엔 서로의 원망과 슬픔 , 회한과 미움 등 일체 마음의 찌꺼기도 없고,

그냥 텅 비어 버린 허공(虛空)같은 마음만 보인다. 


너와 남을 구분하지 않고 그냥 우리라는 마음으로 술 한 잔을 건넨다.

다같이 집착이나 탐욕이 없는 모습은 바로 우리의 순수(純粹)한 마음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급속도로 변한다.

과거의 시간보다 앞으로의 시간은 더 빨리 변하고 우리 나이엔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다.


비록 빠르게 질주하는 황혼의 삶이지만,

바쁘게 내달리지만 말고 서로의 마음을 헤아려가며 함께 살아야 행복을 얻을 수 있겠지.


음식은 혼자가 아닌 같이 먹을 때 즐거움이 증폭된다.

행복은 거창한 것이 아니고 술 한 잔을 나누며 소소한 즐거움이 쌓일 때 배가(倍加)가 된다.


우리가 일상에서 가장 행복을 느끼는 경우가 무엇일까.

보고 먹기와 말하기가 아닌가?

그 중에서도 가까운 친구와 잔을 부딪치며 마시고 말하기가 행복 중 단연 으뜸이다.


요즘은 온통 먹는 얘기가 세상의 TV를 점령한지 오래가 됐다.

과거에 주방장으로 불리던 사람들이 일약 유명세를 타고 세프로 불리고 먹방을 주도하며

한국인은 먹기 위해 산다는 걸 전 세계에 알리고 있다.


서너 시간 산행에 시장기가 몰려온다.

공리주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이라는 사람은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라고 했다.


어쩌면 자기중심적 탐욕에 대한 경계를 하라는 말인데, 사람들은 배가 고프면 소유욕이

더 높아지는 게 사실이라 나 또한 빈속에 서너 잔을 단숨에 마셔버린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죽기 살기로 달려가는 어리석은 인간들과는 다르다.

천천히 느림의 미학을 실천하면서 가던 길 잠시 멈추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내가 잃어버린 것, 잊은 것, 놓쳐버린 것을 분명히 찾을 수 있겠지.


처음으로 돌아가 시작하는 마음으로 마음의 장벽을 없애자.

삶이 공허하고 흔들릴 때 서로 의지가 되자고 무언(無言)의 약속을 한다. 




대둔산 산행도 끝났고 오늘이 지나간다.

어제는 이미 과거 속으로 들어갔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다.

오늘 이순간 서로가 최선을 다하고 오늘처럼 소중한 시간을 사랑하자.


대둔산 산행을 하며 찍은 사진 선별 작업을 하다가 서재의 창밖을 내다보니, 어제의

더위를 물러가게 하려는지 봄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갑자기 찾아온 대둔산의 더위에 에어컨 바람을 맞았다가 코가 막히는 냉방병에 걸려

밤새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비 예보가 없었는데 어느새 땅은 다 젖었고 응달에 있어 필 것 같지 않았던 백목련의

꽃망울이 소리를 치며 터지기 시작한다.

어제까지도 소식이 없었던 벚꽃도 피기 시작하고 모과나무에도 작은 잎이 나오기

시작한다.


뜻밖에 생명수를 얻어먹은 나무와 풀들이 금세 소리를 지르니 이 소리는 빗소리와 함께

분명 봄이 아우성치는 소리다.

                                              

                                          2016.  4.  2.  대둔산 산행을 마치고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