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1. 27.
회색빛 도시에 그나마 남아있던 은행나무 노란 잎은 다 떨어졌고,
나는 가을이 가는 게 아쉬워 만추(晩秋)의 뒤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간다.
대전을 지나니 가을의 향연은 끝났고 조금 남은 노랑· 빨강 단풍잎들이 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국도로 접어들자 창문을 열고 상쾌한 시골바람을 담는다.
여름내 뜨거운 태양빛을 온몸으로 받아들여 여물었던 황금빛 낟알들은 벌판에서
사라지고, 앞서 가는 트럭이 지나간 자리에 노란 은행잎이 팔랑개비가 되어 꽃잎처럼
뿌려진다.
11;23
222km를 달려와 도착한 운장산 피암목재는 썰렁하다.
주차된 차량은 여러 대지만 인기척은 사라지고 한 귀퉁이에 있는 포장마차에서
생선묵 덥히는 수증기만 모락모락 올라온다.
산행지를 고르기에는 요즘이 제일 어렵다.
웬만한 산은 11월15일부터 내년 2월 15일까지 산불방지를 위하여 입산통제를 한다.
금남정맥에서 가장 높은 운장산 산행 코스 중 다행히
내가 오르는 피암목재~운장산 칠성대~운장대~내처사동 구간은 통제하지 않는다.
안내판에선 운장대까지 2.7km에 두 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경사도가 만만치 않겠지만 정상은 사방으로 시야가 탁 트여있어 아래세상의 열린 풍경을
볼 수 있다니 그 광경을 상상만 해도 가슴이 설렌다.
출발지의 해발고도가 564m라 약 600m 정도만 고도를 올리면 되는데,
구간 길이가 짧은 만큼 된비알을 단단히 각오해야겠다.
기상예보는 오늘 맑다고 했다.
그런데 태양이 숨었다.
옛 선인들은 가을 햇살이 달다고 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가을 햇살이 보약이라고도 했다.
단맛이 필요하다면 주머니에 든 사탕이나 초콜릿을 입에 넣으면 되지만 가을 햇살은
그렇게 단맛이 아니다.
그냥 달달한 맛이라 하기에 가을 햇살의 단맛을 보기 위하여 코구멍을 벌름거려도,
입을 벌리고 눈을 크게 떠도 일기예보와 달리 햇살이 사라졌다.
그래도 가을바람 불어 좋은 날이니 물기 내려놓고 바닥에 떨어진 낙엽의 사각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마음속으로 가을햇살을 그리워하리라.
계단을 오르자 낙엽 쌓인 숲길이 이어진다.
숲이 품은 아기자기한 길을 오를 때는 내 사유(思惟)의 창고를 열고 마음을 담아야 하는데
헬리콥터 세 대가 굉음을 울리며 방해를 한다.
시인 TS엘리엇은 그의 작품 '황무지'에서 4월이 잔인한 달이라 했다.
엘리엇은 봄이 시작되는 4월은 움트기 시작하는 새싹이나 꽃들에게 남은 추위가 잔인
하다고 생각해 4월이 잔인하다고 했던 모양이다.
우리나라에서 민주화를 향해 피를 흘린 정치적 격변기는 주로 4월에 많이 일어났다.
그래도 나는 11월이 잔인한 달이라고 생각한다.
생육성쇠멸(生育盛衰滅)이라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과정에서 11월은 쇠(衰)를 거쳐
이미 멸(滅)의 세계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체를 보존하기 위해 떨켜층을 만들어 나뭇잎을 몽땅 낙엽으로 만들어 떨어트린
앙상한 나무들이 산위에서 내려오는 차가운 바람에 몸서리를 친다.
나는 낙엽이 지는 것을 슬퍼하지 않는다.
낙엽이 져야 이듬해 봄의 새싹을 기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을햇살 사라진 산속 계곡을 타고 내려오는 차가운 바람은 나무와 덩달아 내 몸도
썰렁하게 식혀주기에 서둘러 방한모를 꺼내 쓴다.
11;32
건십(gunship) 두 대가 약 800m 상공에서 하버링(Hovering)을 하고,
건너편 동봉 쪽에선 코브라 헬기가 제자리비행을 하다가 운장대 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레펠(rappelling 현수하강) 훈련을 하는 것도, 물자를 공수하는 것도 아닌데,
한곳에서 제자리비행을 계속하니 굉음(轟音)도 불편하지만 왠지 모르게 불안해진다.
최근 강선영 준장이 여성 최초 소장으로 진급하여 육군 항공작전사령관에 임명되었는데
훈련이 강화된 모양이다.
장병들의 극기력과 전투력 등에 집중하고,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다는 해병대도
독자적인 상륙작전을 진행하기 위하여 2023년까지 마린온 헬기 36대를 전력화해
2개 상륙기동헬기 대대를 만든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지금까지는 육군과 미군에 의존해 기동, 정찰, 화력 등의 지원을 받아 상륙작전훈련을 진행
했는데, 해병대에 상륙기동헬기가 도입되면 멀리 떨어진 바다에서 3만t급 강습상륙함에서
적 해안 점령에 투입되는 해병대원을 태운 상륙기동헬기가 비행갑판을 이륙해 목적지로
향하는 광경을 상상해본다.
20mm 기관포와 로켓탄, 공대지미사일로 무장한 공격기동헬기가 한발 앞서 적군의 벙커와
탱크 등 장갑차량을 파괴하며 기선을 제압할 수 있는 능력이 조만간 현실화되는 모양인지
이 글을 정리하는 중 12월 1일 해병 1·2사단의 항공대를 해체하고 상륙기동헬기인 마린온
18대를 배치하여 1항공대대를 출범하였다는 소식이 들어온다.
우리나라는 현재 동북아 최강의 헬기 전력을 가지고 있는데 더불어 2021년 상륙공격헬기
대대를 해병대에 추가로 배치한다니 기대를 가져본다.
11;50
간밤에 꾼 꿈이 생각난다.
어머니가 고등학생 교복을 입은 나에게 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나는 "사업을 해 돈을 많이 벌고 싶다."고 하였으나 은행지점장으로 끝을 맺었다.
어머니는 내 옆에 서있던, 지금은 고인(故人)이 된 배우 이동진 친구에게도 묻는데
동진이는 '딴따라'가 되고 싶다했다.
지금은 연예인이 스타로 대접을 받지만 당시만 해도 탤런트 등 연예인을 딴따라라고
비하를 하는 시대였지.
말 그대로 그 친구는 배우가 되어 하이틴 영화에 출연하고, Tv 수사반장 프로에서
최불암 선생과 형사로 열연하다가 하와이로 이민을 가 간암으로 별세했다는 소식을
들은 게 엊그제 같은데 꽤 많은 시일이 흘렀으니 이젠 저승에서나 만나겠다.
운장산은 산행 들머리부터 된비알로 시작하더니 계속 급한 경사가 이어진다.
인터넷에서 험하다는 표현이 없었는데 난이도가 중급 이상이다.
박무(薄霧)속에 꿈틀거리는 유장한 능선은 어느 산일까,
몇 년 전 올랐던 안수산인가, 덕유산이 꿈틀거리는 백두대간인지도 모르겠다.
지금껏 내가 올랐던 산 중에 구름 운(雲)자가 들어간 이름을 가진 산이 많다.
가평 운악산(937.5m), 원주 백운산(1087m), 광양 백운산(1222.2m), 용문 백운봉(940m) 등
한결같이 1,000m를 넘나드는 높은 산이라 구름이 걸릴 만도 하고,
이밖에도 선운산, 운길산과 운문산 등이 있으니 산 이름에 구름 운(雲)자가 꽤 많이 들어갔다.
갑자기 헬기소리가 멈췄고 헬기 소리가 사라진 공간을 찬바람이 메꾼다.
거센 바람에 몇 잎 남았던 잎새가 낙엽 되어 발밑으로 흩뿌려지며 마음속에 내린
낙엽 한 장이 된다.
12;04
가을이 가는지도 모르게 재빨리 사라졌다.
발아래는 떨어진 낙엽들이 나뒹굴고 내가 밟을 때마다 가루가 된다.
가을의 잔해(殘骸) 사이로 가을꽃 한 송이 남았을까 두리번거리며 찾아도 처참하게 부셔진
잎새뿐이다.
계곡물소리도 들리지 않는 능선에 부딪치는 공기가 참 맛있다.
청량한 공기라서 더 맛있는 모양이다.
현재 고도가 얼마나 될까 Gps를 켜니 821m로 나온다.
위치기반 고도계는 760m요, 기압 고도계는 705m를 표시하니 무려 116m나 오차가 생기는데,
어느 게 맞는 건지 고도계에 대하여 전문지식이 없으니 답답하다.
지금까지 올랐던 길은 물 흐르듯 편안한 숲길이 아니었다.
가파른 된비알을 오르다 잠시라도 조망처와 평지가 나와 헐떡거리던 숨을 몰아쉬고 나면
심장이 평온해진다.
어찌 보면 산은 숨을 터주는 숨터이자 황혼인생의 철학이기도 하다.
산을 알아간다는 것은 삶을 알아간다는 것이 아닐까.
오가는 산객도 없고 인적이 끊어진 산,
굉음을 내던 헬기가 사라진 하늘엔 까마귀가 주인이고, 산길에선 내가 주인이라
소리를 질러본다.
산은 메아리마저 삼켜버리고 칼바위 능선으로 메마른 바람을 보내 을씨년스런 분위기를
만든다.
산길이 다시 표정을 바꿨다.
낙엽 쌓인 길은 너덜로 바뀌고 말라비틀어진 단풍도 사라졌다.
잠시 아무 생각이 없었다.
몸은 무의식 상태에서 정상을 향해 거친 길을 오른다.
무념무상(無念無想)은 의지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자제력을 높여주는 디폴트(default)
효과를 주는 모양이다.
일상에서 한발 물러나고 세상사를 잠시라도 잊으니 근심걱정 사라졌다.
험한 길이 나올수록 나 자신이 선명해지고 나를 살아나게 하는 묘한 매력을 가진 운장산에서
처음으로 내리막길이 나온다.
독제봉(獨帝峰)이라 불릴만큼 우뚝 솟은 서봉(西峰)의 오만한 모습에 슬쩍 기가 질린다.
저 봉우리를 무사히 오를 수 있을까.
12;22
며칠 전 국민은행에 들리니 탁상용 캘린더를 챙겨준다.
지난해 받았던 캘린더가 아직도 한 장이 덩그러니 남았는데,
쏜살같이 흐르는 게 세월이라는 것을 느낄 새도 없이 일 년이라는 세월이 후딱 지나간다.
같은 일 년을 보냈어도, 한 해를 살아온 각자만의 방식에 따라 속도감이 다르다.
청년시절 더디기만 했던 세월이 황혼이 되자 너무나 빠른 속도로 지나가 어느새
연말이 다가왔다.
12;48
작은 봉우리를 거쳐 활목재(880m)에 도착한다.
힘들어지는 순간 불어온 바람이 힘을 준다.
600m를 더 올라야 칠성대가 나오고 운장대까지는 1.2km가 남았다.
계속 땅만 보고 올랐더니 고개도 아프고 숨이 차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지금까지도 된비알이었는데 앞에 보이는 서봉에 오르려면 경사 45도가 넘는 비탈을
더 올라야 한다.
한참을 올랐어도 서봉은 늘 그 자리에 있다.
악산(惡山)도 아닌데 서봉을 오르는 급경사는 악소리가 저절로 나오게 만든다.
거친 계단에 걸려 다리가 휘청거린다.
다리가 휘청거릴수록 가슴이 터질듯 두근거릴수록 더 나다운 나를 만들어주는 게 산이다.
악산으로 소문이 나지 않은 산이라 이 봉우리만 오르면 선물같은 풍경을 내어주려나.
설렘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가 썰물처럼 빠져 나가면 외로워질 텐데,
저곳을 오르면 내가 모르는 미지의 자연을 만날 수 있겠다.
13;33
두 시간 만에 산마루에 올랐다.
해발 1,120m의 서봉이다.
노령산맥과 백두대간의 유장한 산줄기가 일렁인다.
예전엔 노령산맥이라 했는데 지금은 금남정맥으로 이름이 바뀐 장엄한 산줄기와
너른 품이 나를 안았다.
태백산맥, 소백산맥, 차령산맥, 노령산맥, 낭림산맥, 함경산맥, 마천령산맥, 광주산맥,
적유령산맥, 강남산맥, 멸악산맥, 언진산맥, 묘향산맥 등 예전에 배웠던 산맥을
떠올린다.
신(新) 산경표에선 노령산맥을 금남정맥이라고 하는데 1대간 9정맥에서 운장산은
금남정맥의 최고봉이다.
주화산(565m)~연석산(925m)~운장산(1126m)~인대산(666m)~대둔산(877.7m)~
월성봉(650m)~바랑산(555m)로 연결되는 금남정맥의 최고봉인 운장산 서봉(1120m)에서
360도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조망은 최근 오른 산중에서 단연 압권(壓卷)이다.
몸과 마음이 무너졌던 시절,
나에게 힘을 주었던 산 정상에서 바람소리와 함께 나의 거친 숨소리가 들린다.
13;40
중봉이 600m 거리에서 유혹을 한다.
지금 시각 오후 2시가 다돼가는데 저곳까지 다녀오려면 약 1시간이 더 소요된다.
당초에 목표한 오후 4시까지 하산을 완료할 수가 없어 칠성대에서 하산을 하기로 한다.
요즘같은 겨울산행에선 일몰 1시간 전에 하산을 완료해야 안전하다.
특히 해발 1,000m가 넘는 고산에선 어둠이 일찍 몰려오기에 부득이 결정을 내리는 거다.
이 산은 운장산(雲長山)이다.
해발 1126m로 금남정맥의 주봉이다.
연석산과 함께 800~1000m의 웅장한 산지를 형성하고 있는데,
왼쪽으로 동봉, 가운데가 중봉인 운장대가 최고봉을 이루고 지금 내가 서있는 서봉인
칠성대는 해발 1,120m이다.
구름에 가려진 시간이 길다 해서 운장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이 산에서 만경강 상류와 금강 상류가 발원하여 만경강과 금강의 분수령이 되고 있다며,
소백산맥과 노령산맥의 지형적 영향으로 1,300mm 내외의 다우지역이라고 자료에서
말한다.
무진장이라 불리는 무주, 진안, 장수 일원의 고산준령을 조망하는 즐거움이 있는 곳,
마이산 위로 구름 띠가 만들어지기 시작하고, 그 아래로는 깊고 긴 계곡들이 숨을 죽이고
있다.
주자천·정자천 등이 발원하여 만경강과 금강의 분수령이 되고 있다는데
큰 산과 강은 불가분(不可分)의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일명 독제봉(獨帝峰)으로 불리는 서봉앞에 선다.
일망무제(一望無際)의 조망이 펼쳐지는 거대한 바위 봉우리앞에서 군대에서 배운
수색정찰의 요령을 생각하며 시계방향으로 조금씩 끊어서 바라본다.
동쪽 덕유산에서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장벽인 백두대간이 박무 속에서 꿈틀거리고
그틈 사이로 당나귀 귀를 보는 듯 쫑긋거리는 마이산도 희미하게 보인다.
기반암은 중생대 백악기의 퇴적암과 화강암류라는데 칠성대의 작은 표지석이 외롭다.
인간의 생(生)과 사(死), 길흉화복, 수명(壽命)을 관장하는 칠성신을 뜻하는 칠성대
뒤쪽으로 아찔한 절벽이라 접근하기가 겁이 나 올라가지 않고 정상석을 바라본다.
어머니께서 뒤꼍 장독대에 정화수를 올려놓고 칠성신(七星神)에게 가족의 무병장수,
소원성취, 자식의 성장, 인과태평을 빌던 광경이 새록새록 기억이 난다.
바위를 간신히 기어올라 정상석앞에 쪼그리고 앉은 친구는 주역에서 말하는
<독립불구 獨立不懼 문세무민 遁世無悶>이다.
즉 혼자 서 있어도 두렵지 않고, 세상과 떨어져 있어도 고민하지 않는 경지를 말하는데
나는 정상석에 오르기가 만만치 않아 포기를 한다.
북두칠성의 일곱 성군(星君)이 운장산에 사는 스님과 선비를 시험하기 위해 내려왔다가
무슨 사유가 있었는지 실망해 하늘로 다시 올라갔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칠성대,
비박이나 야영을 한다면 멋진 일출과 노을, 수많은 별무리를 볼 수 있는 매력적인
봉우리겠다.
칠성대에서 아래세상을 내려다보니 마음이 편해진다.
사람마음이란 참 간사하다.
여기까지 오르며 가슴이 답답하고 우울하기까지 했는데 다 사라졌다.
원래 사람마음이란 외부의 환경에 얽매이면 정돈되지 않기에
스스로 찾으려 하고 어렵게 찾은 답이라도 마음에 스며들어야 안정이 되는 법인데
광활한 고원과 계곡을 내려다보며 안정을 찾으니 참 묘한 곳이다.
귀를 열어 바람을 통해 하늘의 소리를 듣는다.
안 들으니 못 듣는 난청사회가 된지 오래요, 안 듣고 못 들으니 사람들은 마음을 닫는다.
혀가 귀를 밀어낸 세상이라 다변가(多辯家)가 달변가(達辯家)를 누르다가 범죄인이
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말도 안되는 말을 해놓고도 주워 담지 않는 뻔뻔한 세상에서
산 정상의 바람소리, 구름소리만 듣고도 마음이 편해지니 이곳은 가시적(可視的)
조망처이자 심리적(心理的) 조망처요,
들음으로써 마음을 얻으니 운장산은 이청득심(以聽得心)의 산이기도 하다.
중봉과 동봉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이름에 걸맞게 운장대에 구름이 길게 걸리더니 슬그머니 사라졌다.
구름엔 흰 구름인 백운(白雲), 색색의 구름인 채운(彩雲), 하늘 높이 두둥실 떠있는
청운(靑雲)이 있고, 폭우·돌풍·번개와 같은 기상 현상을 유발하는 적란운(積亂雲)이 있다.
지금 운장대 상공에서 사라진 구름은 바람과 함께 사라진 풍운(風運)이다.
풍운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거센 바람과 함께 흑운(黑雲)이 모여든다.
박무(薄霧)를 서서히 밀어내고 오운(烏雲)이 몰려드니 하산을 서둘러야겠다.
야영도 가능한 칠성대에서 저녁노을을 보는 맛은 어떨까를 상상하는중 바람이 몰아친다.
바람이 시(詩)를 쓰는지 윙하는 소리가 아름답게 들린다.
아니 음악을 만드는가 보다.
바람은 일정하게 운율(韻律)을 만들어 귀를 호강시킨다.
< 독제봉(獨帝峰)
어느 날은 꽃에 취해,
어느 날은 술에 취해 산에서 노닌지 사십여년
거센 바람 불어도 독제봉 흔들림 없어라.
이생에서 뛰놀던 그 벗들 어디로 갔나.
운장대 장대한 구름 뚫고 칠성대 일곱 성군 하늘로 올라간 날,
눈 수북이 쌓여 기러기 울어 예는 그 어느 날,
독제봉에 나 홀로 올라 독백(獨白)을 하리라. 석천 >
14;30
하산길 조릿대가 무성한 곳에 있는 황폐한 무덤이 외롭다.
산(山) 사진을 찍는 사진작가들이 좋은 그림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다 해가 떨어져서
부득이 산중노숙을 할 때 가장 안전한 잠자리는 무덤 바로 옆이라 한다.
좋은 묘자리는 햇빛과 바람의 기운을 제대로 받으며,
같은 겨울이라고 해도 불어오는 방향에 따라 찬 기운이 천양지차라고 하는데,
해발 900m의 높이에 쓴 묘도 따뜻할까.
이렇게 높고 깊은 산중에서 묘(墓)를 보면 이상한 기분이 든다.
황량하고 을씨년스러운 묘의 주인은 함평노씨 집안인데 아무도 돌보지 않고 묘비만 있다.
마음을 주는 사람이 없는데 땅이 문을 열지 모르겠다.
가을의 시간이 지나간다.
수목(樹木)은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겨울의 시간을 기다린다.
북풍한설에 시달릴 수목에겐 결코 쉽지 않은 시간이겠지만 그래도 새 생명을 싹 틔우기
위해 온몸으로 가냉량(加冷量)을 받아들이겠지.
한동안 우울하고 침묵속으로 들어가는 날이 많았다.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마음이 답답하기에 무언(無言)으로 침묵을 지키고 싶었다.
사람들은 그런 걸 갱년기라고 하지.
요즘 들어 삶의 아픔을 느끼니 나에게도 갱년기가 온 걸까,
어쩌면 오늘을 살아가는 이유를 모르기 때문이지도 모르겠다.
11월도 며칠 남지 않았다.
달력이 아직도 한 장이 남았건만 괜히 마음이 조급해진다.
한해의 목표를 세웠던 거도 아닌데 왜 그럴까.
같은 일 년을 보냈어도, 한 해를 살아온 각자의 방식과 속도가 다르다.
시간과 세월이 고속으로 흘러가고, 과거라는 이름으로 사라져간다.
얼마나 남았을지 모르는 내 인생의 시간을 남들의 보폭에 맞출 필요는 없겠지만
산행에선 속도를 맞추는 게 중요하기에 보폭을 맞춘다.
15;03
자연이란 무엇일까.
올라가며 보지 못했던 바위가 앞을 가로막는다.
야성미를 가진 맹수 같은 바위의 기묘한 형상을 보며 영혼을 충전시킨다.
15;36
산길을 걷다가 잠시 멈추기도 하고, 비경을 보면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했던 4시간의
산행이 끝났다.
숙소로 이동중 '운일암반일암' 계곡에 잠시 선다.
명도봉(863m)과 명덕봉(846m)이 좌우에 있어 항상 한기가 서리고 한겨울에는 하루
2시간 정도만 햇빛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계곡이 깊다.
하늘과 돌과 나무와 오가는 구름뿐이어서 운일암(雲日巖)이라는 이름과
깊은 계곡이라 햇빛을 반나절밖에 볼 수 없다하여 반일암(半日巖)이라는 이름이 같이 붙은 곳.
약 5km가 된다는 계곡의 절경을 보기 위해 언젠가 다시 찾아오리라.
암벽과 육중한 바위는 나무를 안고 나무를 안은 산은 암벽을 보듬었다.
가을의 설렘도 사라지고 계절의 시간은 겨울을 향해 끊임없이 흘러간다.
집채보다 큰 기암괴석으로 절경을 이룬 계곡을 벗어나자,
농가의 허름한 창고 앞에 서있는 늙은 농부가 허공으로 담배연기를 내뿜는다.
담배연기는 산산조각이 되어 허공으로 사라지고 그 틈을 몰려온 어둠이 메운다.
산속의 시간은 더디 흐른다.
번잡한 곳에 있다면 어디에선가 누군가를 만나고 무언가를 봐야하고,
때로는 바쁘게 지나가는 도시의 시간이지만 산속의 시간은 분명히 다르다.
오래오래 깊고 천천히 흐르는 산속의 시간,
산 너머로 서서히 해가 사라진다.
붙잡고 싶은 시간 속에 늦가을의 어느 날 하루는 이렇게 가는구나.
21;00
술이 취했어도 메모장을 열어 틈틈이 기록한 내용을 읽는다.
생각이 날 때, 관심사항이 나올 때마다 바로바로 메모를 한 게 글을 쓸 때 큰 도움이 된다.
가끔은 어제의 기억도 가물가물해지고, 며칠 전의 일도 생각이 나지 않을 때가 많다.
며칠 전 일이 바로 기억이 나지 않으면 메모장을 들여다보는 게 습관이 되었다.
늘 인위적(人爲的)인 글이 아니라 삶에서 보고 느끼는 걸 쓰고자 했는데, 운장산편이
느림의 미학 499번이고 500번이 목전이다.
500번이 넘어서도 계속 쓸 수 있는 실력이 될지 모르겠다.
2019. 11. 27. 운장산 휴양림에서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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