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느림의 미학 504 서기 2040년에 만난 음성 수레의산(車依山 679.4m)

김흥만 2019. 12. 31. 19:46


2019.  12.  25. 성탄절 오후

캐럴송(carol song)이 사라진 크리스마스.

별로 설레지 않는 분위기로 변한 성탄절에도 째깍째깍 시간은 잘도 흘러간다.


연말까지 168시간이 남았으니 아직도 100시간이 넘게 남았다.

남은 시간 난 무엇을 해야 할까.

책상도, 서랍도 메모장과 지갑 속에 있는 카드까지 다 정리하고 하릴없이 창문을 열고

먼지를 털며 환기를 시킨다.


청소기를 돌리다가 감나무 아래를 내려다보니 까치밥으로 남겨두었던 홍시가 떨어져

붉은 핏떡이 되었다.



담장안의 산수유나무에 노란 꽃이 피더니 덩굴을 이뤘던 장미도 한 송이 두 송이 피기

시작하며 계절의 반란을 일으킨다.


냉각량(冷却量)이 부족하면 가온량(加溫量)이 충분해도 꽃이 잘피지 않을 텐데,

몇 달 후 필 봄꽃을 미리 걱정하는 내가 바보일까.

창문을 닫으며 영하의 날씨를 기다린다.


12.  26.  12;33

찔끔찔끔 내리던 겨울비가 눈으로 변하더니 순식간에 설국을 만들었다.

엷은 박무(薄霧)와 함께 내리는 눈은 지금 내가 서있는 세상을 동화의 나라로 만든다.


기상예보엔 비가 5mm미만으로 온다고 했다.

집을 떠날 때 내리던 비는 이천을 지나면서 진눈개비로 변한다.


음성으로 접어드니 주먹만 한 함박눈이 내려 산의 속살을 감추기 시작한다.

분명 이곳에도 비예보가 있었고 12시에 그친다고 했는데,

불과 3시간 후의 기상예보도 정확하지 않으니 기상청도 정치권을 닮아 가는 모양이다.


12;57

예정보다 한 시간이나 늦게 도착한 수레의산이라,

'수레의산(車依山)'이라는 이름이 참 특이하다.


자료에는 음성군 생극면 차곡리에 수레울 마을이 있는데 그 수레울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날씨가 맑아 전체가 조망이 된다면 산의 형상을 볼 텐데, 잔뜩 흐린 하늘에서 함박눈이

어지니 그냥 고유명사로만 알아야겠다.


명사나 고유명사엔 '의'자가 잘들어가지 않는다.

나는 졸필이나마 몇 자 쓸 때 웬만하면 '들, 의, 적, 것'이라는 말을 쓰지 않으려 애쓴다.


그냥 우리라고 쓰면 되는데 사람들은 굳이 '우리들'이라 표현을 하고,

태고부터라는 말도 태고적부터라고 쓰는 경우가 많다.

근데 산의 이름에 '의'자가 들어가니 조금 어색하다.


평생 두자 또는 세자의 산 이름에 익숙한데 문장에서 주체의 구실을 하는 명사·대명사·

수사를 총칭하는 체언(體言)의 뒤에 붙어, 선행하는 체언이 사물에 대한 소유의 주체임을

나타내는 관형격 조사인 '의'자가 들어가니 다소 어색하기에 말하는 거다.


소속리산에서 내려왔다는 수레의산은 음성의 진산(眞山 또는 主山)이라고 한다.

안내지도를 보며 무주는 덕유산, 태백은 태백산, 진안은 운장산이요, 장성은 방장산,

하남은 검단산이요, 남양주는 예봉산, 진천은 봉화산 등 각 지방의 진산을 기억해낸다.



A코스로 향한다.

산행시간은 여유가 있지만 눈이 얼마나 더 내릴지 변수가 되겠다.


옛날에는 상원암이 있었다고 하며,

수레의산은 사람이 때가 묻지 않아 원시림 상태의 처녀림을 자랑한다고 자료에서

설명한다.


또한 상여바위가 있고 병풍바위 등 특이 지형지물이 많다고 하는데,

폭설과 박무로 시원하게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사락사락 팔락거리며 눈이 내린다.

바람을 타고 펄럭거리며 눈보라가 휘몰아쳐도 좋으련만 함박눈은 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산길에 쌓인다.


하늘에서 꾸륵꾸륵 대는 소리가 들린다.

기러기가 눈보라를 헤치고 어디론가 떼 지어 날아가는 모양이다.


낮고 굵게 들리는 소리가 왠지 모르게 처량하게 들린다.

꾀꼬리는 노래를 한다고 하는데 다른 새가 소리를 내면 운다고 한다.


우리말의 정서와 특징은 묘한 구석이 있다.

사람이나 동물이 아플 때 울지만 새가 노래를 할 때도 운다고 한다.

최근 '보이스 퀸'이란 프로에서 여성 출연자가 혼신을 다해 슬픈 노래를 부르며

심금(心琴)을 울리게 하면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날아가며 내는 기러기 울음소리에 가슴이 쩐하니 늙긴 늙었나 보다.

나도 알게 모르게 가슴에 맺혔던 응어리를 풀고 싶어 앞서가는 친구를 향해 크게 소리를

질러 부른다.


놀기 좋아하는 나에게도 내가 모르는 한(恨)이 있었구나.


13;06

나이가 들면 들수록 삶에 무덤덤해진다.

삶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러서인가.


어느 때부터인가 슬픈 영화를 봐도, 아름다고 애잔한 음악을 들어도 쉽게 감동이 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런데 예외로 '보이스 퀸'이라는 프로를 보며 눈시울을 적시니 내 마음 나도 모르겠다.


발목까지 차오르는 눈으로 인해 걸음이 느려진다.

나는 동창들 보다 나이가 조금 어린 편이다.

며칠 후면 친구 대부분의 나이가 종심(從心)이 된다.


이순(耳順)의 나이에서 벗어나 종심의 나이에 접어들면 어떻게 변화할까.

다들 처음 살아보는 나이라 좀 당황할 수도 있겠다.


나는 동창회나 모임에 참석하면 친구의 행동에 대해 유심히 관찰을 한다.

동작이 느려지고, 어눌해지고 술잔을 놓치기도 하며, 일단 의견이 제시되면 타협이

되지 않고, 웬만해선 고집을 꺾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데 다행인 것은 남 탓을 하지

않는다는 거다.


모두 다 처음 살아보는 나이라 젊으면 젊은 대로, 늙으면 늙은 대로 사는 게 인생이다.

나이가 더 먹으면 삶의 훈장인 주름살이 더 늘고 머리털이 더 빠질 뿐이다.


나이 들어 동작이 굼뜨고 느리다고 마음마저 느리진 않다.

고집이 세고 완고한 건 신중함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에둘러 생각을 한다.


요즘 들어 장난기로 똘똘 뭉쳤던 마음이 조금씩 변한다.

당구를 칠 때, 술을 마시며 수다를 떨다가도 가끔은 한동안 입을 다문다.

말이 많으면 위엄을 손상하니 말 많아 좋을 일이 없기 때문이다.


농담만 하면 마음이 방탕해지고 실속도 없으며, 남들이 우습게 봐 업신여길 수도

있겠기에 남의 말을 들을 때는 중간에 끊지 않고 끝까지 들으려 한다.


내용에 차이가 나고 틀린 말을 하더라도 끝까지 듣고 시비를 가리려고 하지 않는다.

흔히 다툼이 생기고 우정이 어긋남은 대부분 말 때문에 생기기 때문이다.


<         <                눈길


              나 이제 눈길 밟으며 홀로 걷다

              뒤돌아보니 황혼이어라.


              인생길 구비 구비마다 그리움이 고여가고,

              회한(悔恨)이 쌓여 가는구나.


              추운 겨울 눈길 위 하늘에서 기러기 울어대고

              나무 가지엔 눈꽃이 피었어라.


              눈길에 누워 눈 사진을 찍으면

              살아 있다는 생명의 존재가 찍히려나,

             

              늙은 황혼 사진 나올까 두려워 찍지 못하고

              걸어가는 나에게도 살아갈 이유가 있음이니라.           석천   >


13;21

등산로로 접어들자 산안개는 눈과 함께 모든 것을 지워나간다.

거대한 악마가 큰 입을 벌리고 사람도 나무도 모든 것을 삼키듯이 세상을 지워나가는 거다.


산속엔 흑(黑)과 백(白)만 존재할 뿐,

백설은 수레의산을 수묵화(水墨畵)로 재탄생 시킨다.


수묵화로 그릴 수 있는 화목(畵目)은 산수, 인물, 수석(樹石), 화조(花鳥), 사군자(四君子) 등

다양한데,

수석(樹石)을 흰 눈이 점점(點點)으로 그리는 점묘화(點描畵)의 기법에 점점 빠져든다.


학창시절 난 미술과목이 제일 싫었고 자신이 없었다.

상상력이 풍부한 것도 아니고 사물을 표현하는 것도 매우 서툴러 미술점수는 겨우

낙제를 면하기 직전의 점수였다.


그러나 나이가 드니 보는 눈이 달라졌다.

자연의 풍경이나 나무, 꽃을 볼 때 그냥 단순하게 보는 게 아니라 슬슬 감정이

인입되는 거다.


진천중학교를 졸업한지 30년이 되던 해,

'홈 커밍 데이(Home coming day)'에서 담임이자 미술교사였던 송진섭 교장 선생님을

만났다.


주택은행지점장으로 근무 중이라고 하니 매우 반가워하시며 나의 미술성적이

편없었다고 30년 전의 내 성적을 기억하시기에 웃음보따리가 터졌던 기억이 이 산속에서

나니 불현듯 그분이 그리워진다.


동양화를 그릴 때,

뾰족하고 험악한 바위의 표면이나 깎아지는 선(線)의 입체감과 질감을 표현할 때 쓰는

방법으로 부벽준법(斧劈皴法),

부드럽고 완만한 효과를 주는 피마준법(彼麻皴法),


여러 번 점을 찍어 형태를 표현하는 미점준법(米點皴法),

가늘고 뾰족한 붓 끝을 화면에 살짝 대며 점을 찍는 단선점준법(短線點皴法) 등 여러가지

기법이 있는데,


지금 내가 오르고 있는 산은 백설(白雪)이 미점준법, 단순점준법 등 온갖 기법을

동원하여 동양화를 그려 나간다.


습기가 많은 눈이라 아이젠 바닥으로 눈이 뭉쳐져 수시로 털어내도 계속 뭉친다.

눈 쌓인 산길은 너널이 감춰져 수시로 발목이 빠져들고 몸이 휘청거린다.


13;37

폭설이 내리며 세상을 덮어가기에 평범한 산이라도 더 오르기엔 무리다.

눈과 산안개는 온갖 사물을 지웠고 여기는 인간세상의 추함과 악함도 없기에

정상에 오르지 않고 하산하기로 결정한다.


단풍나무 아래에서 잔뜩 긴장한 까투리가 푸드득 대고, 누런 단풍잎에 쌓였던 흰눈이

떨어진다.


임도로 내려섰다.

함박눈 쌓여 길은 사라져가고, 눈속에서 뛰놀며 생의 환희(幻戱)를 느끼고 싶다.

몸에도 마음속에도 내리는 흰 눈에 들떠 콧노래가 나온다.


습설이라 밟을 때마다 푸석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건설이라면 뽀드득 거리는 소리가 날 텐데 푸석거려도 좋다.


수북이 내리는 함박눈발속에 까마귀 소리도 어린 까투리·장끼 소리도 정겹다.

새소리는 사라지고 눈 실린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들만 삐거덕거린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쌓인 길

오늘 남긴 "내 발자국은 반드시 뒷사람의 길이 될지니"라며,

서산대사는 선시(禪時)에서 "눈길에 아무렇게나 걷지 말라"고 했다.


답섭야중거(踏雪野中去)~ 눈 덮인 들길 걸어갈 제

부수호란행(不須胡亂行)~ 함부로 흐트러지게 걷지 마라.

금일아행적(今日我行跡)~ 오늘 남긴 내발자국이

수작후인정(遂作後人程)~ 마침내 뒷사람의 길이 되리니


이 선시를 읽으면 형식이나 격식을 벗어나 궁극(窮極)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서산대사의 경지를 알 수가 있다.


시(詩)와 선(禪)의 만남이라,

시는 마음을 노래하고, 선(禪)이라는 형식을 통하여 고요히 생각하는 정려(靜慮),

생각을 한곳에 집중시켜 정신을 통일하는 사유수(思惟修)를 만난다.

서산대사의 깨달음의 선시를 음미하며 산길을 걸어 내려간다.


세상을 살다보면 대부분은 정해진 원칙과 규범에 얽매여 살 수밖에 없다.

서산대사의 선시를 읊으며 나는 균정(均定), 상칭(相稱) 조화(調和)와 논리를 떠나

조화 아닌 조화, 논리 없는 논리, 목적 없는 목적을 느낄 수 있고, 자유로운 상상을

추구하고 논리를 초월했다는 생각을 한다.


나옹선사의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라는 선시와 더불어

대표적인 서산대사의 오도시(悟道詩)를 눈길에서 음미한다.


참 정신없이 1년을 살았다.

뚜렷하게 해놓은 일도 없이 한순간에 1년이라는 세월이 날아갔다.

12월이라는 종착역도 며칠 남지 않은 오늘 눈길을 걸으며 사유(思惟)에 잠긴다.


지치지도 않고 흘러가는 시간에 무기력하기만 한 나 자신,

생각할 틈도 없이, 여유를 가질 틈도 없이 또 한해를 보내는 아쉬움에 희한만 남는다.


눈 쌓인 산길에서 금년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본다.

사람들은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한해였다는 말로 한해를 마무리하지만,

나는 살아야 한다는 것과 살아있다는 것의 의미 중 살아있다는 것에 소중한 의미를

부여한다.


12월은 어쩌면 버림의 계절인지도 모르겠다.

나무는 자기의 분신인 나뭇잎을 버렸기에 낙목한천(落木寒天)에도 살 수 있다.


버림은 채움을 위한 전단계(前段階)라고 말을 한다.

즉 버리면 버릴수록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12월을 보내면서 또 무엇을 버려야 할까.

나무 위에서 청설모가 가지를 흔들어대고 얼굴 위로 차가운 눈송이가 떨어진다.


14;23

사람들은 비오는 날이나 연말이 되면 감성적으로 변한다.

특히 비오는 날 밤이 되면 애잔한 감정을 갖게 되는데,

오늘 같이 연말에 눈 오는 날 밤은 나도 들뜬 감정으로 변하니 그 범주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보고 싶은 사람, 사랑하는 사람, 그리운 사람, 추억이라는 기억 속에서 사라진지

오래된 사람, 고향을 그리는 향수가 이렇게 눈이 쌓이는 날엔 어김없이 추억 속에

떠오른다.


11.  27.

숙소 벽시계의 해(年)가 20년 후인 2040년을 가리킨다.

디지털 달력의 2040년을 보며 숨이 막히더니 묘한 감정이 흐른다.

고장 난 벽시계도 아닌데 누군가 해학적(諧謔的)으로 20년 후로 시간을 일부러 조정한

모양이다.


2040년이면 내가 몇 살이 될까.

아니 그해까지 살아있을까.

아기들은 결혼할 나이고, 나는 운(運)이 좋으면 이승에 있을 거라는 묘한 생각이 든다.


텅 빈 산속, 텅 빈 숙소엔 적막만 흐른다.

밤새 내리던 눈은 그쳤고 하늘을 가르는 전투기 굉음이 다가왔다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2019년도 며칠 남지 않았다.

시간으로 따져도 불과 100여 시간이 채 남지 않은 지금,


나의 올해는 어땠을까.

모든 일 뜻대로 이뤄지지 않았지만 상처받고 화나는 일도 눈 속에 파묻고

새해를 맞이하련다.


이젠 남은 삶에 날 세우며 사는 것도 싫다.

힘든 일이 닥쳐도 충청도 말같이 "괜차녀~"하며 살아야겠다.


                                                     2019.  12.  27. 수레의산에서

                                                                  석천  흥만  졸필